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자타공인 한국 ‘넘버 원’ 기업이자,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글로벌 기업’이다. 삼성의 목표는 ‘한국 1등’이 아닌 ‘세계 1등’이고, 그 같은 삼성의 ‘1등주의’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삼성은 경제뿐 아니라 스포츠 분야에서도 항상 1등을 추구했고, 적어도 국내에서는 이를 실현해왔다. 수십 년간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등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선두주자로 군림해온 것. 그러나 ‘스포츠 제국’을 표방해온 삼성이 어느 순간 지향점을 잃었다. 그리고 2016년은 한국 스포츠를 이끌어왔던 삼성 제국이 몰락한 해로 기록될 만하다.
한동안 ‘돈성’(돈+삼성)으로 불릴 만큼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도 고전을 면치 못하던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는 2000년대 이후 최고 명문팀 타이틀을 차지했다. 해태 타이거즈 출신의 김응용 감독을 영입한 뒤 2002년 한국시리즈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고, 해태의 또 다른 상징과도 같던 선동열 감독 체제에서 2005~2006년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2000년대 한국시리즈 우승은 ‘해태의 힘’을 빌려왔다는 점에서 삼성으로선 아쉬움이 적잖았다.
삼성이 한국 최고 스포츠라 부르는 프로야구에서 진정한 챔피언에 오른 것은 2010년대 들어서다. 삼성은 프로 입단 후 줄곧 푸른색 유니폼을 입었던 류중일 감독 체제가 시작된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최고 자리에 올랐다. 5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우승은 KBO리그 역사상 최초였다. 또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 연속 한국시리즈도 제패했다.
한순간 무너진 야구 명가
그러나 올해 삼성의 가을은 쓸쓸하다 못해 참담할 정도다. 페넌트레이스를 65승1무78패(승률 0.455) 9위로 마치며 1982년 팀 창단 이래 최악의 팀 순위를 기록했다. KBO 역사에서 삼성의 페넌트레이스 최저 성적은 96년 8개 구단 체제에서 거둔 6위(54승5무67패·승률 0.448)였다. 2009년 이후 7시즌 만에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해 뜨거운 가을잔치에서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결국 류중일 감독은 계약 연장에 실패하며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명가’ 반열에 올라섰던 삼성은 지난해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임창용, 안지만, 윤성환이 해외 원정도박 혐의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두산 베어스에 한국시리즈 패권을 내줬다. 지난겨울 임창용의 방출과 박석민의 자유계약선수(FA) 이적으로 전력이 더욱 약해졌고, 설상가상으로 올해는 외국인 선수의 부진과 주축 선수의 줄부상으로 줄곧 바닥을 전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삼성의 부진을 ‘예견된 참사’로 보는 시선이 많다. 삼성은 한때 FA에 대한 거액 투자로 비난받았고, 이후 ‘외부 FA 영입 불가’를 원칙으로 내세웠다. 2005년 심정수를 마지막으로 데려온 뒤 최근 11년간 FA 영입이 한 명도 없었다. 오승환(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을 시작으로 수많은 프랜차이즈 스타가 팀을 떠났고, 올해 결국 내부 육성만으로는 더는 삼성 천하를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 확인됐다.
프로축구 수원삼성 블루윙즈는 K리그를 대표해온 구단이다. 1996년 9번째 구단으로 뒤늦게 K리그에 합류했지만, ‘1등주의’를 표방하는 모기업 삼성의 모토대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우수 선수를 대거 스카우트해 데뷔 시즌 대뜸 준우승을 차지했고, 일찌감치 선진 시스템을 도입해 K리그 우승 4회, FA컵 우승 3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 등 한국 프로축구를 선도했다.
‘스포츠단 해체’ 미확인 소문까지
그러나 올해 수원삼성은 치욕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정규 33라운드까지 7승16무10패, 승점 37을 기록하며 12개 구단 가운데 9위에 머물러 스플릿 라운드 그룹B(7~12위)로 떨어진 것. 2014~2015시즌 2년 연속 클래식(1부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던 위용은 온데간데없다. K리그에 상·하위 스플릿 시스템을 도입한 2012년 이후 수원삼성이 상위 스플릿 진입에 실패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한때 스포츠 제국을 형성했던 삼성이 양대 프로스포츠인 프로야구와 프로축구에서 올해 동반 몰락이라는 치욕을 맛본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삼성그룹은 2014년 4월 경영 투명성 제고라는 명분하에 수원삼성의 모기업을 삼성전자에서 제일기획으로 바꿨다. 같은 해 9월에는 프로농구 서울 삼성 썬더스를, 2015년 6월에는 프로배구 삼성화재 블루팡스를 제일기획 산하로 편입했고, 지난해 말에는 삼성 라이온즈까지 제일기획이 인수했다.
삼성은 지난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 FC에 대한 후원을 중단했으며, 지난해 12월에는 그동안 삼성의 글로벌 스포츠마케팅을 이끌던 삼성전자 글로벌마케팅실(GMO)을 글로벌마케팅센터로 축소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실질적으로 그룹 전면에 등장한 뒤부터 스포츠단과 스포츠마케팅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고 있다. 항간에는 “이 부회장이 그룹 임원회의에서 ‘구글은 스포츠단을 운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며 “삼성은 장기적으로 스포츠단을 해체할 것”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나돌 정도다.
소문의 진위 여부를 떠나 삼성 라이온즈와 수원삼성 등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두 명문 구단의 동반 추락에는 스포츠단을 바라보는 오너의 ‘인식 변화’가 기저에 깔렸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과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스포츠단을 회사 이익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바라봤다면, 이재용 부회장은 스포츠단도 비즈니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과 제일기획이 스포츠단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단적으로 드러난 예가 수원삼성의 수뇌부 교체다. 제일기획은 지난해 12월 그동안 축구와는 무관한 길을 걸어온 김준식 삼성전자 부사장과 박창수 제일기획 상무를 각각 축구단 대표이사와 단장 자리에 앉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업무의 효율성 유지를 위해 사장과 단장을 한꺼번에 교체하지 않지만 제일기획은 경영합리화라는 목표에 따라 이례적인 의사결정을 내렸다. 그 결과 수원삼성은 올 시즌 성적도, 구단 운영도 낙제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