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성장을 견인한 원동력은 몇몇 지도자의 리더십이 아니라 ‘노력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는 평등의 원리였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대한민국의 양극화는 점차 심화됐고 젊은이들은 희망을 잃고 있다. ‘금수저, 흙수저’ 같은 유행어가 상징하는 부와 신분의 양극화를 타파하고 행정부에 대한 견제를 확대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지금 상황을 타개하기는 어려울뿐더러 심지어 경제성장을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는 게 강철규(71)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의 주장이다. 최근 ‘강한 나라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사회평론)를 펴낸 강 교수를 만나 위기의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들었다.
▼ 한국 경제성장률이 자꾸 떨어져 각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걸 가지고 나라가 망한다느니 큰일났다느니 하는 사고방식이 아직 구시대적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 신간에서도 ‘새로운 성장과 발전의 패러다임’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데 두 패러다임의 차이는 무엇인가. ▼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도 경제성장이 곧 (사회의) 발전이라고 보는 시각이 압도적이다. 개발연대(1960~70년대)의 고도성장 패러다임이다. 물론 경제성장은 생명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인류의 기본 가치를 훼손해가며 성장만 시키는 것은 발전이라 볼 수 없다. ‘용산 참사’나 ‘세월호 침몰’ 사고를 보라. 기업이 이윤 추구만 앞세우다 생명을 희생시켰다. 경제성장은 수단적 가치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가치를 실현하는 패러다임이다.”
▼ 어떤 기본 가치를 말하는 것인가.▼
“아마르티아 센(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은 인간 자유의 확대를 사회 발전의 척도로 봤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자유는 물론이고 생명, 신뢰, 재산권이라는 기본 가치가 실현되는 것을 사회 발전의 척도라고 본다. 경제성장이 이뤄지더라도 이러한 기본 가치를 훼손하면서 이루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반면 성장률이 낮더라도 이 기본 가치가 확립되면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 문턱에서 정체돼 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성장동력에 대해서도 자주 논의하곤 하는데….▼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을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중·하위층 소득을 높여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이다.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소득 상위 20%의 소득이 1% 올라갈 때 전체 성장률은 0.08% 떨어진다고 한다. 반면 하위 20%의 소득이 1% 올라가면 전체 성장률이 0.34% 올라간다. 다시 말해 중·하위층 소득이 올라가면 전체 성장률이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양극화가 심화돼 상위층 소득만 올라가기 때문에 정체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한반도 경제를 통합하는 것이다. 남북 분단의 현실이 있으니 정치적으로는 통합이 어렵더라도 경제적으로는 통합돼야 한다. 경제교류를 계속하면서 한반도 경제를 통합하면 잠재성장률이 4~5%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고 본다. 그것도 20~30년 동안 계속 교역을 확대하면 성장률도 올라가고 남북한 간 신뢰도 높아진다. 남북한 소득계층의 (경제적) 자유도 확대되는 등 기본 가치의 실현에도 도움이 된다. 내가 책에서 중세 무역을 장악했던 베네치아공화국의 교역확대정책에 대해 일부러 자세히 쓴 이유도 여기 있다.”
“리처드 넬슨 미국 컬럼비아대 경제학 교수가 처음 도입한 개념으로, 자동차나 전기제품 등에 사용되는 물리적 기술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나는 이 개념을 제도뿐 아니라 조직과 운영능력(리더십)을 포함한 것으로 새롭게 정의했다.”
▼ 그렇다면 ‘강한 나라’를 만드는 사회적 기술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류 역사상 사회 발전에 기여한 사회적 기술들을 네 가지로 정리해봤다. 첫째, 신분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기술로, 미국의 노예해방제도라든지 우리나라의 토지개혁을 꼽을 수 있다. 토지개혁은 지주와 소작인 관계를 해체해 평등사회를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둘째, 부의 증대를 가져오는 사회적 기술인데 여기에는 베네치아의 교역확대정책이나 주식회사와 같은 기업·시장제도를 들 수 있다. 베네치아는 교역을 확대하면서 금화를 사용하고 표준 도량형 체계를 개발했는데 이런 것들이 모두 부를 증대하는 사회적 기술이다. 셋째,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작동하게 하는 사회적 기술로, 로마의 호민관제도나 영국의 의회제도가 있다. 넷째, 신뢰와 법치를 이루는 사회적 기술인데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 같은 기관이나 버지니아 권리장전, 우리나라의 건국헌법 등이 포함된다.”
▼ 아테네의 ‘닫힌’ 신분제와 로마의 ‘열린’ 신분제를 비교했는데 우리나라 신분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1948년 건국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사농공상(士農工商) 또는 지주 대 소작인으로 닫힌 신분사회였다. 건국과 더불어 헌법이 제정되고 인간 기본권을 인정하게 됐으며, 농지개혁이 이뤄지면서 지주-소작인 관계가 해체돼 평등사회가 구현됐다. 지난 반세기 동안 평등은 한국 사회에서 역동성의 원천이었다. 누구든 노력하면 기업가가 되거나 판검사, 국회의원, 대통령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에너지가 산업화와 민주화의 원동력이 됐다.”
▼ 법적으로는 평등이 보장돼 있지만 오늘날 다시 경제적으로 신분이 나뉘는 상황이 아닌가.▼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다시 닫힌 신분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요새 유행어인 ‘금수저, 흙수저’가 바로 그런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재벌 2세, 3세는 유능하지 않아도 계속 부가 세습된다. 서민은 평생 노력해도 근근이 먹고사는 데 그친다. 해방 직후부터 반세기,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달동네에 살더라도 열심히 하면 신분 상승이 가능했다. 나는 개발연대의 모 대통령이 경제발전에 기여한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경제발전을 이끈 진짜 에너지는 평등에서 나온 것이다. 부모세대는 자신은 가난하지만 자식들만큼은 좋은 직장을 갖고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하겠다며 높은 교육열을 보였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신분 이동이 열려 있는 사회의 에너지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는 것이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사회 각 부문에서 상위층은 계속 세습되고 있다. 옛날처럼 벤처기업이 재벌 반열에 드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 사회가 활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정도 차이는 있으나 양극화는 전 세계적인 문제다. 세계 학자들도 해결 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중 가장 적극적으로 논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마르티아 센과 로널드 드워킨이다. 이들을 보통 시정주의자라고 일컫는데, 사후적 복지제도보다 초기 조건의 차이를 줄이는 적극적인 노력으로 시장경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고용이나 교육의 기획 균등과 조건이 불리한 자에 대한 적극적 우대제도를 도입할 것을 정부 측에 권한다. 또한 기득권이 사회 각 부문에 만들어놓은 진입장벽을 없애는 것도 필요하다. 경제민주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소기업도 대기업으로 클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은 중소기업이 어느 정도 크면 재벌들이 흡수해버리거나 앞길을 막는다.”
▼ 책에서 베네치아의 사례 등을 들면서 교역을 통해 생성되는 ‘신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저신뢰 사회라는 지적을 종종 듣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많은 거래에 정당성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불공정한 경쟁이 일부 구조화돼 있다. 특히 부(富)의 정당성이 결여돼 있다. 한 세대 전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가 크게 치부(致富)를 했는데 그 방식이 투기든지 정부 특혜를 받았든지 그런 식으로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신뢰도 없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래의 공정성과 정당성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 결국 부당하게 재벌이 됐다는 게 관건이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부의 정당성은 인정받지 못하면서 진입장벽은 또 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재벌은 계열사들로 이뤄진 집단을 보유하고 있는데 개별 중소기업은 이들 집단과 경쟁이 안 된다. 그래서 진입장벽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단 시장에 진입하면 벤처기업이든 대기업이든 경쟁은 공정하게 해야 한다. 공정거래법이 관할하는 만큼 그 법이 철저히 집행돼야 한다.”
▼ 노예제에 관한 설명에서 ‘인권과 재산권의 대립’을 지적한 것이 흥미로웠다. 오늘날에도 ‘세입자에 대한 건물주의 재산권 행사는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 같은 인권과 재산권의 대립 사례가 제기될 수 있을 텐데.▼
“흑인 노예를 재산으로 본 것은 명백한 반인륜적 행위다. 노예해방은 재산으로 취급받던 인간의 존엄성을 복권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인간의 노동으로 얻은 재산권을 인권과 동일하게 보는 철학적 견해도 있다. 헤겔 등이 주장한 재산권 인권론이 그것이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에도 돈을 주고 대리 징병자를 보낸 사례가 있었는데, 이 또한 재산권 인권론에 기반을 둔 행위였다.
그렇다고 재산권이 천부적 인권보다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체로서 인간이 갖는 인권은 인권적 재산권보다 훨씬 상위에 있는 개념이다. 세입자에 대한 건물주의 재산권 행사의 경우에도 재산권이 존중돼야 하는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천부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 높은 가치로 봐야 한다. 재산권 행사로 인권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 이것이 인류 역사를 통해 확립된 가치체계라고 본다.”
▼ 영국이 최초 산업혁명 국가로 성공하는 데 의회제도가 크게 기여했다고 했다. 우리나라 국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영국 의회제도는 왕의 독점적·독재적 재산권 행사에 대해 의회가 견제를 했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리하여 사유재산제도를 확립했고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국회도 헌법, 상법, 공정거래법 등을 제정하면서 산업화에 기여했다고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행정부의 독주를 견제하지 못했다.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 권한이 비대해 견제와 균형의 기능이 약해질 수 있는데 우리나라가 바로 그런 경우다. 삼권분립이 훼손돼온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유시장경제도 파탄을 초래할 수 있다. 국회가 제 기능을 하려면 독립적으로 시의적절한 입법활동을 하고 행정부 감시를 철저히 하는 권력분립의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미국처럼 국회에 행정부 회계감사권을 줘야 한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기능을 감사원이 수행하지만 미국은 의회가 행사한다.”
“개발연대에는 정부·재벌 주도로 성장했다. 재벌이라는 기업집단이 형성됐고 국제경쟁력을 갖춘 우수 대기업을 만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중소기업 발전 저해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한국 산업 발전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주식회사라는 겉모습은 갖춰놓았는데 재벌기업 계열사들 간 순환출자 때문에 1~2%도 되지 않는 총수의 지분으로 재벌기업들을 지배하는 경우도 아직 많다. 그나마 신규 순환출자에 대해서는 지난해부터 금지했지만 과거에 했던 순환출자를 기득권으로 인정해주고 있는 게 문제다. 기업들이 독립경영체제로 가는 것이 가장 좋다. 내가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할 때 계열사 상호출자를 금지시키고 지주회사제도로 바꾸라고 한 것이 그런 의미에서였는데, 지금 지주회사제도는 본래 취지가 상당히 훼손된 상태다.”
▼ 과거 우리나라에도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 같은 부패방지위원회(2001년 7월 신설, 2006년 7월 폐지)가 있었다. 이런 기구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나(강 교수는 부패방지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다).▼
“당시 부패방지위원회에선 신고자에 대한 조사권은 있었으나 피신고자에 대한 조사권이 없었다. 당시 위원회에서 조사에 착수했던 사건 가운데 전 검찰총장과 당시 현직 부장검사 등이 연루된 사건이 있었다. 뇌물로 1500만 원짜리 페르시아산 카펫을 줬다는 신고자에 대한 조사는 할 수 있었지만 받은 사람에 대한 조사권이 없어 그대로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 조사에서는 1500만 원짜리 페르시아산 카펫이 150만 원짜리 중국산으로 둔갑했다. 1000만 원 이상의 뇌물인 경우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적용돼 처벌받을 수 있었는데 1000만 원 미만으로 뇌물죄만 적용돼 공소시효 만료로 더 진행할 수 없었다.
부패방지위원회는 장차관은 물론 판검사, 국회의원까지 포함한 고위 공직자를 대상으로 했다. 검찰이나 감사원이 유사 기능을 하지만 이들은 이미 그 자체로 권력기관이 됐다.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곳이 없다. 권력기관을 감시하는 특별기구는 독립적이어야 한다. 특정 부서나 정파의 영향을 받으면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이나 홍콩의 염정공서 같은 신뢰기구가 되지 못한다. 이는 싱가포르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통령 의지에 달려 있다.”
▼ 우리나라 법치는 얼마나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가.▼
“사법권에 행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법권이 정파적 필요에 의해 같은 성향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행해지면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사법권 독립이 철저하게 이뤄져야 하는데…. 요즘 국회에 대해서건 사법부에 대해서건 삼권분립의 기본 정신이 많이 흔들리고 있어 걱정된다.”
※ 강철규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경제학자이면서 서울시립대 교수와 우석대 총장을 역임한 교육자다.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신설된 부패방지위원회 초대 위원장과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재벌개혁 전도사’라는 별명은 이때 붙은 것이다. 경제성장이 곧 사회 발전이라는 통념에 의문을 느끼고 ‘사회적 기술’이라는 개념을 경제학 모델로 설명하고자 지난 10여 년간 관련 논문을 발표해왔다. 아마르티아 센, 리처드 넬슨, 에릭 바인하커 같은 경제학자들의 연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 한다. 저서로는 ‘소셜 테크노믹스’ ‘우리 경제를 살리는 20가지 방법’ ‘재벌 : 성장의 주역인가, 탐욕의 화신인가’ ‘지력사회&지력기업’ ‘재벌개혁의 경제학’ ‘투명경영, 공정경쟁’ 등이 있다.
▼ 한국 경제성장률이 자꾸 떨어져 각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걸 가지고 나라가 망한다느니 큰일났다느니 하는 사고방식이 아직 구시대적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 신간에서도 ‘새로운 성장과 발전의 패러다임’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데 두 패러다임의 차이는 무엇인가. ▼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도 경제성장이 곧 (사회의) 발전이라고 보는 시각이 압도적이다. 개발연대(1960~70년대)의 고도성장 패러다임이다. 물론 경제성장은 생명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인류의 기본 가치를 훼손해가며 성장만 시키는 것은 발전이라 볼 수 없다. ‘용산 참사’나 ‘세월호 침몰’ 사고를 보라. 기업이 이윤 추구만 앞세우다 생명을 희생시켰다. 경제성장은 수단적 가치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가치를 실현하는 패러다임이다.”
▼ 어떤 기본 가치를 말하는 것인가.▼
“아마르티아 센(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은 인간 자유의 확대를 사회 발전의 척도로 봤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자유는 물론이고 생명, 신뢰, 재산권이라는 기본 가치가 실현되는 것을 사회 발전의 척도라고 본다. 경제성장이 이뤄지더라도 이러한 기본 가치를 훼손하면서 이루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반면 성장률이 낮더라도 이 기본 가치가 확립되면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 문턱에서 정체돼 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성장동력에 대해서도 자주 논의하곤 하는데….▼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을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중·하위층 소득을 높여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이다.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소득 상위 20%의 소득이 1% 올라갈 때 전체 성장률은 0.08% 떨어진다고 한다. 반면 하위 20%의 소득이 1% 올라가면 전체 성장률이 0.34% 올라간다. 다시 말해 중·하위층 소득이 올라가면 전체 성장률이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양극화가 심화돼 상위층 소득만 올라가기 때문에 정체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한반도 경제를 통합하는 것이다. 남북 분단의 현실이 있으니 정치적으로는 통합이 어렵더라도 경제적으로는 통합돼야 한다. 경제교류를 계속하면서 한반도 경제를 통합하면 잠재성장률이 4~5%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고 본다. 그것도 20~30년 동안 계속 교역을 확대하면 성장률도 올라가고 남북한 간 신뢰도 높아진다. 남북한 소득계층의 (경제적) 자유도 확대되는 등 기본 가치의 실현에도 도움이 된다. 내가 책에서 중세 무역을 장악했던 베네치아공화국의 교역확대정책에 대해 일부러 자세히 쓴 이유도 여기 있다.”
한국사회, 평등사회에서 다시 불평등사회로
▼ 책 부제에 나온 ‘사회적 기술’이라는 단어가 생경하다. 단순히 제도를 일컫는 표현은 아닌 듯하다.▼“리처드 넬슨 미국 컬럼비아대 경제학 교수가 처음 도입한 개념으로, 자동차나 전기제품 등에 사용되는 물리적 기술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나는 이 개념을 제도뿐 아니라 조직과 운영능력(리더십)을 포함한 것으로 새롭게 정의했다.”
▼ 그렇다면 ‘강한 나라’를 만드는 사회적 기술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류 역사상 사회 발전에 기여한 사회적 기술들을 네 가지로 정리해봤다. 첫째, 신분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기술로, 미국의 노예해방제도라든지 우리나라의 토지개혁을 꼽을 수 있다. 토지개혁은 지주와 소작인 관계를 해체해 평등사회를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둘째, 부의 증대를 가져오는 사회적 기술인데 여기에는 베네치아의 교역확대정책이나 주식회사와 같은 기업·시장제도를 들 수 있다. 베네치아는 교역을 확대하면서 금화를 사용하고 표준 도량형 체계를 개발했는데 이런 것들이 모두 부를 증대하는 사회적 기술이다. 셋째,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작동하게 하는 사회적 기술로, 로마의 호민관제도나 영국의 의회제도가 있다. 넷째, 신뢰와 법치를 이루는 사회적 기술인데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 같은 기관이나 버지니아 권리장전, 우리나라의 건국헌법 등이 포함된다.”
▼ 아테네의 ‘닫힌’ 신분제와 로마의 ‘열린’ 신분제를 비교했는데 우리나라 신분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1948년 건국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사농공상(士農工商) 또는 지주 대 소작인으로 닫힌 신분사회였다. 건국과 더불어 헌법이 제정되고 인간 기본권을 인정하게 됐으며, 농지개혁이 이뤄지면서 지주-소작인 관계가 해체돼 평등사회가 구현됐다. 지난 반세기 동안 평등은 한국 사회에서 역동성의 원천이었다. 누구든 노력하면 기업가가 되거나 판검사, 국회의원, 대통령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에너지가 산업화와 민주화의 원동력이 됐다.”
▼ 법적으로는 평등이 보장돼 있지만 오늘날 다시 경제적으로 신분이 나뉘는 상황이 아닌가.▼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다시 닫힌 신분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요새 유행어인 ‘금수저, 흙수저’가 바로 그런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재벌 2세, 3세는 유능하지 않아도 계속 부가 세습된다. 서민은 평생 노력해도 근근이 먹고사는 데 그친다. 해방 직후부터 반세기,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달동네에 살더라도 열심히 하면 신분 상승이 가능했다. 나는 개발연대의 모 대통령이 경제발전에 기여한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경제발전을 이끈 진짜 에너지는 평등에서 나온 것이다. 부모세대는 자신은 가난하지만 자식들만큼은 좋은 직장을 갖고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하겠다며 높은 교육열을 보였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신분 이동이 열려 있는 사회의 에너지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는 것이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사회 각 부문에서 상위층은 계속 세습되고 있다. 옛날처럼 벤처기업이 재벌 반열에 드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 사회가 활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국회가 행정부에 대한 회계감사권 가져야”
▼ 과거 노예제 같은 것은 법과 제도를 고치면 됐지만 지금은 눈에 바로 띄지 않는 방식으로 신분이 갈라진 상태다. 해결이 쉽지 않다.▼“정도 차이는 있으나 양극화는 전 세계적인 문제다. 세계 학자들도 해결 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중 가장 적극적으로 논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마르티아 센과 로널드 드워킨이다. 이들을 보통 시정주의자라고 일컫는데, 사후적 복지제도보다 초기 조건의 차이를 줄이는 적극적인 노력으로 시장경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고용이나 교육의 기획 균등과 조건이 불리한 자에 대한 적극적 우대제도를 도입할 것을 정부 측에 권한다. 또한 기득권이 사회 각 부문에 만들어놓은 진입장벽을 없애는 것도 필요하다. 경제민주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소기업도 대기업으로 클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은 중소기업이 어느 정도 크면 재벌들이 흡수해버리거나 앞길을 막는다.”
▼ 책에서 베네치아의 사례 등을 들면서 교역을 통해 생성되는 ‘신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저신뢰 사회라는 지적을 종종 듣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많은 거래에 정당성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불공정한 경쟁이 일부 구조화돼 있다. 특히 부(富)의 정당성이 결여돼 있다. 한 세대 전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가 크게 치부(致富)를 했는데 그 방식이 투기든지 정부 특혜를 받았든지 그런 식으로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신뢰도 없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래의 공정성과 정당성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 결국 부당하게 재벌이 됐다는 게 관건이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부의 정당성은 인정받지 못하면서 진입장벽은 또 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재벌은 계열사들로 이뤄진 집단을 보유하고 있는데 개별 중소기업은 이들 집단과 경쟁이 안 된다. 그래서 진입장벽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단 시장에 진입하면 벤처기업이든 대기업이든 경쟁은 공정하게 해야 한다. 공정거래법이 관할하는 만큼 그 법이 철저히 집행돼야 한다.”
▼ 노예제에 관한 설명에서 ‘인권과 재산권의 대립’을 지적한 것이 흥미로웠다. 오늘날에도 ‘세입자에 대한 건물주의 재산권 행사는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 같은 인권과 재산권의 대립 사례가 제기될 수 있을 텐데.▼
“흑인 노예를 재산으로 본 것은 명백한 반인륜적 행위다. 노예해방은 재산으로 취급받던 인간의 존엄성을 복권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인간의 노동으로 얻은 재산권을 인권과 동일하게 보는 철학적 견해도 있다. 헤겔 등이 주장한 재산권 인권론이 그것이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에도 돈을 주고 대리 징병자를 보낸 사례가 있었는데, 이 또한 재산권 인권론에 기반을 둔 행위였다.
그렇다고 재산권이 천부적 인권보다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체로서 인간이 갖는 인권은 인권적 재산권보다 훨씬 상위에 있는 개념이다. 세입자에 대한 건물주의 재산권 행사의 경우에도 재산권이 존중돼야 하는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천부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 높은 가치로 봐야 한다. 재산권 행사로 인권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 이것이 인류 역사를 통해 확립된 가치체계라고 본다.”
▼ 영국이 최초 산업혁명 국가로 성공하는 데 의회제도가 크게 기여했다고 했다. 우리나라 국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영국 의회제도는 왕의 독점적·독재적 재산권 행사에 대해 의회가 견제를 했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리하여 사유재산제도를 확립했고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국회도 헌법, 상법, 공정거래법 등을 제정하면서 산업화에 기여했다고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행정부의 독주를 견제하지 못했다.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 권한이 비대해 견제와 균형의 기능이 약해질 수 있는데 우리나라가 바로 그런 경우다. 삼권분립이 훼손돼온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유시장경제도 파탄을 초래할 수 있다. 국회가 제 기능을 하려면 독립적으로 시의적절한 입법활동을 하고 행정부 감시를 철저히 하는 권력분립의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미국처럼 국회에 행정부 회계감사권을 줘야 한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기능을 감사원이 수행하지만 미국은 의회가 행사한다.”
“현 지주회사제도 본래 취지 훼손돼”
▼ 우리나라 기업지배 구조는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개발연대에는 정부·재벌 주도로 성장했다. 재벌이라는 기업집단이 형성됐고 국제경쟁력을 갖춘 우수 대기업을 만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중소기업 발전 저해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한국 산업 발전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주식회사라는 겉모습은 갖춰놓았는데 재벌기업 계열사들 간 순환출자 때문에 1~2%도 되지 않는 총수의 지분으로 재벌기업들을 지배하는 경우도 아직 많다. 그나마 신규 순환출자에 대해서는 지난해부터 금지했지만 과거에 했던 순환출자를 기득권으로 인정해주고 있는 게 문제다. 기업들이 독립경영체제로 가는 것이 가장 좋다. 내가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할 때 계열사 상호출자를 금지시키고 지주회사제도로 바꾸라고 한 것이 그런 의미에서였는데, 지금 지주회사제도는 본래 취지가 상당히 훼손된 상태다.”
▼ 과거 우리나라에도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 같은 부패방지위원회(2001년 7월 신설, 2006년 7월 폐지)가 있었다. 이런 기구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나(강 교수는 부패방지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다).▼
“당시 부패방지위원회에선 신고자에 대한 조사권은 있었으나 피신고자에 대한 조사권이 없었다. 당시 위원회에서 조사에 착수했던 사건 가운데 전 검찰총장과 당시 현직 부장검사 등이 연루된 사건이 있었다. 뇌물로 1500만 원짜리 페르시아산 카펫을 줬다는 신고자에 대한 조사는 할 수 있었지만 받은 사람에 대한 조사권이 없어 그대로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 조사에서는 1500만 원짜리 페르시아산 카펫이 150만 원짜리 중국산으로 둔갑했다. 1000만 원 이상의 뇌물인 경우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적용돼 처벌받을 수 있었는데 1000만 원 미만으로 뇌물죄만 적용돼 공소시효 만료로 더 진행할 수 없었다.
부패방지위원회는 장차관은 물론 판검사, 국회의원까지 포함한 고위 공직자를 대상으로 했다. 검찰이나 감사원이 유사 기능을 하지만 이들은 이미 그 자체로 권력기관이 됐다.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곳이 없다. 권력기관을 감시하는 특별기구는 독립적이어야 한다. 특정 부서나 정파의 영향을 받으면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이나 홍콩의 염정공서 같은 신뢰기구가 되지 못한다. 이는 싱가포르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통령 의지에 달려 있다.”
▼ 우리나라 법치는 얼마나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가.▼
“사법권에 행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법권이 정파적 필요에 의해 같은 성향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행해지면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사법권 독립이 철저하게 이뤄져야 하는데…. 요즘 국회에 대해서건 사법부에 대해서건 삼권분립의 기본 정신이 많이 흔들리고 있어 걱정된다.”
※ 강철규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경제학자이면서 서울시립대 교수와 우석대 총장을 역임한 교육자다.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신설된 부패방지위원회 초대 위원장과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재벌개혁 전도사’라는 별명은 이때 붙은 것이다. 경제성장이 곧 사회 발전이라는 통념에 의문을 느끼고 ‘사회적 기술’이라는 개념을 경제학 모델로 설명하고자 지난 10여 년간 관련 논문을 발표해왔다. 아마르티아 센, 리처드 넬슨, 에릭 바인하커 같은 경제학자들의 연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 한다. 저서로는 ‘소셜 테크노믹스’ ‘우리 경제를 살리는 20가지 방법’ ‘재벌 : 성장의 주역인가, 탐욕의 화신인가’ ‘지력사회&지력기업’ ‘재벌개혁의 경제학’ ‘투명경영, 공정경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