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에 당선하기 전 도널드 트럼프의 대북 인식은 극과 극을 달렸다. 먼저 2000년 펴낸 저서 ‘우리에게 걸맞은 미국’에서는 ‘북한의 원자로를 정밀타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재래식 무기를 이용해 북한의 목표물을 타격하는 명령을 내릴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대통령선거(대선) 과정에서도 돌출 발언을 이어갔다. 지난해 8월 미국 앨라배마 주 한 라디오방송과 인터뷰에서 “김정은은 미쳤다. 미쳤거나 천재 둘 중 어느 한쪽이다. 하지만 사실 그는 아버지보다 더 불안정하다고 한다. 김정은과 비교할 때 아버지는 상대적으로 더 나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1월 아이오와 주 유세에서도 “김정은은 미치광이 같다”고 거듭 비판한 데 이어, 2월 CBS 방송과 인터뷰에서는 “중국이 어떤 형태로든 김정은을 빨리 사라지게 하도록 만들겠다”고 했다. 사회자가 암살을 뜻하느냐고 묻자 “솔직히 암살보다 더 나쁜 것들도 들어봤다”고 답했다.
그러나 5월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는 돌연 “김정은과 북핵 문제를 놓고 대화할 것이고, 대화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직접 대화 가능성을 처음 내비쳤다. 바로 다음 달 애틀랜타 주 선거유세 과정에서는 “김정은이 미국에 온다면 만나겠다. 회의 탁자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면서 더 나은 핵협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에 당선하기 전까지 트럼프의 북한 관련 발언을 정리하자면 ‘북한과 얼마든지 협상할 용의가 있지만 협상이 실패한다면 북한 핵시설을 정밀타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반응 北 김정은, 최전방 시찰의 의미
트럼프의 다양한 발언 가운데 북한이 반응을 보인 것은 ‘김정은과 직접 대화 가능성’을 언급한 대목이다. 5월 양형섭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은 AP통신과 인터뷰에서 “그렇게 된다면 나쁠 것이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당선한 이후 북한은 11월 중순까지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하지만 이와 관련해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의 최근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11월 11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마합도의 포병부대를 찾아 포사격 훈련을 지도했다’고 보도했다. 마합도는 서해 백령도에서 18km가량 떨어진 곳. 조선중앙통신은 13일 ‘김 위원장이 연평도 인근 서해 최전방에 있는 갈리도 전초기지와 장재도 방어대를 잇달아 시찰했다’고 보도했다. 갈리도와 장재도는 연평도에서 각각 4.5km와 6.5km가량 떨어진 섬이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의 지시로 갈리도에 전초기지가 새로 세워졌다’며 ‘김정은이 새롭게 조직한 ‘연평도 화력타격계획 전투문건’을 승인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북한 매체들은 고무보트를 탄 김 위원장의 모습을 공개했는데 사진 조작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의 서해 최전방 시찰 활동과 관련해 우리 군은 2010년 11월 23일 발생한 연평도 포격 도발 6주기를 앞두고 북한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라 보고 행여 국지 도발을 감행하지는 않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과거에도 북한 수뇌부가 군부대를 방문한 후 대남 도발을 자행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을 향한 북한 매체들의 보도 역시 주목된다. 11월 10일 ‘노동신문’은 ‘(오바마 정권은) 새 행정부에게 주체의 핵 강국(북한)과 상대해야 할 더 어려운 부담을 들씌워놓았다’면서 ‘미국이 바라는 조선(북한) 핵 포기는 흘러간 옛 시대의 망상’이라고 보도했다. 아울러 지난달 제임스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의회에서 “북한 비핵화가 불가능하다”고 발언한 것을 언급하며 ‘클래퍼의 북한 핵 포기 불가능 발언이야말로 진실이고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당선인에게 ‘북핵 포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북·미 관계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엇갈린 전망을 내놓고 있다. 먼저 조지프 디트라니 전 6자회담 차석대표는 트럼프의 대북정책이 오바마 행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디트라니 전 차석대표는 지난달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가진 북·미 비공식 대화에도 참석한 인물이다. 디트라니 전 차석대표는 11월 12일(현지시각)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오바마의 대북 접근법을 추구해 그 지속성이 유지될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을 중간 목표로 설정해 북한과 협상에 나설 수 있다”고 전망하면서 “대북 선제공격이나 정밀폭격, 김정은 참수작전 등은 실현 가능성이 낮을 것”으로 내다봤다.
전문가 전망도 강 대 온으로 나뉘어
반면, 크리스토퍼 힐 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는 트럼프 행정부가 매우 강력한 대북정책을 펼칠 것으로 예상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북핵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였던 힐 전 차관보는 11월 14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아직 구체적인 정책적 요소를 언급하기는 시기상조”라면서도 “트럼프의 입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이던 ‘전략적 인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북한과 직접대화를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며 “그보다는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력할 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예상했다.러시아 출신 한반도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도 비슷한 전망을 내놨다. 란코프 교수는 자유아시아방송과 인터뷰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의지가 아예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갑자기 더욱 강경한 노선으로 바꿀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오바마 행정부에선 생각할 수도 없던 무력 사용 등 초강경 수단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의 선임 고문으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도 관여하고 있는 에드윈 퓰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아시아연구센터 회장은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과 관련해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등 제3국 기업을 겨냥한 ‘세컨더리 보이콧’을 이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퓰너 회장은 11월 15일(현지시각) ‘국회 동북아평화협력 의원외교단’ 일행을 만난 자리에서 “현 대북제재 외에도 추가 제재를 가해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고 한다.
대통령 당선 이전 트럼프의 북한 관련 발언은 즉흥적인 것이라 크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부 장관(빌 클린턴 행정부)은 최근 서울에서 강연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언급하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은 향후 관련 인사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페리 전 장관은 “트럼프의 발언이 몇 가지 있긴 하지만, 모두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트럼프의 각종 대북정책은 앞으로 몇 달에 걸쳐 정해질 것이다. 먼저 4주에서 6주 사이 국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가안보 보좌관에 누구를 지명하는지 봐야 한다”고 말했다.
페리 전 장관의 발언은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트럼프는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 용인’을 시사하는 과거 자신의 발언을 대통령 당선 이후 전면 부인했다. 트럼프는 11월 13일(현지시각) 트위터를 통해 “뉴욕타임스는 내가 ‘더 많은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했는데 정말 부정직하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언론보도를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님을 금세 알 수 있다. 3월 하순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만일 미국이 지금처럼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한국과 일본은 핵무장을 하려고 할 것이다. 두 나라가 핵 위협을 느낀다면 핵무기를 가져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CNN이 주최한 타운홀 미팅에서는 “북한, 파키스탄, 중국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 이란도 10년 내 갖게 된다. 한국과 일본도 일정 시점에 북한에 맞서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다면 미국 상황이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선거유세 기간 말했던 “한국 안보를 왜 미국이 책임져야 하느냐”는 식의 발언도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11월 10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과 가진 전화통화에서 “미국은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굳건하고 강력한 방위 태세를 유지할 것”이라며 “한국과 미국의 안전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할 것”이라고 밝혔다. 과거 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방위공약은 변함없으리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트럼프 당선 이후 북·미 ‘트랙2’ 접촉
이런 가운데 트럼프 당선 이후 처음으로 북한과 미국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접촉해 주목된다. 북한에서는 최선희 북한 외무성 미국국 국장이, 미국에서는 존스홉킨스대 한미연구소 북한전문 웹사이트 ‘38노스’의 운영자인 조엘 위트 연구원이 각각 대표로 참석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최 국장과 위트 연구원은 2012년 8월에도 싱가포르에서 접촉한 바 있다. 최 국장은 제네바행 비행기를 타려고 도착한 베이징서우두국제공항에서 일본 언론에 포착됐다.
취재진이 그에게 트럼프 행정부에 어떤 접근 방식을 취할 것이냐고 묻자 “그들(트럼프 행정부)이 어떤 종류의 정책을 취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대답했다고 일본 ‘교도통신’은 보도했다. 최 국장은 ‘북한의 미국통’으로 불리는 인물로, 북한이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탐색전에 나섰음을 엿볼 수 있다. 위트 연구원은 미 국무부 북한 담당관 출신으로, 1990년대 초 제1차 북핵 위기 당시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북핵특사의 선임보좌관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북·미 제네바 접촉은 11월 17일과 18일 이틀간 열리며, 최 국장과 위트 연구원 외 장일훈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와 존스홉킨스대 한미연구소의 제니 타운 연구원도 동참한다’고 보도했다. 장 차석대사는 지난달 말레이시아 북·미 비공식 대화에도 참석한 인물이다.
북한과 미국은 미국 대선을 앞둔 지난달 하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비공식 대화를 가졌다. 당시 북한 측에서는 한성렬 외무성 미국국 부상 등 현직 관료가, 미국 측에서는 갈루치 전 북핵특사와 디트라니 전 6자회담 차석대표 등 전직 관료가 참석했다. 북한과 미국의 제네바 회동 일정에 대해 우리 외교부는 쿠알라룸푸르 회동 때와 마찬가지로 “트랙2(민간채널 접촉) 차원의 대화 접촉은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