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노인이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도망쳤다. 이웃 주민들이 위로의 말을 전하자 노인은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압니까?” 하며 태연자약(泰然自若)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도망쳤던 말이 암말 한 필과 함께 돌아왔다. 주민들은 “노인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라며 축하했다. 그러나 노인은 “이게 화가 될지 누가 압니까?”라며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낙마하여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이 다시 위로를 하자 노인은 “이게 복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하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북방 오랑캐가 침략해왔다. 나라에서는 징집령을 내려 젊은이들이 모두 전장에 나가야 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진 까닭에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됐다.(‘고사성어랑 일촌 맺기’ 중에서/ 서해문집)
위 이야기는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란 고사성어의 유래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새옹지마가 될 수 있으니 눈앞에 벌어지는 결과만 가지고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여당 참패, 야당 압승’으로 요약되는 20대 총선 결과는 새옹지마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총선 승리가 독(毒)이 돼 대통령선거(대선) 패배로 이어질 수도 있고, 총선 패배가 오히려 대선 승리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패는 성공의 아버지이지만,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던가. 새옹지마에 빗대 20대 총선의 의미와 2017년 대선의 함수 관계를 추론해보면 20대 총선 결과는 ‘여당 참패, 야당 압승’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13일 안철수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해 벌판에 혈혈단신으로 나설 때만 해도 야권에서는 ‘야권분열’에 따른 새누리당의 어부지리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노인(야권 지지층)이 기르던 말(안철수)이 스스로 울타리를 뛰어넘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웃 주민들이 노인을 위로하던 것처럼 야권에서는 안철수의 앞날을 걱정했고, 여권은 일여다야(一與多野) 구도에 남몰래 웃었다. 각 당 공천이 시작되기 전인 2월 중순까지만 해도 새누리당 등 여권 주변은 ‘야권분열로 새누리당이 최소 160석, 최대 180석, 내심 개헌까지 가능한 200석도 넘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더불어민주당(더민주당)에서도 문재인 대표가 물러난 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구원투수로 등장해 추락하던 지지율이 회복되자, ‘107석을 마지노선으로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이 거둔 127석 이상도 가능할 것’이란 희망 섞인 얘기가 나왔다. 그에 비해 국민의당은 창당 직후 한동안 원내교섭단체 구성도 하지 못하고 정당 지지율까지 한 자릿수에 머물면서 ‘총선에서 20석을 넘겨 원내 제3당이 되겠다’는 목표조차 힘겨워 보였다. 불과 두 달 전 일이다.
안철수, 암말 한 필과 함께 돌아오다
각 당 공천이 시작된 2월 말 이후 민심은 요동쳤다. 살생부 파문으로 김무성 당시 대표가 사실상 새누리당 공천에서 배제됐고, 공천 여론조사 유출 파문으로 당이 뒤숭숭한 상황에서 윤상현 의원의 ‘막말’까지 터져 나왔다. 새누리당 공천 경쟁 과정에서 ‘진박(진짜 친박근혜) 감별사’(최경환 의원)가 등장하는가 하면,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주도한 ‘비박(비박근혜) 학살 공천’으로 당내 갈등이 고조됐다.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의 정치인으로 낙인찍힌 유승민 의원은 끝내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해 후보 등록 직전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해야 했다. 김무성 대표는 ‘옥새파동’을 일으키며 유승민 의원이 출마한 대구 동구을 등 일부 지역에 ‘무공천’을 했다.
‘당이 어떻게, 누구를 추천하든 찍어주겠지’라는 새누리당의 오만한 공천 과정을 지켜본 여당 지지층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 결과가 20대 총선에서 원내 과반 미달은 물론, 원내 제1당 의석도 얻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여당의 총선 참패는 자업자득인 측면이 크다. 야권분열로 초래된 일여다야의 유리한 선거 지형에 방심한 여권이 국민 눈치를 보지 않고 볼썽사나운 친박 대 비박 간 공천 갈등을 벌였기 때문이다.
더민주당 역시 비례대표 공천 때 김종인 대표의 ‘셀프공천’ 논란으로 적잖은 내홍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당내 대주주가 결국 문재인 전 대표라는 점이 부각됐고, 이는 잠재돼 있던 호남의 반문재인 정서가 표출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선거는 비교우위를 통해 한 표라도 더 얻는 쪽이 승리하는 게임. 누가 누가 잘했나가 아니라, 누가 누가 더 못했나를 가리는 경우가 더 많다. 이번 20대 총선 결과는 더민주당보다 공천 갈등이 더욱 첨예하게 드러난 새누리당에게 국민이 준엄한 심판을 내린 선거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4월 13일 20대 총선 투표 결과는 더민주당 123석, 새누리당 122석, 국민의당 38석 등으로 야권 승리이자 새누리당 참패로 귀결됐다. 안철수의 탈당과 국민의당 창당이 결과적으로 야권 지지층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함으로써 더민주당도 살리고 국민의당도 살리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수도권에서 지역구 후보는 더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주고, 정당 투표에서 국민의당을 선택하는 야권 지지층의 전략적 ‘교차투표’가 큰 위력을 발휘했다. 집을 나간 줄 알았던 안철수 의원이 ‘교차투표’란 암말 한 필과 함께 돌아와 더민주당도 살리고 국민의당도 살려 야권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교차투표’에 담긴 야권분열의 기운
그러나 야권에서는 ‘20대 총선 결과가 야권에 좋은 일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1년 8개월 앞으로 다가온 19대 대선 때 야권 후보 단일화 가능성이 그만큼 더 멀어졌다는 점에서다.“야권이 총선에서 승리한 것은 의회 환경이 달라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특히 국민의당이 제3당으로서 원내 1, 2당 사이에서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 있게 된 점은 우리 국회가 여야의 극한적 대립이 반복되는 모습에서 벗어나 대화와 타협을 할 수밖에 없는, 상생 공존의 시스템을 갖춘 측면이 있다. 다만 야권의 총선 승리는 2017년 대선 때 야권이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할 수 있음을 예고한 측면도 있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의 얘기다. 그는 “YS(김영삼)와 DJ(김대중)가 제각각 출마했다 야권분열로 여당에 어부지리를 안겼던 1987년 대선 때 양 김의 분열 상황이 내년 대선에서 재연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이번 총선 결과가 야권의 대선 환경을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뭔가.
“더민주당은 호남에서 패배했음에도 원내 1당이 됐고, 국민의당은 야권의 뿌리라 할 수 있는 호남을 석권하면서 제3당으로 성장했다. 서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뒀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때문에 야권의 분열적 요소는 더 커졌다. 국민의당 출현은 야권 지지층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함으로써 과거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야권 지지층의 갑갑함을 상당 부분 풀어준 측면이 있다. 이른바 ‘교차투표’를 통해 ‘지역구’에서는 여당 심판 투표를 하고, ‘비례대표 정당 투표’에서는 제1야당인 더민주당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교차투표는 총선에서나 가능하다. 정당과 후보가 일체화되는 대선에서 교차투표는 불가능하다.”
▼ 더민주당이 새누리당을 뛰어넘는 성적을 거뒀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민주당은 이번 총선을 통해 수도권과 PK(부산·경남)에서 친문재인 인사가 대거 당선했다. TK(대구·경북)에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둔 김부겸 후보와 서울 종로에서 재선(전북 무주·진안·장수·임실에서 4선한 것까지 포함하면 6선)에 성공한 정세균 후보 등이 당내 세력 판도를 바꾸는 주요 변수가 될 수 있겠지만, 결국 더민주당은 문재인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친문세력과 비문세력으로 양분될 공산이 크다. 당권과 차기 대선후보 경쟁까지 당내 갈등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마찬가지로 국민의당도 본격적인 분열 상황에 처할 개연성이 높다. 총선이란 당면 과제 앞에서 천정배, 정동영, 박지원 등 호남 중진들이 목소리를 낮췄지만, 총선 이후 당권을 향한 본격적인 힘겨루기를 벌일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친노(친노무현) 패권주의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안철수 의원이 당을 뛰쳐나와 국민의당을 창당하지 않았나. 이제 더민주당은 친문 대 반문 대결구도가, 국민의당도 친안 대 비안의 분열이 더 심화할 공산이 크다. 총선을 계기로 각 당 내부의 분열적 요소가 더 많아져 야권통합은 그만큼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위기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클 것이다. 차떼기와 대통령 탄핵 후폭풍으로 소멸 직전까지 몰렸던 2004년 상황에 버금갈 정도다. 10년 넘게 유지돼온 친박계는 이제 끝장났다고 볼 수 있다. 구심점도 없고, 마땅한 미래주자도 없다. 박 대통령과 친박이 믿을 곳은 TK였는데, 그곳마저도 반발 여론이 거세다는 게 확인됐다. 대통령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층까지 와해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새누리당은 과거에도 그랬듯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국민 여론이 극도로 나빠졌던 이명박 정부 4년 차인 2011년 12월, 당시 한나라당은 지도부가 모두 물러나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전권을 넘겨 넉 달 만에 총선에서 승리하고 총선 8개월 뒤 대선에서 승리한 경험을 갖고 있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대표는 “2012년 대선 때 새누리당은 이명박 정부와 철저히 차별화하면서 마치 정권교체를 한 것처럼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며 “20대 총선에 나타난 민심을 돌파하려면 새누리당이 주도 세력 교체를 통해 박 대통령과 차별화하면서 국민의 기대를 다시 모아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새누리당이 원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발등에 불처럼 떠오른 이슈가 유승민 의원의 복당 여부다. 김무성 대표가 총선 직후 4월 14일 당대표직에서 사퇴한 만큼 차기 전당대회 이전에 유 의원을 복당케 할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최정묵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은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참패했지만 여권 전체로 보면 유승민이란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한 측면이 있다”며 “새누리당이 앞으로 전당대회와 원내대표 선출 과정을 거치며 민심을 수습해갈 때 유승민 복당 카드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민심 수습이 빨라질 수도, 아니면 더뎌질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유승민 복당 가능성과 현실성
최 부소장은 “이번 총선에서 여권의 차기 주자군이 상처를 입거나 낙선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는 있지만, 친박계가 주도적으로 반기문 띄우기에 나서는 모습을 비치면 또다시 ‘진박마케팅’의 역풍이 재연될 수 있다”면서 “결국 친박계가 한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는 상황이 연출된다면 유승민 복당 카드가 조기에 현실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그러나 여권 일각에서는 유승민 의원의 조기 복당이 쉽지 않으리란 예상도 나온다. 유 의원과 함께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동반 출마한 류성걸, 권은희 후보가 낙선하고, 유 의원이 지원에 나섰던 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의 무소속 조해진 후보까지 낙선하면서 리더십에 한계를 보였다는 점에서다. 여권 한 인사는 “대구에서 나 홀로 당선한 유 의원이 복당한다 해도 새누리당을 바꿀 만한 세력을 규합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면서 “넓게 볼 때 친박, 좁게 보더라도 진박이 이번 총선에서 상당수 살아남았다”며 “이들이 기득권을 먼저 내려놓지 않는 한 유 의원이 새누리당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릴 여건은 조성되지 않는 셈”이라고 진단했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뭉쳤던 친박계는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계기로 극대화됐다 2016년 총선을 계기로 진박으로 쪼그라들어 최대 위기를 맞았다. 권불십년이란 얘기는 친박계에게도 예외가 아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