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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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당한 동물 진료한 수의사는 왜 신고 안 할까

[이학범의 펫폴리] 신고한 수의사 법적 보호 안 되고 대응 가이드라인도 없어

  • 이학범 수의사·데일리벳 대표

    입력2023-12-28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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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려동물 인구 1500만 시대. 반려동물과 행복한 동행을 위해 관련법 및 제도가 점점 진화하고 있다. ‘멍냥 집사’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반려동물(pet)+정책(policy)’을 이학범 수의사가 알기 쉽게 정리해준다.

    최근 동물자유연대가 흥미로운 조사 결과(‘수의사 대상 동물학대 진료 경험 및 동물학대 대응체계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동물병원 수의사가 최근 2년간 평균 1.7회 학대 의심 동물을 진료했지만 신고율은 6.3%에 그쳤다는 내용입니다.

    동물학대는 아동학대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집 안에서 은밀하게 이뤄져 징후를 포착하기 어렵고 제3자가 이를 알더라도 ‘가정사’라는 이유로 신고를 꺼린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아동학대는 영유아 검진이나 진료 과정에서 의사가 학대 사실을 인지하고 경찰 등에 알려 수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물학대도 일선 수의사가 적극적으로 나서면 피해를 막을 수 있을 텐데, 수의사는 대체 왜 신고하지 않는 걸까요.

    수의사 175명 중 11명만 신고

    동물자유연대에 따르면 동물병원 수의사는 최근 2년간 평균 1.7회 학대 의심 동물을 진료했지만 신고율은 6.3%에 불과했다. [GettyImages]

    동물자유연대에 따르면 동물병원 수의사는 최근 2년간 평균 1.7회 학대 의심 동물을 진료했지만 신고율은 6.3%에 불과했다. [GettyImages]

    이번 조사는 지난해 11월 전국 임상수의사 185명을 대상으로 진행됐습니다. 이 중 대다수인 175명(94.6%)이 학대 의심 동물을 진료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체 평균 5.3회, 최근 2년 동안엔 평균 1.7회 학대 의심 동물을 진료했습니다. 학대 의심 동물의 상해는 골절 등 근골격계 손상(67.5%)부터 각막 손상 및 안구돌출 등 안과 병변(47.3%), 뇌진탕(41.4%), 폐출혈(33.7%)까지 다양했습니다. 성(性) 학대 범죄가 의심되는 생식기나 항문 손상 사례(2.4%)도 있었죠(복수 응답). 또 학대 의심 동물 중 20%는 결국 사망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학대로 인한 동물 피해가 심각한데도 175명 중 신고를 한 수의사는 11명(6.3%)에 그쳤습니다. 신고하지 않은 이유로는 “보호자와 갈등 유발을 원하지 않아서”라는 응답이 57.4%로 가장 많았고, “신고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라는 응답이 45.1%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러한 수의사들의 미신고 이유는 단순한 우려가 아닌 현실이었습니다. 수의사가 신고한 11건 학대 의심 사례 중 가해자가 벌금형 처벌을 받은 경우는 1건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이 밖에 “신고가 가능한지 몰라서”(24.7%), “어디로 신고해야 할지 몰라서”(22.2%) 등 학대 의심 동물을 진료하게 됐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수의사도 적잖았습니다.



    영국·미국은 구체적 가이드라인 제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신고한 수의사에 대한 법적 보호 장치를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동학대의 경우 ‘아동학대처벌법’에 따라 신고인의 정보가 보호됩니다. 신고인의 인적사항 또는 신고인임을 미루어 알 수 있는 사실을 다른 이에게 알려주거나 공개 또는 보도하면 3년 이하 징역, 3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죠. 또한 아동학대 신고자에게 신분 상실에 해당하는 불이익을 주면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이 부과됩니다. 반면 수의사는 현행 ‘동물보호법’에 따른 동물학대 신고 의무대상자이지만 신고자를 보호하는 법적 장치가 없고, 신고하지 않았을 때 처벌할 조항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선 수의사에게 신고를 강요할 수 없지 않을까요.

    ‘학대 의심 동물 진료 시 대응 가이드라인’도 마련해야 합니다. 한국과 달리 해외에는 학대 의심 동물을 진료하게 됐을 때 수의사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있습니다. 영국 링크그룹은 ‘동물과 인간학대 의심: 동물병원 종사자를 위한 가이드북(suspect abuse of animals and people: Guidance for the veterinary team)’을 통해 동물학대가 의심될 때 질문(Ask·A), 공감(Reassure·R), 문서화(Document·D), 보고/신고(Report, R) 등 ‘ARDR 절차’로 대응하라고 권합니다. 미국수의사회(AVMA)도 ‘학대 및 방치가 의심되는 동물 발견 시 수의사의 효과적인 대응을 위한 지침(Practical Guidance for the Effective Response by Veterinarians to Suspected Animal Cruelty, Abuse and Neglect)’에서 유사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책 ‘동물학대의 사회학’. [책공장더불어 제공]

    책 ‘동물학대의 사회학’. [책공장더불어 제공]

    이 같은 조건에서라면 동물병원 수의사를 통한 동물학대 조기 발견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책 ‘동물학대의 사회학’에 따르면 동물학대와 인간 폭력은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동물학대 범죄를 저지른 이가 추후 사람을 상대로 범죄를 일으킨 사례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희대의 살인범 유영철은 “개를 상대로 살인 연습을 하며 범행도구를 결정했다”고 말했고, 강호순도 “개를 많이 잡다 보니 살인도 쉬웠다”고 진술한 바 있죠. 동물학대를 조기에 발견하고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영유아 검진 및 병원 진료 과정에서 아동학대 사건이 다수 확인되는 것처럼, 동물병원이 동물학대 사건의 초기 신고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책적 보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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