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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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야쿠자 보복 전쟁, 공포의 일본

최대 조직 야마구치파 분열로 총격, 화염병 투척, 차량 돌진까지 무방비 도시

  • 장원재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입력2016-03-11 17:5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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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8일 오후 1시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경찰청 회의실에는 전국에서 소집된 폭력조직 담당 경찰 간부 수십 명이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가네타카 마사히토(金高雅仁) 경찰청 장관은 긴장된 목소리로 “철저히 시민생활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 두 단체 관련 단속을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 가네타카 장관이 언급한 ‘두 단체’는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山口)파와 고베 야마구치(神戶山口)파. 3월 7일 경찰청은 지난해 8월 갈라진 두 단체가 ‘항쟁을 벌이고 있다’고 공식 인정했고, 하루 뒤인 이날 대책본부를 만들어 본격 대응에 나섰다.



    ‘신주쿠 충돌’ 이후 본격화

    이날 회의가 열린 결정적 계기는 3월 6일 새벽 이바라키(茨城)현 미토(水戶)시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이었다. 고베 야마구치파 계열 사무소에 총탄 5발이 날아든 것. 2발은 유리창을 관통했지만 이른 시간이어서 사상자는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와 수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사무소 앞 도로는 통학로인 까닭에 주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3월 5일 새벽에는 같은 사무소 주차장에 주차된 트럭으로 다른 트럭이 돌진해 충돌하는 사건도 있었다. 경찰에 자진 출두한 운전자는 항쟁 중인 야마구치파 조직원이었다. 2시간 뒤 미에(三重)현 쓰(津)시에서는 거꾸로 야마구치파 계열 사무소로 승용차가 돌진했다. 또 7시간 뒤에는 고베시에서 고베 야마구치파 조직 간부가 운전하던 승용차가 공구를 든 남성들에게 습격을 당하는 등 이날만 ‘항쟁’ 관련 사건이 전국에서 세 건이나 발생했다.
    두 조직의 세력 다툼은 최근 연일 일본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화염병을 던지거나, 총을 쏘거나, 차량으로 돌진하는 일이 거의 매일 발생하며 일본열도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상황. 경찰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9월부터 3월 6일까지 두 조직이 관련돼 발생한 사건은 49건에 이른다. 총기를 사용한 사건이 4건, 화염병 투척이 3건, 자동차로 사무실에 돌진한 게   9건이었다. 경찰은 “2월 이후 충돌이 점차 격화하고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한때 일본 전체 야쿠자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던 야마구치파의 분열은, 6대 두목 시노다 겐이치(篠田建市·74)가 상납금을 지나치게 늘리고 나고야(名古屋)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자신의 파벌 고도카이(弘道會)만 챙긴 게 발단이 됐다. 불만이 쌓이자 고베의 야마켄(山健) 등 13개 파벌이 지난해 8월 말 독립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고베는 야마구치파의 발상지이고, 야마켄은 5대 두목을 배출한 ‘명문 파벌’이다. 이들은 “정통성은 우리에게 있다”며 ‘고베 야마구치파’를 결성했다. 야마켄의 리더 이노우에 구니오(井上邦雄·68)가 두목으로 선출됐다.
    분노한 시노다는 회의를 소집해 이노우에 등 5명에게 ‘절연(絶緣)’, 나머지 8명에게 ‘파문(破門)’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절연’은 어떤 경우에도 조직에 돌아올 수 없으며, ‘파문’은 조직에서 일단 추방되지만 경우에 따라 돌아올 수 있다.
    고베 야마구치파를 결성해 독립한 세력은 기존 야마구치파의 30%에 달한다. 경찰청 집계에 따르면 2015년 말 기준 야마구치파 조직원 수는 1만4100명으로 1위였고, 고베 야마구치파는 6100명으로 3위였다(그림 참조). 고베 야마구치파는 인원은 적지만 조직 근거지인 간사이 지역에서 강한 데다 자금줄도 탄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열 직후부터 일본 경찰은 긴장감을 갖고 사태를 주시해왔다. 1985〜87년 야마구치파가 분열한 이른바 ‘야마이치(山一) 항쟁’ 당시 총격 사건 등으로 야쿠자와 민간인 25명이 죽고 70명이 다친 전례가 있기 때문. 경찰은 “강한 단속으로 충돌을 억누르겠다”고 밝혔고, 두 조직은 때를 기다리며 수면 아래서 세 불리기에 돌입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조직 분열 후 항쟁에 대비해 총기를 구하려는 수요가 크게 늘면서 권총 한 정 가격이 30만 엔(약 320만 원)에서 100만 엔(약 1080만 원)으로 올랐다. 고액의 보상금을 내걸고 청부살인업자를 모집하는 움직임도 감지됐다.
    항쟁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2월 15일 일본의 ‘유흥 1번지’인 도쿄 신주쿠(新宿) 가부키초(歌舞伎町)에서 두 조직이 충돌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고베 야마구치파의 회합 소식을 듣고 야마구치파 조직원들이 몰려와 대낮에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는 모습이 지상파 등을 통해 방송되면서 시민들에게 충격을 줬다. 이후 지방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지던 조직 간 충돌은 수도권에서도 본격화됐다. 2월 27일 오후 수도권인 사이타마(埼玉)현 야시오(八潮)시 주택가에서 신주쿠 회합을 주최했던 고베 야마구치파의 간부 집 담벼락에 누군가 총을 발사했고, 3시간 후에는 2km가량 떨어진 도쿄 아다치(足立)구에서 고베 야마구치파 소속 조직원이 집단폭행을 당했다.



    생사 갈림길, 끝장 대결 우려

    야마구치파는 1915년 야마구치 하루키치(山口春吉)가 고베항 노동자 50여 명과 함께 결성했다. 마약, 도박, 부동산 등 ‘돈이 되는’ 분야마다 닥치는 대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급속히 세력을 불렸다. 2014년 9월 미국 ‘포천’지는 야마구치파의 자금 규모가 66억 달러(약 8조 원)에 달해 러시아 마피아 솔른체브스카야 브라트바야(85억 달러)에 이어 전 세계 2위에 이른다고 추산한 바 있다.
    하지만 야마구치파를 비롯한 일본 야쿠자의 위세는 예전 같지 않다는 게 현지의 대체적인 분위기다. ‘잃어버린 20년’이라 부르는 장기침체에다 정부가 1992년 ‘폭력단대책법’을 만들어 단속에 나서면서, 한때 18만 명이 넘던 야쿠자 전체 조직원 수는 지난해 기준 4만7000여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일본 정부는 규제를 점차 강화해 지금은 조직원 5명 이상이 상대 조직 사무소 근처에 모이기만 해도 체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조직 간 항쟁에 시민이 휘말렸을 경우 두목이 배상책임을 지도록 했다. 지방자치단체 역시 소재 기업들이 야쿠자와 거래하지 못하도록 조례를 만들며 숨통을 조였다. 야마구치파 두목인 시노다가 2011년 언론 인터뷰에서 “이상한 시대가 왔다. 법을 위반하지 않았는데 제재를 가하는 것은 신분차별”이라고 불만을 토로했을 정도다.
    야마구치파의 분열 역시 이러한 자금난과 관계가 깊다. 분열 전 야마구치파는 수입이 줄었음에도 분파별로 월 100만 엔(약 1100만 원) 안팎의 상납금을 포함해 명절 축하금 등 연간 3000만 엔(약 3억3000만 원)을 요구했다. 불만을 제기하면 가차 없이 처벌했다. 독립을 선언한 고베 야마구치파는 상납금을 월 10만〜30만 엔(약 110만〜330만 원)으로 낮추고 명절 축하금을 면제한다는 조건을 내걸며 세력 불리기에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야마구치파도 상납금을 25%가량 낮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두 조직의 항쟁이 ‘줄어드는 파이’를 두고 정면충돌한 결과인 만큼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쪽이 궤멸 상태가 되거나 둘 다 쇠퇴하고 나서야 마무리되리라는 것. 문제는 이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이 다수 희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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