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때보다 위트 넘치는 윤여정의 2009년 입담

•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한국 배우 최초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74). 위트 있는 수상 소감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은 그. 2009년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종영 직후 배우 윤여정과 진행한 ‘여성동아’ 인터뷰에서도 그런 매력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인터뷰에는 이번 수상 소감에 언급한 두 아들, 스크린 데뷔작 ‘하녀’의 김기영 감독에 대한 내용, 인생 철학까지, 오스카 수상 소감보다 위트 넘치는 윤여정의 입담이 가득하다. 윤여정이 왜 ‘쇼스틸러’인지 느껴보시길. <편집자주>

윤여정이 4월 2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고 활짝 웃고 있다. [뉴시스]

윤여정에 대한 첫 기억은 90년대 초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홍은동입니다”라며 전화를 받던 모습이다. 누구나 다 하는 “여보세요”가 아니었다. 엄마를 맡아도 그냥 평범한 엄마가 아니라 자기주장이 강하고 모던한 윤여정. 철없는 주부(드라마 ‘목욕탕 집 남자들’)도, 바람난 시어머니(영화 ‘바람난 가족’)도, 까칠한 여배우(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도 그가 하면 인생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듯해서 가슴이 휑하다.

“내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홍보한들 사람들이 믿어주겠어요?”

‘그들이 사는 세상’을 집필한 노희경 작가는 최근 펴낸 수필집에서 “‘미친 년, 이 자식아’ 하는 막말조차도 윤여정의 입을 통해 뱉어지면 아픈 위안이 되거나 쓸쓸한 인생에 대한 정의가 된다”고 했다. 좀처럼 인터뷰를 하지 않는 그와 우여곡절 끝에 2009년 서울 강남 에르메스 카페 마당에서 마주 앉았다. 장소 섭외는 그가 했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가 사진까지 찍는 조건으로 인터뷰 장소를 제공하는 건 이례적이네요.
“여기 지사장님을 잘 알아서… ‘담배를 좀 피워야 되니까 여기서 하겠다’ 그런 거예요.”

에르메스를 즐겨 입나요.
“내가 돈이 많이 생겨서 사치를 하자 그러면 가끔 사죠.”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이후로 윤여정 씨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도 드라마에서 오민숙처럼 까칠한지요.
“내가 이상한 역할을 해서 그러나본데… 난 그런 사람 아닙니다(웃음). 내가 노희경 때문에 아주 미치겠어. 사람을 그냥….”



‘오민숙의 까칠한 면이 실제 윤여정씨의 모습과 비슷하다. 대본 외울 필요 있나,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않나’라는 반응도 있었어요.
“내가 그런 면이 있긴 있어요. 사람이 딱 이런 면만 있진 않잖아요. 그런데 까칠하다는 게 뭐죠?”

편하지 않다, 따뜻하지 않다, 그런 뜻 아닐까요.
“그래요. 편하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사람 사귀는 데 오래 걸려서 그럴 거예요.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는 많이 힘든데 내가 힘들면 상대도 힘들겠죠. 싫은 건 싫다고 말하니까 더 그런가봐요. (드라마에서 오민숙은 자신을 번번이 ‘오민숙 씨’라고 부르는 조연출에게 손짓으로 문밖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한다) 실제로 ‘윤여정 씨, 윤여정 씨’ 하던 조연출이 있었어요. 그래서 ‘윤여정 씨라고 말하는 게 법에 저촉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학교에서 안 가르치는 거라 내가 얘기할게요. 예를 들어 ‘엄마 친구더러 윤여정 씨 그러는 건 좀 그렇죠?’ 그랬더니 자기는 선생님이라 그러는 게 익숙지 않아서 그랬대요. 그 다음엔 같이 드라마도 하고 낄낄거리며 웃고 그랬죠. 노희경 씨가 그 사건을 그렇게 부풀려서 쓴 거예요. 실제로는 그렇게 못해요. 조연출을 쫓아 봐요. 내가 방송국에서 밥 벌어먹고 살겠어요.”

마음을 열면 따뜻한 면도 있죠.
“그렇겠죠. 젊은 사람들은 답답한 게 사람을 흑백으로 나누는 거 같은데 흑백으로 나뉘는 사람은 없어요. 사람이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또 이렇고…. 내가 뭐 아무 때나 까칠하겠어요.”

인터뷰 안 하고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 안하고,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대중과 거의 접촉이 없어요. 혹시 신비주의인가요.
“개뿔 신비주의는. 그 말 어디서 나온 거예요(웃음)? 나는 실용주의예요. 드라마는 내 일이잖아요. 그거는 합니다. 드라마 이외의 일은 귀찮고 몸도 힘들고…. 자꾸 내 얘기해서 뭐하겠어요. 사람들도 별로 남의 일에 관심 없어요. 나도 남의 일에 관심 없거든. 이 쪼그만 나라에서 신비주의는 무슨(웃음)….”

다른 사람들은 싫더라도 필요에 의해서 인터뷰도 하고 오락 프로그램에도 나가지 않습니까.
“글쎄 홍보 때문이라는데 다른 사람들은 인품이 좋은가 봐요. 내가 믿고 있는 건 그 시간에 대사 공부 열심히 해서 연기를 잘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내가 홍보한다고, 나는 이런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라고 그런다고 통하겠어요?”

그러니까 일종의 자신감이군요.
“꿀릴 건 많죠. 열등의식도 많고 인물이 예쁜 것도 아니고 목소리가 예쁜 배우도 아니고 피부가 예쁘지도 않고….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겠죠. 나는 대본을 열심히 하는 데 중점을 두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고, 어느 게 낫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그게 그다지 콤플렉스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젠 시청자들도 익숙해져서.
“그래요? 고마워요. 나는 그거에 너무 한이 맺혀서. 목소리 때문에 거부감 1위 배우로 꼽힌 적도 있고….”

2009년 인터뷰 중인 윤여정. [동아DB]

이화여고를 졸업한 그는 한양대 국문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소위 일류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게 자존심이 상했다. 집에 등록금 달라고 하기도 민망해 아르바이트를 할 요량으로 탤런트가 됐다. 데뷔 초 그는 드라마 ‘장희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고 영화 데뷔작인 김기영 감독의 ‘화녀’로 시체스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다. 그리고 그해 파격적으로 청룡영화제 신인상을 건너뛰고 주연상을 받았다. 이 당시 그의 사진을 보면 볼이 통통한 앳된 소녀 같다. 하지만 이 시절에도 성격은 범상치 않았던 것 같다. 무명시절 방송국에서 신인 10명을 뽑아 석 달 동안 연습을 시킨 뒤 최종 3명을 합격시켰는데 그는 최종에서 떨어졌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당시 여배우로는 드물게 자의식이 강했던 거 같아요. 학창시절 어땠나요.
“자의식이 강하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계셨는데, 내가 그 문제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산수에서 ‘기차는 한 시간마다 출발하고, 전차는 20분마다, 버스는 10분마다 출발한다. 그런데 지금 같이 출발한 시간은 11시 몇 분이다. 다음엔 언제 같은 시간에 출발할까?’였어요. 나는 최소공배수를 내야 된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최소공배수 내야 된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내 의견은 묵살하고 다른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네 생각하기엔 어떠냐’고 그랬어요. 걔가 ‘한 서너 시간 후가 아닐까요’ 그랬죠. 그 일로 난 그 선생님에 대한 신뢰를 잃었어요. 그래서 학교를 안 갔죠. 모범생이던 아이가 학교 안 간다니까 엄마가 며칠 달래보다가 엄마 학교로 전학시켰어요. 엄마가 학교 선생님이셨거든요. 그 선생님하고 싸우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우리 자랄 땐 선생님한테 학생이 반론을 한다거나 그런 건 못했으니까. 어쨌든 만만치는 않았나 봐요.”

그런 일을 다 기억하다니, 기억력이 좋으세요.
“아뇨. 많이 가물가물해요. 이제는 내가 등장인물을 바꾸기도 한대요. ‘그때 내가 이런 말하고 네가 이런 말 했잖니’ 그러면 누구와 누가 바뀌고 그런대요. 나이는 못 당해요. 슬픕니다.”

대학은 국문과에 진학했습니다. 글을 쓰려고 했던 건가요.
“아뇨. 원래 지망했던 대학에 떨어졌어요. 우리 땐 학교 떨어지면 집안 망하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좀 웃겨. 우리 땐 재수가 흔하지 않았어요. 힘들게 재수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일가 중 오빠뻘 되는 사람이 ‘쟤가 글을 잘 쓰지 않나’하면서 자기가 입학원서를 받아다 다 써놨어요. 내가 국민학교 때 백일장에 나가 특선을 했거든요. 그래서 그냥 못 이기는 척하고 (대학에) 갔지.”

당시 한양대 국문과 은사 중 시인 박목월 선생님도 계셨다고 들었어요. 윤여정 씨를 아끼셨다고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운명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소위 일류대를 갔으면 공부에 매진했을 거예요. 이렇게 얘기하면 한양대에서 너무 싫어해. ‘다시 와서 졸업장을 따라’ ‘지금은 정말 좋은 학교다’ 그러는데 그때는 2차 대학이었어요. 1학년 다니는데 수필을 써내라 그래요. 써냈더니 박목월 선생님이 그때 과장 선생님이셨는데 부르시더라고요. 이 수필은 잘 썼는데 방향을 잡아줘야겠다면서 매일 한 장씩 써오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나는 극장 구경도 가고 놀러도 다니고 그랬어야 됐거든요. 바쁜데 매일 한 장씩 어떻게 써내(웃음). 그러다 탤런트 시험을 봤어요. ‘탤런트해서 용돈이라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 엄마한테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부잣집도 아닌데 등록금 달라 그러기가. 나중에 탤런트가 되고 나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저를 기억하시고 아무거나 잘하면 된다고, 배우 잘하라고 그러셨어요. 참 감사했습니다.”

계속 글을 썼더라면 어땠을까요.
“김수현 선생께서 언젠가 그랬어요. 넌 나 쓰는 걸 그렇게 몇 년을 봤으면 흉내라도 못 내니, 넌 안되겠다(웃음).”

한 방송국 탤런트 최종 시험에 불합격한 이유가 ‘인사를 잘 안 한다’였다고요.
“예. 그때는 내가 눈이 나쁜데 안경 쓰는 게 싫었어요. 눈이 더 커 보이고 싶고 예뻐 보이고 싶잖아요. 그래서 안경을 안 쓰고 다녔거든요. 사람이 잘 안 보이니까 인사를 안 했나 봐요. 심사위원이 ‘너는 먼저 사람이 돼고 와라’ 대놓고 그러더라고요. 우린 그렇게 살벌한 시대에 살았다우(웃음).”

영화 데뷔작으로 주연상까지 받았어요. 당시로선 무척 파격이었죠.
“김기영 감독님 덕분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땐 잘 몰라요. 상을 받으면 내가 잘해서 받나 보다 하는데 상은 정말 운이에요. 물론 어떨 땐 정말 잘해서 받을 수도 있지만 90%가 운이에요.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도 나중에 그 내막을 알았는데 따로 내정자가 있었지만 그해에는 특별히 ‘요번에는 정말 심사대로 해라’라는 지시가 있었답니다. 그런 게 운이잖아요.”

톱스타로 계속 그 길을 밟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글쎄, 어땠을까. 지금쯤 와서는 같았겠지만, 인생이라는 게 그렇더라고요. 꼭 과정을 거쳐야 여기로 오게 되더라고요. 우리 다 아는 건데 어떨 땐 좀 (위기를) 건너뛰기도 하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수. ‘쟤는 머리도 좋은데 왜 저러고 살까’ 그러는데 인생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와 있겠죠. 내가 남한테는 시건방지고 까칠해 보이지만 지금 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아끼거든요. 그때 배우를 쭉 했더라면 아마 안 그랬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나는 이런 거 참 싫어. 우리가 그때 안 그랬더라면, 그건 뭐 하나마나 한 이야기죠.”

김수현, 노희경, 인정옥 작가 작품에 많이 출연했어요. 그러고 보면 이들 작가 작품의 캐릭터가 유난히 강렬하게 남아요.
“그 사람들이 인물 표현을 제대로 해줘서 그랬겠죠.”

“인생의 위기는 한꺼번에 오더군요”

윤여정은 인터뷰 약속을 잡기 전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먼저 이혼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겹고 너무 오래전 이야기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민한 그가 그 당시 일을 기억 못할 리 없다. 그 일로 윤여정은 삶이 녹록치 않음을, 만만하게 봤다간 큰코다친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장밋빛 인생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얻은 깨달음이다. 연기 생활을 중단하고 1973년 결혼, 미국에서 살다가 1985년 두 아들과 귀국했다. 현재 두 아들은 각각 컬럼비아대와 뉴욕대를 거쳐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미국 생활 중 그는 김수현 작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향수를 달랬다.

김수현 작가와는 어떤 인연으로 맺어졌나요.
“김수현 선생 데뷔작을 제가 했어요. 그래서 어여삐 보인 거 같아요.”

왜 예쁘게 봤을까요.
“그때 내가 좀 달라보였대요.”

두 분이 어떻게 다시 함께 작업하게 됐나요.
“내가 돌아왔을 때 김수현 선생이 ‘너는 너 혼자서도 윤여정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을 수 있는데 내 것을 함으로써 빽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거고 멍에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해서 안 하기로 약속했어요. 그런데 왜 나를 써줬냐면, 아무도 안 써주니까. 몇 십 년 전 이혼은 거의 주홍글씨였어요. ‘이혼한 여자가 금방 TV에 나오면 안 된다’ 그런 것도 있었고. 요새 사람들은 그런 얘기 하면 알아듣지 못하는데 그런 시대가 있었답니다. 이조시대 같은…. 우리 사회가 뭔가 다른 걸 원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무서워하죠.”

그런 걸 보면 김수현 작가는 마이너에 대한 애정이 있는 거 같아요.
“예. 그런 게 있으시죠. 그때는 정말 날 안 살려주면 안 될 정도로 힘들었어요. 내가 살아야 되는데…. 실용주의인데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요즘 김수현 작가 작품 출연이 뜸한데.
“그러잖아도 그것 때문에 질문을 많이 받아요. 불경죄에 걸렸다는 말도 있고(웃음). 김수현 선생한테 ‘뭐라 그럴까? 내가 까였다 그럴까?’ 그랬더니 ‘얘얘 그러지 마라. 시끄러워진다’ 전화로 그러더라고요(웃음). 김수현 선생이 언젠가 그랬어요. 내가 딴 작가와 작품하는 거 보면서 ‘시집갔다 못살고 돌아온 딸 본인이 재혼시켜서 잘살고 있는 거 같아서 이제는 마음이 놓인다’고.”

요즘도 전화통화를 자주 하나요.
“우리는 전화만 해요. 귀찮아서. 늙어서 사람 만나고 그러는 거 기운 없어요.”

인정옥이나 노희경 작가는 어떤가요.
“두 사람은 개성이 강하죠. 그런데 그 사람들만 물어보니까, 어떨 땐 미안해요. 다른 작가하고도 인연이 많은데 정말로 나를 사랑해주고 존경까지 해준 작가가 있었는데. ‘굳세어라 금순아’를 쓴 이정선이라고.”

‘금순이 할머니’도 좋았어요. 마치 우리 할머니를 보는 것처럼 짠했어요.
“할머니 역할을 어렵게 부탁하더라고요. 그때 내가 50대일 때인데 70대 역할이라 미안해하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괜찮다 했어요. 더 늙으면 대사 못 외워서 못 한다고. 그 드라마가 나한테 의미 있었던 게 내가 증조할머니한테 참 못되게 굴었어요. 할머니 더럽다고, 냄새난다고. 더럽고 냄새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래서 내가 지금도 밤마다 할머니께 용서해달라고 빌어요.”

노희경 작가 에세이 읽었나요.
“읽어보고 ‘희경아. 미안하다. 나는 정말 피곤한 여자구나’하고 사과했어요. 나는 몇 년 전 희경이한테 ‘드라마 참 못 쓴다. 죽어라 못 쓰더만’ 그랬는데, 나문희 씨는 ‘희경 씨는 하늘이 참 사랑하나봐. 큰사람 되라고 시청률 안 주시나봐’ 그랬다잖아요. 나문희 씨는 참 푸근한 분이야. 그런데 나는 그렇게 말했다니…. 이번에 그걸 읽고 미안하다고 했더니 ‘아 그러지 마세요, 선생님. 징그러워’ 그러더라고요(웃음).”

노희경 작가와는 연기자와 작가 이상의 관계인 거 같아요.
“우린 주로 전화로만 통화하니까. 노희경이 전화로 ‘노친네 잘 있어?’ 그러면 ‘노친네 노친네 그러는 거 아냐. 기분 나뻐’ 그러지(웃음). 노희경은 작은데 속이 많이 넓어요.”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명대사가 있다면.
“그건 없어요. 이 나이에 돌아보면 인기 있던 작품은 인기가 있어서 좋았고, 인기 없는 작품은 인기가 없어서 작가도 안됐고. 저라고 그렇게 못 쓰고 싶었겠어요? 오죽하면 그렇게 썼겠수. 그래서 다 기억에 남아요.”

이혼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요.
“몇 십 년을 했더니 나도 지겨워. 나는 내가 그걸 언제 했는지도 잊어버렸거든요. 나는 이제 처녀나 마찬가지야.”

인생의 위기가 있었다면.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때.”

그 외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든가.
“그게 같이 왔죠. 부도나면 교통사고 난다고 그게 같이 와요. 정신이 없으니까.”

지금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좋은 위로의 말들이 많죠. 성경에서 유행가까지. 그런데 내가 위기를 겪으면서 느낀 건 아무 말도 위로가 안됐다는 거. 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견디세요. 견디면 시간이 가더라고요. 그 시간이 약이더라고요.”

그건 진짜 맞는 말이던가요.
“그거는 정말 그렇습디다. 세월이 어떻게 약이 되냐면 사람이 무뎌져요. 그 문제에 대해서. 그게 약인 거 같아. 신이 우리에게 망각이라는 좋은 약을 주셨어요.”

그렇게 한 번씩 어려움을 겪고 나면 그 다음엔 사는 게 좀 편해질까요.
“어떤 사람은 그 어려움이 또 오고 또 오고 그러잖아요. 그게 팔자인가, 성향인가. 나는 같은 실수는 안 하려고 애쓴 거 같아. 나는 ‘나하고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구나’라는 걸 알았어요. 내 안목을 깨닫고 의지로 같은 짓을 안 하려고 노력했어요.”

인생이 순탄하기만 한 사람도 있더라고요.
“있어요. 있더라고. 운 좋아서 그런 사람 많죠. 그렇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런 사람 보면 약 올라서 나 혼자 위로해요. ‘철도 참 없다. 나이가 60인데 저렇게 남편하고 아이밖에 모를까’하고. 그 사람들 우주는 남편하고 아이야. 내가 그 사람들 보고 그러는 건 억하심정이지. 솔직히 부럽죠. 부러워도 아무 소용없으니까 그러면서 스스로 위로를 하는 거죠(웃음).”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셨어요.
“‘훌륭하게’라는 말을 빼야 돼요. 지 밥벌이하고 살아요.”

아이들 키우면서 학교 성적엔 크게 연연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게 상대적이에요. 큰아이는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라 공부하지 말고 ‘자라, 자라’ 그랬는데 작은아이는 또 공부를 너무 안 하는 아이라 ‘해라, 해라’ 그랬어요. 그렇더라고. 큰아이 키울 때는 다른 엄마들이 교육에 대해 뭐라 뭐라 하면 ‘그냥 내버려두세요. 다 알아서 잘할 거예요’ 그럴 정도로 여유로웠답니다. 그런데 작은아이는 한 번은 시험점수를 형편없이 받아와서 내가 다른 집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그 집 아이는 몇 점 받았수’ 물었답니다. 그렇게 돼요(웃음). 그러니 나는 교육관이 ‘뭐 이렇다’라고 내세울 게 없어요.”

예체능이라든가, 남들 가르치는 건 다 가르쳤나요.
“학교 공부밖에 시킨 거 없어요. 워낙 비싼 학교를 다녀서 난 그걸로도 벅찼어요(웃음).”

일하느라 아이들 곁에 많이 있어주지는 못했을 텐데.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아이들을 키웠나요.
“글을 모를 때는 책을 많이 읽어줬지만 그건 남들 다 하는 거고. 내가 생활전선에서 엄마, 아빠 몫을 다했기 때문에 많이 못해줬어요. 그래서 내세울 게 별로 없어요. 내 깐에는 음식을 미리 만들어서 얼려놓고 간다거나 했지만 내가 같이 해서 먹는 것만 못했겠죠. 교육이라는 게 어떤 엄마는 좋은 말 안 하겠어요. ‘얘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 그러겠지만, 아이들이 말을 듣고 배우는 거 같진 않아요. 안 보이는 데서 걔가 나를 볼 거예요. 그걸 배우겠죠. 집안에 책이 많고 엄마가 늘 책을 읽으면 아이도 같이 책을 볼 거예요. 또 교육이라는 게 엄격하게 따지면 아이들 몫이에요. 보세요. 오바마는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훌륭하게 됐잖아요.”

아이들에게 특히 강조한 덕목이 있다면.
“‘너희가 하고 싶은 일 하고 행복하게 살아라. 즐겁게 살아라’라는 거였어요. ‘뭐를 해라, 뭐가 돼라’ 그런 건 없었어요. 모든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변호사가 되고 학자가 될 순 없잖아요. 내 깐에는 아이를 참 자유롭고 너그럽게 키운 것 같았는데 정작 누가 우리 작은아이한테 ‘너희 엄마는 쿨하니까 잔소리도 안 하셨지?’ 그랬더니 ‘왜요? 충고가 많으셨죠’ 그러더라고요. 그건 잔소리가 많았다는 뜻이죠.”

아이들은 미국에서 자리 잡았으니 계속 그곳에서 살겠네요. 많이 보고 싶을 텐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죠. 나도 미국에 살 때 계속 살 줄 알았는데, 지금은 여기 있잖아요. 아이들이 왔다가 돌아갈 때 좀 그렇죠. 우리는 헤어지는 연습을 많이 해서…. 나는 결심을 했어요. ‘혼자되는 연습을 해야겠구나’라고. 자식은 둥지를 떠나야 독립을 하는 거라 생각해서 잠깐 그랬다가 ‘걔네가 나를 필요로 안 하는 게 좋은 거다’라고 주문을 외우죠.”

영화 ‘여배우들’에 출연한 김옥빈, 김민희, 최지우, 고현정, 이미숙, 윤여정(왼쪽부터). [동아DB]

“고현정이 줄 잘못 섰다고 투덜거려”

윤여정은 기사가 자신의 말과 다르게 나가는 것, 예를 들어 ‘감성’이라고 말했는데 ‘감정’이란 단어로 기사화되는 것은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을 일부러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지는 말아달라고 했다. 본 대로 느낀 대로 쓰라는 것이다. 비판받을 각오가 돼 있을 때 인터뷰 자리에 나온다고 했다. 윤여정은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한다. 여배우들이 흔히 빠지는 ‘자뻑’이란 것도 없다. 잘나가던 젊은 시절 이야기도 남 말하듯 덤덤하게 한다. 객관화는 자신의 말마따나 예쁘지도 않고, 목소리도 비호감인 그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비결이다. 자신에게 엄격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날카롭다. 까칠하다, 무섭다는 이미지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도 항상 그의 주변엔 사람이 많다. 최화정, 배종옥, 고현정 등 여배우들이 특히 그를 따른다.

1년에 한 작품 정도 출연하는데, 작품 선택 기준은.
“내가 낯가림을 하기 때문에 일했던 감독이나 작가가 우선이죠. 조금 손해 난다 해도 사람따라 가요. 그런데 결과는 이렇게 오래 일했는데 내가 아는 PD는 KBS에서 두 명, MBC에서 한 명, 그나마 MBC에서 절친했던 PD는 프리가 된 걸 한참 후에 알았어요. 이런 나의 인맥을 보고 고현정이 만날 ‘줄 잘못 섰다’ 그러죠. 사람이 먼저 안 오면 내가 안 했던 역할을 택하려 애쓰고요. 만날 똑같은 엄마를 하면 보는 사람한테도 미안하더라고요.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목소리. 그래서 내 깐에는 다르게 해보려고 애쓰죠.”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죠.
“재주는 젊었을 때 잠깐 눈에 띄는 거 같아요. 정말 나를 유지해주는 건 노력일 거예요. 하물며 베토벤도 미완성본을 보면 형편없대요. 물론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차르트는 하늘이 준 사람이래요. 그런데 나는 내 재능이 하늘이 준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노력해야죠. 더군다나 늙어서 감은 떨어지고….”

작품에 함께 출연했던 송혜교, 현빈을 비롯한 후배 연기자에 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그건 대답 안 할래요. 내가 연기평론가가 아니잖아요. 연기는 오래했다고 잘하는 게 아니에요. 신인 연기자가 더 순수하고 더 맑기 때문에 연기를 더 잘할 수 있어요. 나는 너무 때 묻고 몸에 밴 게 있기 때문에 그거를 내가 안 하려 해도 순간적으로 그렇게 되는 게 많아요. 그리고 걔네들 다 경쟁자라서 뭐라고 말할 수 없어요(웃음). 열심히 하면 다 예뻐요.”

전에는 유호정 씨나 고현정 씨 등 후배들에게 연기에 관한 충고도 많이 했다면서요.
“그것도 이젠 안 하려고요. 사람들은 ‘충고를 좀 부드럽게 하지 그래요’ 그러는데, 부드럽게 하면 잘 못 알아들어요. ‘얘, 거기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어떻게 잘해볼 수 없을까’ 그러면 잘 못 알아들어요, 독하게 말하면 그제야 ‘좀 이상한가’ 생각하는 정도더라고요. 부모가 싫은 소리해도 못 견디는데 남이 그렇게 말하면 뭐가 좋겠어요. 그리고 내 태생이 돌려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태생을 바꿀 수도 없고…. 그러니까 충고하면 항상 후회해. 앞으론 가슴 아픈 충고는 안 하려고요.”

고현정 씨나 배종옥 씨 등 후배 연기자들이 많이 의지하는 거 같아요.
“글쎄, 의지까지는 모르겠고요. 내가 ‘너희들은 내가 왜 좋아’라고 했더니 고현정 왈 ‘밥을 잘 사줘서요’ 였어요. 쉬지도 않고 대답하더라고요.”

연기자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요.
“암기력, 집중력, 관찰력, 임금협상력(웃음). 대사를 완벽하게 암기하지 않으면 연기할 수 없어요. 인물의 성격은 대사로 나오는데, 말이 그 사람을 표현하는 거잖아요. 대사 암기가 안 된 상태에서의 연기는 그 인물이 아니에요. 나인 거지. 집중력? 물론 집중해야 돼요. 관찰력? 많이 보고 느껴야 돼요. 임금협상력? 이거 중요합니다.”

“인생은 이거다 저거다 정확히 나눠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윤여정은 수십 년째 담배를 못 끊고 있다. 주변에서 끊으라고 성화지만 “그걸 끊으면 사는 낙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건강에 해로운 담배를 계속 피우는 걸 보면 진정한 실용주의는 아닌 것 같다고 했더니 “사람이 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지”라면서 웃었다. 그 모습이 고집 센 노인네 같기도 하고, 귀여운 소녀 같기도 하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몸을 아끼는 게 건강관리예요. 무리 안 하고 안 움직이는 거. 타고나길 힘이 세지도 않고 오래 버티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내 몸을 사리느라고 일을 많이 안 해요.”

살이 안 찌는 체질인가봐요.
“그렇죠. 우리 어머니도 몸집이 나만 해요. 나는 말랐다는 말이 참 싫어요. 어깨가 좁아서 잠옷에도 뽕을 넣잖우. 최민수가 ‘잠옷에 뽕 넣는 여자는 처음 봤다’ 그러더라고(웃음). 나는 최화정처럼 볼륨 있는 사람이 부러워요. 여성스럽잖아요.”

집안일도 잘하나요.
“살림할 때는 주부상 타야 할 정도로 잘했어요. 두부도 만들어 먹고….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미국에서 내가 살던 시골은 한국 사람도 없었고 한국 슈퍼도 없어 먹고 싶으면 다 자급자족을 해야 했어요. 커리어우먼이 되면서 안 하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싫어요. 난 아줌마 안 오면 굶어요.”

남자에게는 매력을 못 느끼나요.
“언제부턴가 남자, 여자를 구별 안 하게 됐어요. 그냥 사람으로 생각하지.”

이상형이라고 할 만한 스타일이 있나요.
“생각을 안 해봤네. 아마 남녀문제는 어느 순간 내가 정리해본 건데 생각 없이 동물적으로 끌리는 걸 거예요. ‘똑똑한 여자가 왜 저런 남자를 만났어?’ 그러는 게 이성과는 상관없이 끌리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이상형이 있다 해도 그거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멋있는 남자가 나타나면.
“이젠 안 나타나죠.”

내 인생의 굴욕이라 할 만한 사건이 있나요.
“굴욕 많죠. 최근에도 있었어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을 밟는 조건으로 오라는 거예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주위 사람들하고 상의해서 가기로 했어요. 드레스를 해 갖고 갔는데, 아니 부산까지 가는 데 왜 7시간이 걸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늦어서 이미 레드카펫 다 치우고 뒤로 가라고, 굴욕이지. 뒤로 들어갔는데 앉자마자 끝났어요. 호텔에 와서 일행하고(걔가 자기 이름은 절대 밝히지 말라고 했어요) 둘이 드레스 입고 된장찌개를 먹었잖아요.”

드레스 입은 모습이 화제가 될 뻔했는데.
“드레스 해준 사람은 TV를 보고 있다가 ‘왜 안 나오느냐’고 난리가 났지. 그 다음 날 아이들이 ‘어머,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하더라고. 안 하던 짓 하면 꼭 이렇게 된다니까.”

나이가 들면서 부드러워지는 쪽인가요? 아니면 본인 생각이 더 확고해지는 편인가요.
“이렇게 인터뷰에 나온 게 부드러워진 거예요. 나이가 들면 그런 면이 생겨요. 노희경한테 잘못했다고 반성하는 것도 부드러워진 거죠. 그런데 또 ‘저 사람 아니다’ 싶으면 아집이 딱 생겨요. 잘 모르겠어요. 나만 그런 건지, 미안해요. 확답을 못 줘서. 그런데 이거다 저거다 정확하게 나눠지는 거면 왜 싸움을 하고, 전쟁을 하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다른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또 다르고…. 인생이란 게 다 상대적인 거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