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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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현대家 잔혹사

비극의 시작과 끝 대북사업

실향민 회장의 ‘오너 리스크’, 生과 死 가르다

  •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6-04-11 09:3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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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이른바 ‘왕자의 난’ 직후 정몽구 회장 측근 그룹에서 격론이 벌어진 적이 있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대북사업과 관련한 갈등이었다. 현대자동차에서 성장해온 임원들은 ‘이미 정몽헌 회장이 주도권을 쥔 만큼 거리를 둬야 한다’고 선을 그은 반면, 다른 계열사에서 온 임원들은 ‘정부의 움직임에 발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몽구 회장이 기아자동차 인수와 해외 진출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하면서 사안은 자연스레 정리됐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때 결정이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의 명운을 가른 셈이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핵심에서 일했던 한 전직 인사의 회고. 그에 따르면 당시 쟁점이 된 사안은 평양에 현대자동차 공장을 건설하는 방안이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재계가 경쟁적으로 북한 관련 사업 아이디어를 쏟아내던 무렵, 현대차 측에서 정보당국 핵심 관계자를 중간에 내세워 청와대에 이를 구체적으로 타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몽헌 회장으로 대북사업을 단일화한다는 정권 핵심의 판단에 정몽구 회장 주변의 만류가 이어져 아이디어는 결국 백지화된다. 당시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은 현대차가 현대그룹에서 본격적으로 분리해 나오게 된 계기로 이때 일을 꼽는다. 만일 당시 현대차가 평양에 공장을 세웠다면 오늘날 현대·기아차그룹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강원 통천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청운의 꿈을 안고 세 번째 가출을 할 때 아버님이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중략) 이제 그 소 한 마리가 1000마리 소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희망이 부른 재앙”

    1998년 6월 16일 소떼를 실은 트럭 50대가 통일대교를 따라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는 ‘세기의 이벤트’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읽어 내려간 소감문 일부다. 훗날 그 자신이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회고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당시 방북은 정주영 개인에게나 현대그룹에게나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본격화된 대북사업이 이후 현대가(家)가 어제의 영광에서 물러나는 시발점이 된 것 역시 사실이다.



    ‘오너 리스크(Owner Risk).’ 최고경영자 1인의 개인적인 판단이나 행동이 기업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는 경우를 일컫는 경영학 용어다. ‘아산’이라는 자신의 호마저 고향마을(강원 통천군 아산리)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만큼 실향민이라는 자각이 강했던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 개인의 정체성이 현대그룹 대북사업의 출발점임을 부인하는 이는 없다. 여기에 오너 한 사람의 결정이 다른 기업에 비해서도 절대적 수준으로 작용하던 현대그룹 특유의 문화가 결합하면서 리스크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지켜봐온 한 전직 정부 관계자는 “희망이 불러온 재앙”이라고 촌평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대북사업 ‘올인’은 제3세계 국가에서 ‘통 큰 베팅’으로 큰 성과를 거뒀던 이 무렵 국내 대기업의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는 가까운 인사들의 설명이다. 이를테면 전략적인 판단이었다는 것. 현대그룹을 위기에 빠뜨리고 정몽헌 회장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5억 달러 대북송금 사건 역시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 지도자에게 거액의 ‘뒷돈’을 건네는 대신 유망 사업의 장기 독점권을 보장받는 것은 이 시기 비일비재한 비즈니스 모델이었다는 이야기다.

    두 번째 소떼 방북이 이뤄진 1998년 10월 정주영 명예회장은 정몽헌 회장과 함께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금강산관광사업의 50년 독점권과 황해도 해주 약 6600만㎡(2000만 평) 공단 조성사업에 대한 권한을 보장받는다. 빠른 속도로 진행된 사업은 그다음 달 금강산관광 유람선의 동해항 첫 출항으로 이어지고, 해주공단은 이후 지난한 밀고 당기기를 거쳐 개성에 건설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후 남북 경제협력의 양대 축으로 꼽힌 금강산과 개성공단이 당시 면담에서 모두 구체화된 셈. 이때 현대그룹 금강개발이 주관하던 사업은 1999년 2월 출범한 전담계열사 현대아산이 맡게 된다.

    그러나 정작 대북사업이 비즈니스 차원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적은 별로 없었다는 게 이 시기 현대그룹에 관여했던 인사들의 대체적인 설명. 대북송금을 포함해 금강산·개성공단 준비에 과다출혈이 이어지면서 부실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했고, 관광사업 초기 ‘바람몰이’를 위해 가격을 낮게 책정하는 바람에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적자 누적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2001년 3월 정주영 명예회장의 사망 역시, 마지막 방북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데다 현대건설 경영난 등이 맞물려 벌어진 결과라는 회고가 있을 정도다. 결국 정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 부자의 죽음은 모두 대북사업이 도화선 구실을 했다는 뜻이다.

    이후 2008년 관광객 박왕자 씨 총격 피살 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이 중단되고 2010년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계기로 남북 경협 대부분이 차단되면서 현대그룹은 치명타를 입는다. 한때 직원이 1000여 명에 이르던 현대아산의 규모는 4분의 1 이하로 쪼그라들었고, 금강산관광사업 중단으로 입은 손실만 1조 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에 올해 2월 개성공단 폐쇄와 북측의 자산 몰수 조치로 예상되는 피해도 1조 원 이상. 여행과 건설, 면세점 사업 등으로 눈을 돌리면서 현대아산의 적자 규모는 빠른 속도로 줄고 있지만 여전히 매년 수십억 단위의 손실을 피하기는 어려운 구조다.



    마지막 기대를 품었지만…

    보수성향 정부의 집권이 이어지고 남북 간 긴장이 극대화되는 와중에도 대북사업과 현대아산에 대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의지는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정주영 명예회장과 남편 정몽헌 회장의 유지(遺志)를 어떻게든 이어가겠다는 것. 현대그룹 측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초기 내걸었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대해 상당한 희망을 품었고, 현대상선이 나진·하산 프로젝트에 사업자로 참여하는 등 반전 기회를 모색하기도 했다. 주철기 전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 등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청와대 내 일부 인사와 끊임없이 소통해왔다는 증언도 나온다. 여기에는 현 회장의 외삼촌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역할’을 해줄지 모른다는 기대도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성공단 폐쇄와 함께 대북사업 재개는 기대하기 어려워졌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현대증권을 매각해 확보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향후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된 상황에 가깝다. 공교롭게도 현대증권 매각 본입찰 일정이 발표된 3월 11일은 십수 년 전 정주영 명예회장의 카운터파트였던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개성공단 남측 자산 몰수를 공식 발표한 이튿날이기도 하다. 여러 모로 현대가의 운명을 가르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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