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 박찬호, 반기문의 공통점은? 세 사람 모두 충청 출신으로,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활약하며 우리 국민에게 ‘한국인의 자긍심’을 심어줬다는 점이다. 차이라면 박세리와 박찬호는 충남 공주 출신이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충북 음성 출신이라는 것.
국내가 아닌 해외무대에서 활약하는 스포츠 스타에게 우리 국민은 ‘남자냐, 여자냐’는 물론, ‘출신 지역’과 ‘출신 학교’도 따져 묻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자랑’으로 국위를 선양한 이들은 나와 같은 대한국인(大韓國人)이란 공통점 하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2017년 대통령선거(대선)를 앞두고 일찌감치 차기 대선 여론조사에서 반기문 총장이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반기문 신드롬’을 일으킨 것 역시 그가 한국인 최초로 193개 회원국을 이끌어가는 유엔 사무총장이란 지위에 올랐기 때문일 수 있다. 충북 출신이고, 서울대를 졸업했으며, 노무현 정부 때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냈다는 점 등 이른바 출신 지역이나 학교, 정권과의 친소관계가 부각됐다면 오히려 ‘반기문 신드롬’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됐을 공산이 크다.
유체이탈 화법 속에 담긴 진의
한국인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이란 직책을 달고 세계무대에서 활약해온 반 총장이 올 연말 퇴임 후 내년 대선을 앞두고 국내 정치무대에 복귀할 뜻을 내비쳤다. 직설화법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반신반의하게 만들던 애매모호한 화법도 아니었다. 5월 25일 제주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반 총장은 “내가 대통령을 한다고 예전에 생각해본 일도 없다. 하지만 이런(대선 출마) 얘기가 나오는 데 대해, 인생을 열심히 산 것에 대해 ‘헛되게 살지 않았고 노력에 대해 평가가 있구나’ 자부심을 느끼고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한국의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국가가 너무 분열돼 있다.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 통합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우선순위는 남북통일이지만 그 전에 남한이라도 통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주 좁은 커뮤니티 인터레스트(지역 이익)나 파티 인터레스트(당파적 이익) 등을 갖고 하는데, 이건 정치가 아니라 정쟁이다. 이를 지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었지만 ‘통합의 정치’ ‘통합의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 대목은 은연중 ‘세계 갈등의 조정자’로 활동해온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 측면이 없지 않다. 넓디넓은 세계무대에서 내려와 좁디좁은 대한민국이란 국내무대에 다시 서려는 그를 대한민국 국민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볼까.
그가 퇴임 후 국내무대에 복귀할 뜻을 밝히자마자 국내 여론은 바닷물이 갈라지듯 둘로 쪼개졌다. ‘국제 지도자로서 소중한 경험을 살려 국내 분열 정치를 바꿔달라’는 기대와 요구가 있는가 하면,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지도자가 일개 정당, 일개 정파가 내세운 얼굴마담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함께 나오고 있다.
20대 총선에서 차기주자군이 전멸하다시피 한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는 반기문 대망론에 기대를 거는 눈치다. 반면 야권에서는 반 총장에게 ‘친박 프레임’을 씌워 견제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새누리당 홍문표 사무총장 직무대행은 “우리 당이 처한 상황으로 볼 때 반 총장이 새누리당에 혹시라도 온다면 엄청난 파워가 생기는 것이고, 국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야권은 “친박 기획, 반기문 주연의 새누리발(發) 대선 드라마가 이미 시작됐다”며 ‘친박 프레임’ 씌우기에 열을 올렸다. 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에서 “반 총장은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친박 대선후보로 ‘내정’돼 있다”며 “킹메이커로서 당권은 최경환 의원이, 차기 대통령은 반 총장이 맡는 구도”라고 주장했다.
반 총장 TK 방문은 경북+충청 연합 신호탄
여의도 정가에서는 반 총장의 한국 방문 일정 가운데 경북 안동과 경주 등 이른바 TK(대구·경북) 일정에 주목하는 이가 많다. 고향인 충청 방문 일정은 잡지 않고 새누리당의 핵심 지지기반인 TK에 반 총장이 공을 들이는 것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경충 연합’(경북+충청)을 염두에 둔 포석일 수 있다는 점에서다.
반 총장은 5월 29일 안동 하회마을을 찾아 서애 류성룡 선생의 고택인 충효당에서 김관용 경북도지사 등과 오찬을 함께 한다. 반 총장이 바쁜 국내 일정을 쪼개 굳이 안동을 찾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서애 선생과 반 총장 자신을 연결시키려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담긴 방문이란 해석이 많다.
또한 5월 30일 경주에서 열리는 유엔 비정부기구(NGO) 콘퍼런스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여권 인사도 많다. 한 여권 관계자는 “안동 또는 경주에서 반 총장과 최외출 영남대 부총장이 조우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쳤다. 최 부총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그림자 비서실장’으로 통하는 인물. 자타가 공인하는 새마을운동 전도사인 최 부총장은 2013년 8월 반 총장을 직접 만나 ‘새마을운동의 글로벌 프로젝트’ 지원을 요청한 인연이 있다. 지난해 뉴욕 ‘새마을운동 고위급 특별행사’와 이번 경주 유엔 NGO 콘퍼런스는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박 대통령과 반 총장을 하나로 꿰는 키워드다. 지난해 9월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국 정부와 유엔개발계획(UNDP),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공동 주최한 ‘새마을운동 고위급 특별행사’에서 반 총장은 “새마을운동이 처음 시작될 때 나는 공무원으로서 그 운동을 실행으로 옮기는 노력을 했다”면서 “내가 살던 나라가 변화하는 모습을 직접 보며 자부심을 느꼈다. 가난했던 마을과 주민의식의 급진적인 변화를 목격했다”며 새마을운동을 매개로 이른바 ‘박비어천가’를 불러 눈길을 끈 바 있다. 또한 반 총장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새마을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고도 했다.
박 대통령의 이번 아프리카 순방 일정 중에는 지난해 반 총장의 언급처럼 아프리카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새마을운동의 국제화 현장을 찾는 일정이 포함돼 있다. 박 대통령과 반 총장은 몸은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새마을운동’을 매개로 충분한 교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박 대통령과 반 총장을 잇는 가교는 최근 복합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원종 대통령비서실장은 반 총장과 같은 충북 출신이고, 윤여철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은 유엔에서 반 총장을 오래 보좌한 측근이다. 박 대통령 주변에 반 총장과 인연이 깊은 인사들이 포진하면서 내년 대선까지 염두에 둔 박(朴)-반(潘) 연대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대선이 1년 6개월 이상 남은 시점에 박-반 연대론이 가시화한 현실은 오히려 역풍을 불러올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반 총장이 친박을 등에 업더라도 복잡한 당내 상황으로 여권 대선후보로 오르기조차 여의치 않을 수 있다는 회의론이 대두되고 있는 것.
새누리당의 현행 당헌·당규상 대선후보를 합의 추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경선이 불가피한 상황. 새누리당 한 인사는 “우리 당이 대선후보 선출 때 당원 20%, 대의원 30%, 국민선거인단 30%, 국민 여론조사 20% 등 2 대 3 대 3 대 2 비율로 반영토록 한 것은 당심과 민심이 5 대 5 비율로 균등하게 반영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며 “20대 총선 결과에 나타났듯 국민 여론이 새누리당에 등을 돌리고, 당심마저 친박과 비박으로 나뉜 상황에서 친박계가 주도한 반기문 카드가 등 돌린 민심을 되돌리고 둘로 나뉜 당심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새마을운동’ 매개로 청와대와 밀착
반 총장에 대한 국민 여론은 아직 호의적인 편이다. 하지만 새누리당, 특히 친박계가 미는 대선후보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때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여야로 호불호가 갈리는 데다 친박, 비박(비박근혜)에 대한 호불호가 다시 나뉘기 때문. 만약 현재 반 총장의 인기가 100이라면 자칫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비박계 한 인사는 “역대 전당대회에 나타난 결과를 놓고 보면 새누리당 당원과 대의원은 수도권이 수적으로 가장 많지만, 투표율을 감안하면 실제 당락을 가르는 주요 변수는 수도권과 TK, PK(부산·경남) 비중이 엇비슷했다”면서 “친박계가 TK에서 강세를 보이더라도 TK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특히 PK는 김무성 전 대표의 영향력이 커서 결국 친박계가 당권을 잡거나 대선후보를 만들려면 수도권으로 지지세를 확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친박 주도의 총선 공천 파동 여파로 새누리당 수도권 후보들이 대거 낙선한 이후 수도권에서 친박계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친박계가 앞장서 ‘반기문 대망론’을 띄우려 하면 TK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으로 지지의 확장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형국이다. 따라서 친박 주도로 반 총장을 띄우려 하다가는 자칫 제2의 고건처럼 일장춘몽에 그칠 수 있다는 관측이 많다.
‘한국인으로서 사상 처음 유엔 사무총장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인 반기문 총장을 두고 우리 국민이 지금 당장 호불호를 가려야 할 이유가 없고, 그를 선택할지 말지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올해 말 유엔이란 국제무대에서 내려와 국내 정치무대에 들어서는 순간 반 총장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태도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20대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은 새누리당, 그리고 총선 공천 파동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은 친박계가 미는 대선후보로 반 총장이 국민 앞에 다시 섰을때 우리 국민의 선택은 무엇일까.
최정묵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은 “정치는 영화로 치면 액션물이 아닌 다큐”라며 “영웅주의에 기댄 등장보다는 탄탄한 문제의식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치철학과 성과지표, 그리고 자기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반 총장이 여기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숙현 시사칼럼니스트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력”이라며 “국민적 지지가 현저히 높아도 세력이 없으면 결국 본선에서 고전을 면키 어렵다”면서 “자신이 구축한 세력 없이 특정 세력을 등에 업고 대선에 도전하는 것은 결국 그 세력의 ‘얼굴마담’으로 끝날 개연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