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코앞에 두고 공개했다는 점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것을 제하고 본다면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과 북한 정찰총국 대좌, 그리고 북한 외교관의 망명을 공개한 것은 국정원이 북한 심장부를 향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 것으로 봐야 한다.”
사실부터 밝히자. 국가정보원(국정원)은 북한의 4차 핵실험을 사전에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 국정원은 1월 6일 오전 10시 35분 45초 강원 고성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관측소가 자연 지진과 다른 진파를 탐지해 통보해줌으로써 감을 잡았고, 오후 12시 30분(북한 현지시각으로는 12시) 북한 조선중앙방송이 “수소탄을 실험했다”고 밝혔을 때 비로소 확인했다. 그날 밤 긴급현안 보고를 위해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이병호 국정원장은 “찾고 막는 싸움인데, 이번에는 막지 못했다”며 정보 실패를 자인했다. 그리고 “다른 나라 정보기관도 북한의 핵실험 징후를 사전에 포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변명을 덧붙였다.
정찰총국 대좌, 망명에서 공개까지
김정은 체제 출범 후 국정원에서는 “공작관들의 입이 귀에 걸렸다”는 말이 돌았다. 장성택과 현영철의 공개 처형 이후 북한 조직이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내부 이반자가 나오기 시작해 그 어느 때보다 공작하기 좋다는 자평이 쏟아졌다. 그런데 북한 핵실험 징후를 전혀 포착하지 못했으니 국정원 지휘부의 낭패감은 엄청났다. 사실 국정원은 광명성 4호 발사(2월 7일) 조짐도 미리 포착하지 못했다. 다행히 다른 나라 정보기관이 이를 감지하고 북한이 일찌감치 발사를 예고한 덕에 ‘구멍’이 공개되지 않았을 뿐이다.국정원이 이런 낭패감을 만회하고자 만지작거린 것이 지난해 가족을 데리고 귀순한 정찰총국 대좌에 대한 공개 건이다. 하지만 이병호 국정원장은 결심하지 못했다. 김씨로 확인된 이 대좌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는 국정원에 비유되나 주로 하는 일은 미국 연방수사국(FBI)처럼 대내 방첩이다. 중국 등 외국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드물고, 하더라도 역시 방첩활동 위주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처럼 해외 공작은 정찰총국에서 한다. 이 때문에 정찰총국은 북한 대사관이 있는 곳에는 CIA처럼 거점을 설치해놓았다.
북한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나라가 많지 않으니 정찰총국의 해외 거점도 소수다. 정찰총국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일을 하는 곳이 무관부다. 주요 국가에는 무관으로 대령급을 파견하므로 정찰총국도 대좌를 거점장으로 파견한다. 이번에 공개한 김모 대좌는 모국(某國)에 파견된 정찰총국의 거점장이었다(국내 언론은 거점장을 지부장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거점장은 그 나라를 상대로 한 친북공작과 그 나라를 무대로 한 대남공작을 책임진다. 공작을 하려면 한반도 상황과 북한 지휘부의 의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므로 본국으로부터 핵심 정보를 제공받는다. 이 때문에 대좌(대령)임에도 중장(한국군 소장에 해당)에 해당하는 권력을 지닌다. 국정원은 그러한 ‘정보덩어리’를 지난해 초 빼돌려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정보를 얻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좌가 사라지자 북한 대사관과 정찰총국 직원들이 그를 추적했다. 중국, 러시아는 물론이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 등 그들이 접할 수 있는 모든 나라를 두드려 봐도 답이 나오지 않자 단념했는데, 이는 김 대좌가 남한으로 갔다고 결론 내렸다는 뜻도 된다. 그래도 국정원은 모른 척했다. 그사이 그의 망명을 공개해 북한 정찰총국을 뒤집는 공작을 준비했다.
1977년 휴전선에서 대북공작을 하던 정보사 소속 소령이 도박 빚을 견디다 못해 월북한 적이 있다. 이를 안 정보사는 깜짝 놀라 그의 업무 범위 내에 있던 모든 비밀코드를 바꾸고 그와 가까웠던 이들의 자리를 바꾸는 등 난리를 쳤다. 이러한 소동을 겪고 나면 정보사의 공작은 크게 위축된다. 국정원은 정찰총국에 그러한 카운터펀치를 먹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의 간첩 혐의 무죄 판결에 이어 해킹 프로그램 구매를 담당하던 국정원 과장의 자살 사건이 연이어 터지자 국정원은 결심하지 못했다. 지난해 8월 목함지뢰 사건, 올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서도 그의 유보적 태도는 계속됐다.
北 2인자 김원홍을 흔들어라
그러다 중국 닝보(寧波)에 있던 북한 식당 종업원들이 집단 탈북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슬그머니 끼워 넣는 식으로 김 대좌의 망명을 공개했다. 방법은 특정 언론에 흘린 뒤 그 언론이 통일부와 국방부 대변인에게 질의하는 형식을 취했다. 두 부처 대변인은 국정원에서 ‘통보받은 대로’만 답변했다. 문제는 그 공개가 20대 총선 직전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무적인 판단이 개입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러나 정보 관계자들은 오로지 북한 수뇌부를 노린 것이라고 강변한다.이들이 지목하는 타깃은 2인자로 불리는 김원홍 보위부장이다. 지난해 김정은은 김영철 정찰총국장을 조선노동당 대남 담당 비서로 옮긴 후 후임자를 지명하지 않았는데, 이후 김 부장으로 하여금 정찰총국을 지휘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김 부장은 최부일이 부장을 맡고 있는 인민보안부(우리 경찰청에 해당)도 통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대북소식통들은 주저하지 않고 김원홍을 김정은 다음의 2인자로 꼽는다.
13명의 북한 식당 종업원이 귀순한 후 이들을 이끌고 온 지배인이 보위부원이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데, 이 역시 김원홍을 코너로 몰기 위한 공개로 봐야 한다. 김원홍의 하부 조직이 무너지고 있음을 김정은에게 알림으로써 둘 사이를 이간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이는 김정은이 김원홍을 처형 또는 숙청하거나, 반대로 김원홍이 김정은을 겨누는 북한판 10·26사건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2인자와 1인자를 대결하게 만들어 한쪽이 다른 쪽을 없애 내부 모순을 극대화하는 공작을 ‘남의 칼로 적을 벤다’는 뜻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라고 한다. 이병호 원장의 이 야심작은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김정은이 이를 알아차리고 김원홍을 더욱 신임하는 반격을 가할 것인가. 김정은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북한은 곤란해진다. 5월 열리는 제7차 노동당대회의 흥이 빠지는 것이다.
이병호 원장은 국정원에서 주로 해외 공작을 맡아왔다. 야인 시절에는 국내와 해외를 분리해 해외 및 대북공작에 전념하는 정보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19기로 28기인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31기인 한민구 국방부 장관의 대선배다. 이 때문에 세 사람은 합심할 수 있다. 이 원장의 실패를 알고 있는 소식통들은 그의 다음 결심을 주목한다. 2탄, 3탄의 차도살인지계가 나가야 김원홍 죽이기나 김정은 쓰러뜨리기가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포착하지도, 방지하지도 못한 이 원장은 이제 어떤 수를 준비해놓았을까. 이병호와 김원홍, 남과 북의 공작 책임자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싸움판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