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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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경제성장 엔진은 예술

[김재준의 다빈치스쿨] 문화적 감수성은 알고리즘이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

  • 김재준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입력2025-07-27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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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는 눈에 보이지 않고 계량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국가전략을 논의할 때 후순위로 밀린다. 그러나 문화는 산업보다 먼저 움직이고, 소비보다 먼저 욕망을 만들며, 기술보다 먼저 방향을 제시한다. 문화예술이 경제성장 엔진인 이유는 즉각 눈에 보이는 효과 때문이 아니라, 구조 자체를 바꾸는 보이지 않는 힘 때문이다. 예술은 부가가치가 아니라 ‘근본 가치’다.

    구글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왼쪽)과 IBM의 ‘디자인 싱킹’ 과정을 소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 구글 방문자 경험(Google Visitor Experience) 홈페이지 캡처 · IBM ‘디자인 싱킹 과정 및 수료증’ 홈페이지 캡처

    구글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왼쪽)과 IBM의 ‘디자인 싱킹’ 과정을 소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 구글 방문자 경험(Google Visitor Experience) 홈페이지 캡처 · IBM ‘디자인 싱킹 과정 및 수료증’ 홈페이지 캡처

    욕망을 만들고 시장을 발명하는 문화의 힘

    덴마크가 레고를 통해 ‘창의적 놀이 문화’를 전 세계에 수출한 것처럼, 한국이 K-뷰티로 ‘10단계 스킨케어’라는 새로운 미의 기준을 만든 것처럼 문화적 토양이 산업 방향을 결정한다. PC방 문화가 e스포츠 강국을 만들고, 김치와 김밥이 K-푸드의 글로벌화를 이끌듯이 일상에 스며든 문화가 산업 DNA가 된다. 감각이 예민하게 열려 있는 사회일수록 더 나은 제품을 만들고 더 섬세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인공지능(AI) 시대에는 이런 ‘문화적 감수성’이 알고리즘은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이 된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말했듯, 경제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발전한다. 문화예술은 창조적 파괴의 실험실이며, 경직된 경제구조를 흔드는 감각의 선행지표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전통적인 미(美) 개념을 파괴했고, 이것이 현대 디자인과 광고의 기초가 됐다. 1970년대 뉴욕 브롱크스에서 시작된 힙합이 주변부 언어를 글로벌 산업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것도 마찬가지다. 넷플릭스 같은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플랫폼이 콘텐츠 소비 시간의 구조를 완전히 바꾼 것, 인스타그램이 사진 문화를 혁신해 세계 광고산업을 재편한 것도 모두 예술적 실험에서 출발했다. 

    문화는 욕망을 만들고 시장을 발명한다. 요즘 경제 분야 경쟁의 핵심은 “누가 새로운 욕망을 창조하는가”다. 문학과 연극 같은 순수예술이 직접 매출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해서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 하나가 브랜드를 만들고 시 한 줄이 도시 이미지를 바꾼다. 

    젠틀몬스터는 단순한 안경 회사가 아니라 ‘공간 경험’과 ‘예술적 상상력’을 판매하는 곳이다. 2011년 설립된 이 한국 브랜드는 매장을 전시장처럼 꾸미고 로봇 아트를 설치해 예술과 패션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 결과 10년 만에 기업가치 1조 원, 세계 30개국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하이브는 BTS(방탄소년단)를 통해 ‘음악에 기반을 둔 엔터테인먼트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으로 진화했고, 네이버웹툰은 기업가치 5조 원을 넘어서며 한국 웹툰을 글로벌 문화산업으로 키워냈다.  



    이런 현실에서 예술교육은 미래 경쟁력의 핵심이다. 주입식 교육으로 악명 높았던 싱가포르가 1997년 ‘생각하는 학교, 배우는 국가(Thinking Schools, Learning Nation)’ 정책으로 교육 패러다임을 전환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술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공적 지원을 확대한 결과 싱가포르는 202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창의적 사고력 평가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핀란드 역시 2016년부터 현상 기반 학습(phenomenon-based learning)을 도입해 예술-과학 융합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는 예술교육이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공공투자 영역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필자가 제작한 창조 생태계 벤다이어그램. 김재준 제공

    필자가 제작한 창조 생태계 벤다이어그램. 김재준 제공

    경제성장 출발점은 ‘문화예술’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 복제된다. 하지만 미학, 서사, 감성은 복제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은 기업의 가장 전략적인 자원이 된다. 구글은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가들을 직접 고용하고, IBM은 ‘디자인 싱킹’을 전사적으로 도입해 직원 10만 명을 교육시켰다. 데이터는 ‘무엇’을 알려주지만, 예술은 ‘왜’를 질문하게 만든다. AI 시대일수록 이런 철학적 질문이 중요하다.  

    지금 대한민국 경제의 두 축은 AI와 재생에너지다. ‘AI 3강 국가’로 도약하려면 예술교육을 통해 형성된 상상력과 문화적 맥락을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에너지 전환 역시 라이프스타일의 문화적 전환이 핵심이다. 유럽연합이 2021년부터 추진 중인 ‘유럽의 새로운 바우하우스(New European Bauhaus)’가 좋은 사례다. 시민, 예술가, 과학자, 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이 이니셔티브는 에너지 전환을 ‘생활 속 전환’으로 재정의했다. 

    최근 한국 경제의 어려움이 심화하고 있다. 기존 구조적 위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작한 관세전쟁까지 겹쳤다. “경제 먼저, 문화 나중에”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AI 시대 경제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 문화예술은 새로운 생각을 촉발하고, 낡은 질서를 해체하며, 욕망을 창조하고, 공동체를 회복하며, 미래 방향을 제시한다. 경제가 멈출 때 문화가 먼저 움직이고, 기술이 정체될 때 예술이 먼저 상상한다. 문화예술은 경제성장의 ‘결과’가 아니라 ‘출발점’인 것이다. 

    이를 실현하려면 문화정책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문화예술 생태계 전체를 조망하고 예술과 경제를 동시에 아는 슈퍼 제너럴리스트가 많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국가 대전환은 문화예술에서 출발해야 한다. 가장 실용적인 것은 실용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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