“별말씀을요^^ 조심히 오세요.” 3년 전 의료사고로 아들을 잃은 김영희(36) 씨. 이른바 ‘종현이법’(환자안전법)을 추진하는 그에게 조심스레 인터뷰를 청하자 문자메시지가 왔다. 상처가 깊을 것 같았는데 이모티콘까지 보내다니 의외였다. 하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기자를 배웅하며 “내가 있고 우리가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가 있고 내가 있더라”고 말한 (정)종현 엄마.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종현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잘 자란 꼬마였다. 5세 때 갑자기 코피가 멈추지 않았고, 동네 이비인후과에서 “코에 있는 혈관이 약하다”며 지혈을 해줬기에 부모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다 1년 뒤인 2007년 4월, 아이 얼굴이 너무 시커멓게 변해 병원을 찾았다. 한의원에서는 혈액검사를 받아보라고 했고, 인근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받으니 “아이가 쓰러지면 119 불러 큰 병원으로 가라”고 일렀다. 종현은 이튿날 경북대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림프구 전구세포의 암성 증식에 의해 정상 혈구가 감소하고 장기에 침윤해 장기손상으로 수개월 내 사망하는 질환)에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종현이가 몸이 힘들어 그런지 과자 사달라, 책 읽어달라며 떼를 쓰는데…. 가슴이 미어졌어요. 다행인 건 상태가 좋은 편이라 완치 확률이 90% 이상 된다는 거였죠.”
종현은 4월 21일부터 10월 4일까지 집중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시작한 이후 낮에는 아빠가, 밤에는 엄마가 종현 곁을 지켰다. 아빠는 바둑교습소를 접고 간호에 전념했고, 엄마는 수학교습소를 운영하면서 퇴근 후 함께했다. 이때는 백혈병 환자들의 컨디션을 0에 맞추는 기간으로, 환자는 많은 항생제를 복용하는 탓에 고통을 호소한다. 탈모가 되는 건 물론이다.
“집중치료는 목숨만 겨우 붙여놓는 기간이라고 보면 돼요. 힘든 기간이었지만 종현이는 엄마 아빠와 숨바꼭질, 술래잡기를 하면서 웃음을 잃지 않았고, 아픈 것에서 벗어나 ‘정말 재미있다 엄마, 또 놀자’는 말을 자주 했어요.”
마지막 치료 앞두고 사망 충격
이후 유지치료, 즉 집중치료 기간에 초토화된 몸을 회복하는 치료를 10월 4일부터 진행했다. 종현은 총 12사이클 일정으로 치료를 받았는데 한 사이클을 진행하는 데 84일이 걸렸다. 사이클을 시작할 때마다 척수강(의학용어·척주관에 있는 원기둥 모양의 척수 속 터널) 내 주사로 항암제 ‘시타라빈’을, 정맥주사로 항암제 ‘빈크리스틴’을 투여했다.
아이는 2년 5개월 동안 11사이클을 무사히 마쳤다. 백혈병 환자들이 1사이클, 2사이클에 작은 상처가 생겨 패혈증으로 사망하기도 했지만 종현은 상처가 생겨도 약을 바르면 나았다. 그랬기에 9세 때는 초등학교에 입학해 또래처럼 학교에 다녔다. 사이클을 시작할 때 2박3일간 입원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약을 받을 뿐 지극히 건강하게 생활했다.
불행은 12사이클을 시작하는 2010년 5월 19일 찾아왔다. 레지던트 1년 차가 빈크리스틴을 시타라빈으로 알고 척수강 내에 투여한 것이다. 빈크리스틴은 신경독을 지닌 황산염으로, 복약지도서에는 이 약이 척수강 내로 들어가면 대부분 사망한다고 기록돼 있다. 김씨는 “병원이 빈크리스틴과 시타라빈이란 두 약을 한자리에 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원칙상 시타라빈은 병동약국에 신청하면 약이 병째 오고, 담당의사가 그 자리에서 병에 주사기를 꽂아 약물을 뽑은 뒤 환자에게 투여해요. 그런데 편의상 의사들이 시타라빈을 항암주사조제실에 신청해 주사기에 항암제가 들어 있는 상태로 받아 투여했죠. 종현에게 주사를 놓은 레지던트 1년 차도 편의상 그렇게 했고요. 그리고 빈크리스틴은 통상 항암주사조제실에 신청해 주사기에 항암제가 들어 있는 상태로 받거든요. 그러다 보니 외관상 무색투명한 두 항암제가 모두 주사기에 들어 있으니 헷갈린 겁니다.”
종현은 주사를 맞고 6시간 만에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고, 결국 마약성 진통제를 여러 차례 맞고서야 잠이 들었다. 뒤이어 하루 만에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며, 사흘 만에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방광이 차서 소리를 질러도 생식기가 움직이지 않아 소변도 볼 수 없었다. 순차적으로 다리, 가슴, 팔, 손이 마비됐고, 결국 5월 29일 새벽 1시 9세 나이로 숨을 거뒀다. 손발은 차가웠지만 고열에 시달려 열이 남아 있었다. 떠난 아이를 2시간 동안 품은 엄마는 부검만은 원치 않았다. 이 대목을 설명하던 그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은 주사를 잘못 맞은 것 같다며 부검하려고 했지만 전 반대했어요. 종현이가 그동안 너무 힘들었거든요. 빈크리스틴을 투여하면 사망할 수밖에 없는데도 의료진은 아이를 중환자실에 두고 척추 MRI검사, 뇌파검사, 가슴 X레이 촬영, 혈액검사를 했어요. 인공호흡기를 낀 뒤론 거의 죽은 상태였는데도 혈관을 찾으려고 주사바늘로 온 데를 다 찌르고, 그것도 안 되니까 발목을 잡더라고요. 그래서 말했어요. ‘그만하세요. 자꾸 그러면 아프잖아요.’”
결국 종현은 화장했다. 주사를 많이 맞아 손목, 팔목 핏줄이 다 터졌고, 마약성 진통제와 스테로이드제를 많이 맞은 탓에 땅에 묻혀도 자연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듯했다.
사과 거부하는 의료진에 분노
종현 부모가 장례를 치르기 전 담당교수를 찾아가 사인을 묻자 담당교수는 “시타라빈 투약에 따른 부작용으로 사망했다”고 설명할 뿐이었다. 부모는 차선책으로 담당교수에게 빈크리스틴 사고 논문과 시타라빈 사고 논문을 부탁했고, 사고 발생 보름이 지나 논문을 받았다. 부모는 논문을 읽으며 “종현이가 빈크리스틴 사고로 사망했다”고 확신했다. 빈크리스틴 사고 사망자와 똑같은 증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한국백혈병환우회 등을 통해 환자 4명이 종현처럼 빈크리스틴 사고로 사망한 사실을 알고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소송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주변에서는 말렸지만 김씨는 생업을 놓고, 남편이 생계를 책임지면서 일을 추진했다.
“소송하기 전 담당교수를 찾아갔어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우리 아이가 빈크리스틴 사고로 죽은 것을 인정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조치를 취해달라’는 선에서 마무리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안타까워하던 담당교수가 태도를 싹 바꾸곤 저를 잡상인 취급하면서 ‘그렇게 주장해봐라.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다’며 엄포를 놓더군요. 주사를 잘못 놓은 레지던트 1년 차는 제 눈을 똑바로 보며 ‘절대 주사를 잘못 놓은 일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고요. 이 모습을 보고 도저히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주변 의료진은 그를 격려했다. 한 의료진은 “종현 어머니, 제 입이 제 한 사람 입이 아니네요”라며 눈물을 보였고, 또 다른 의료진은 “종현 엄마, 끝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알죠?”라고 했다. 그사이 엄마는 증거물을 하나둘 찾았다. 통상 종현의 척수액을 5cc 뽑아서 염증수치를 검사하는데, 그날은 25cc를 뽑은 것이 단적인 예다. 당시 의료진은 척수검사라고 했지만 병원의무기록에는 세척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의료진이 빈크리스틴 사고인 줄 알고 세척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회장의 도움으로 법정 싸움을 준비하는 한편, 보건복지부에 민원을 넣어 빈크리스틴을 투여하는 제도를 바꿔야 하지 않느냐고 건의했다. 안 회장은 “공문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김씨는 ‘작은 변화라도 일어나면 된다’고 여겼고 실제로 일선에 공문이 내려왔다. 그러다 ‘부산에서 부인이 의료사고로 사망한 뒤 남편이 권총을 구해 의사를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을 굳혔다. ‘복수보다 종현이 같은 피해자가 더 나오지 않게 소송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소송은 수월하지 않았다. 2010년 12월 6일 첫 공판이 열린 뒤 사실조회, 진료기록 감정 등이 회신되지 않아 이후 재판을 진행할 수 없었다. 진료기록 감정은 병원 진료기록을 제3자에게 감정을 요청하는 것으로, 병원 5곳에 요청했지만 마땅한 답을 받지 못했다. 그는 이 자체가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를 방증하는 것이라며 소송을 이어갈 생각이었지만 2012년 8월 21일 소송을 취하한다.
환자 권리 말해야 좋은 치료받아
“아이가 떠나고 1년이 지나 안 회장의 도움으로 일부 언론에 종현이 사고가 기사화됐어요. 그때 기사를 본 노환규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병원과 합의를 이끌었죠. 그 덕에 병원으로부터 공식사과와 함께 보상금을 받았고, 병원 측은 공식 기자회견을 했어요. 그리고 종현이가 주사를 맞은 방에 종현이 사진을 걸도록 해 의료진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했죠. 빈크리스틴 투약에 따른 매뉴얼도 만들었고요. 다행히 소아과 과장이 바뀌면서 빈크리스틴이 세계보건기구(WHO) 권고대로 수액병에 오기 때문에 정맥으로만 맞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김씨는 멈추지 않았다. 한 병원만이 아닌 법 자체가 바뀌기를 원하며 안 대표의 제안으로 환자안전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2월 오제세 민주당 의원과 면담한 뒤 4월 9일 공청회 전까지 문자서명운동을 벌인 것도 그래서다. 그는 “반드시 문자서명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이 법안이 국민 청원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환자안전법이 의료진들로 하여금 올바른 매뉴얼에 맞게 약을 투약하도록 하는 법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환자안전법의 목적이 잘못을 저지른 의료진에 대한 처벌에 있지 않고, 의료진이 스스로 자기 실수를 보고한 뒤 그 안에서 개선책을 마련해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데 있다는 걸 알았죠.”
문자서명을 받는 건 녹록지 않았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글을 올려 문자서명을 독려하자 몇몇 누리꾼은 그를 신종사기범으로 몰았다. 다행히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서포터스들이 선플을 달면서 일이 무마됐고, 3월 28일 5000여 명에 불과하던 서명이 4월 7일 1만 명을 돌파했다.
김씨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종현이법’을 추진한 뒤 의료사고가 있을 때 의료진에게 적절한 사과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의료분쟁조정법도 만들어갈 생각이다. 그는 “환자가 자기 권리를 말해야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이가 잘 자라면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 생명이 너무 아까워서 많이 울었어요. 하지만 아이가 떠난 뒤에라도 아이 몫을 해주는 게 아이를 위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시간이 지나고 여러 번 이렇게 얘기해도 제게는 힘든 일이거든요. 이 슬픔이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인 것 같아요. 종현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도와주세요.”
종현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잘 자란 꼬마였다. 5세 때 갑자기 코피가 멈추지 않았고, 동네 이비인후과에서 “코에 있는 혈관이 약하다”며 지혈을 해줬기에 부모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다 1년 뒤인 2007년 4월, 아이 얼굴이 너무 시커멓게 변해 병원을 찾았다. 한의원에서는 혈액검사를 받아보라고 했고, 인근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받으니 “아이가 쓰러지면 119 불러 큰 병원으로 가라”고 일렀다. 종현은 이튿날 경북대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림프구 전구세포의 암성 증식에 의해 정상 혈구가 감소하고 장기에 침윤해 장기손상으로 수개월 내 사망하는 질환)에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종현이가 몸이 힘들어 그런지 과자 사달라, 책 읽어달라며 떼를 쓰는데…. 가슴이 미어졌어요. 다행인 건 상태가 좋은 편이라 완치 확률이 90% 이상 된다는 거였죠.”
종현은 4월 21일부터 10월 4일까지 집중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시작한 이후 낮에는 아빠가, 밤에는 엄마가 종현 곁을 지켰다. 아빠는 바둑교습소를 접고 간호에 전념했고, 엄마는 수학교습소를 운영하면서 퇴근 후 함께했다. 이때는 백혈병 환자들의 컨디션을 0에 맞추는 기간으로, 환자는 많은 항생제를 복용하는 탓에 고통을 호소한다. 탈모가 되는 건 물론이다.
“집중치료는 목숨만 겨우 붙여놓는 기간이라고 보면 돼요. 힘든 기간이었지만 종현이는 엄마 아빠와 숨바꼭질, 술래잡기를 하면서 웃음을 잃지 않았고, 아픈 것에서 벗어나 ‘정말 재미있다 엄마, 또 놀자’는 말을 자주 했어요.”
마지막 치료 앞두고 사망 충격
몸이 가장 안 좋았을 때인 6세 때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인 9세 때까지의 종현 모습(위부터).
아이는 2년 5개월 동안 11사이클을 무사히 마쳤다. 백혈병 환자들이 1사이클, 2사이클에 작은 상처가 생겨 패혈증으로 사망하기도 했지만 종현은 상처가 생겨도 약을 바르면 나았다. 그랬기에 9세 때는 초등학교에 입학해 또래처럼 학교에 다녔다. 사이클을 시작할 때 2박3일간 입원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약을 받을 뿐 지극히 건강하게 생활했다.
불행은 12사이클을 시작하는 2010년 5월 19일 찾아왔다. 레지던트 1년 차가 빈크리스틴을 시타라빈으로 알고 척수강 내에 투여한 것이다. 빈크리스틴은 신경독을 지닌 황산염으로, 복약지도서에는 이 약이 척수강 내로 들어가면 대부분 사망한다고 기록돼 있다. 김씨는 “병원이 빈크리스틴과 시타라빈이란 두 약을 한자리에 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원칙상 시타라빈은 병동약국에 신청하면 약이 병째 오고, 담당의사가 그 자리에서 병에 주사기를 꽂아 약물을 뽑은 뒤 환자에게 투여해요. 그런데 편의상 의사들이 시타라빈을 항암주사조제실에 신청해 주사기에 항암제가 들어 있는 상태로 받아 투여했죠. 종현에게 주사를 놓은 레지던트 1년 차도 편의상 그렇게 했고요. 그리고 빈크리스틴은 통상 항암주사조제실에 신청해 주사기에 항암제가 들어 있는 상태로 받거든요. 그러다 보니 외관상 무색투명한 두 항암제가 모두 주사기에 들어 있으니 헷갈린 겁니다.”
종현은 주사를 맞고 6시간 만에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고, 결국 마약성 진통제를 여러 차례 맞고서야 잠이 들었다. 뒤이어 하루 만에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며, 사흘 만에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방광이 차서 소리를 질러도 생식기가 움직이지 않아 소변도 볼 수 없었다. 순차적으로 다리, 가슴, 팔, 손이 마비됐고, 결국 5월 29일 새벽 1시 9세 나이로 숨을 거뒀다. 손발은 차가웠지만 고열에 시달려 열이 남아 있었다. 떠난 아이를 2시간 동안 품은 엄마는 부검만은 원치 않았다. 이 대목을 설명하던 그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은 주사를 잘못 맞은 것 같다며 부검하려고 했지만 전 반대했어요. 종현이가 그동안 너무 힘들었거든요. 빈크리스틴을 투여하면 사망할 수밖에 없는데도 의료진은 아이를 중환자실에 두고 척추 MRI검사, 뇌파검사, 가슴 X레이 촬영, 혈액검사를 했어요. 인공호흡기를 낀 뒤론 거의 죽은 상태였는데도 혈관을 찾으려고 주사바늘로 온 데를 다 찌르고, 그것도 안 되니까 발목을 잡더라고요. 그래서 말했어요. ‘그만하세요. 자꾸 그러면 아프잖아요.’”
결국 종현은 화장했다. 주사를 많이 맞아 손목, 팔목 핏줄이 다 터졌고, 마약성 진통제와 스테로이드제를 많이 맞은 탓에 땅에 묻혀도 자연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듯했다.
사과 거부하는 의료진에 분노
종현 부모가 장례를 치르기 전 담당교수를 찾아가 사인을 묻자 담당교수는 “시타라빈 투약에 따른 부작용으로 사망했다”고 설명할 뿐이었다. 부모는 차선책으로 담당교수에게 빈크리스틴 사고 논문과 시타라빈 사고 논문을 부탁했고, 사고 발생 보름이 지나 논문을 받았다. 부모는 논문을 읽으며 “종현이가 빈크리스틴 사고로 사망했다”고 확신했다. 빈크리스틴 사고 사망자와 똑같은 증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한국백혈병환우회 등을 통해 환자 4명이 종현처럼 빈크리스틴 사고로 사망한 사실을 알고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소송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주변에서는 말렸지만 김씨는 생업을 놓고, 남편이 생계를 책임지면서 일을 추진했다.
“소송하기 전 담당교수를 찾아갔어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우리 아이가 빈크리스틴 사고로 죽은 것을 인정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조치를 취해달라’는 선에서 마무리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안타까워하던 담당교수가 태도를 싹 바꾸곤 저를 잡상인 취급하면서 ‘그렇게 주장해봐라.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다’며 엄포를 놓더군요. 주사를 잘못 놓은 레지던트 1년 차는 제 눈을 똑바로 보며 ‘절대 주사를 잘못 놓은 일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고요. 이 모습을 보고 도저히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주변 의료진은 그를 격려했다. 한 의료진은 “종현 어머니, 제 입이 제 한 사람 입이 아니네요”라며 눈물을 보였고, 또 다른 의료진은 “종현 엄마, 끝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알죠?”라고 했다. 그사이 엄마는 증거물을 하나둘 찾았다. 통상 종현의 척수액을 5cc 뽑아서 염증수치를 검사하는데, 그날은 25cc를 뽑은 것이 단적인 예다. 당시 의료진은 척수검사라고 했지만 병원의무기록에는 세척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의료진이 빈크리스틴 사고인 줄 알고 세척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회장의 도움으로 법정 싸움을 준비하는 한편, 보건복지부에 민원을 넣어 빈크리스틴을 투여하는 제도를 바꿔야 하지 않느냐고 건의했다. 안 회장은 “공문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김씨는 ‘작은 변화라도 일어나면 된다’고 여겼고 실제로 일선에 공문이 내려왔다. 그러다 ‘부산에서 부인이 의료사고로 사망한 뒤 남편이 권총을 구해 의사를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을 굳혔다. ‘복수보다 종현이 같은 피해자가 더 나오지 않게 소송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소송은 수월하지 않았다. 2010년 12월 6일 첫 공판이 열린 뒤 사실조회, 진료기록 감정 등이 회신되지 않아 이후 재판을 진행할 수 없었다. 진료기록 감정은 병원 진료기록을 제3자에게 감정을 요청하는 것으로, 병원 5곳에 요청했지만 마땅한 답을 받지 못했다. 그는 이 자체가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를 방증하는 것이라며 소송을 이어갈 생각이었지만 2012년 8월 21일 소송을 취하한다.
환자 권리 말해야 좋은 치료받아
종현이 의료사고가 일어난 경북대병원 709병동 IV처치실에 걸린 종현 사진.
그럼에도 김씨는 멈추지 않았다. 한 병원만이 아닌 법 자체가 바뀌기를 원하며 안 대표의 제안으로 환자안전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2월 오제세 민주당 의원과 면담한 뒤 4월 9일 공청회 전까지 문자서명운동을 벌인 것도 그래서다. 그는 “반드시 문자서명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이 법안이 국민 청원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환자안전법이 의료진들로 하여금 올바른 매뉴얼에 맞게 약을 투약하도록 하는 법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환자안전법의 목적이 잘못을 저지른 의료진에 대한 처벌에 있지 않고, 의료진이 스스로 자기 실수를 보고한 뒤 그 안에서 개선책을 마련해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데 있다는 걸 알았죠.”
문자서명을 받는 건 녹록지 않았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글을 올려 문자서명을 독려하자 몇몇 누리꾼은 그를 신종사기범으로 몰았다. 다행히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서포터스들이 선플을 달면서 일이 무마됐고, 3월 28일 5000여 명에 불과하던 서명이 4월 7일 1만 명을 돌파했다.
김씨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종현이법’을 추진한 뒤 의료사고가 있을 때 의료진에게 적절한 사과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의료분쟁조정법도 만들어갈 생각이다. 그는 “환자가 자기 권리를 말해야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이가 잘 자라면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 생명이 너무 아까워서 많이 울었어요. 하지만 아이가 떠난 뒤에라도 아이 몫을 해주는 게 아이를 위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시간이 지나고 여러 번 이렇게 얘기해도 제게는 힘든 일이거든요. 이 슬픔이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인 것 같아요. 종현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