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아닌데 그 정취를 구현한 집 [프리츠커 프로젝트]

파주 K주택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20-04-1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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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K주택. [사진제공=박영채]

    파주K주택. [사진제공=박영채]

    한국 건축계에서 한옥은 ‘계륵’과 같다. 한국적 주거 형태의 원형으로서 한옥에 대한 찬가를 부르는 이는 많다. 그러나 건축가 가운데 한옥을 선호하는 이는 드물다. 현대인이 살기에 불편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지붕 무게로 벽을 눌러 짓다 보니 구조적 안정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건축적 변형을 가하기도 어렵다. 결정적으로 조선시대 건축양식의 답습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창의성 발현에 제한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한옥은 이 시대 건축가들이 극복해야 할 라이벌이다. 좀 더 과장하자면 이 땅의 건축가들에게 살부(殺父)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라고나 할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없는 ‘마당 깊은 집’

    파주K주택(왼쪽). 거실에서 정원을 바라본 풍경. 경사진 지붕 아래 처마와 실내 각서까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제공=박영채, 지호영 기자]

    파주K주택(왼쪽). 거실에서 정원을 바라본 풍경. 경사진 지붕 아래 처마와 실내 각서까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제공=박영채, 지호영 기자]

    조정구 구가도시건축 소장은 이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없어 보였다. 한옥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건 같았지만 기본적으로 한옥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 마당 있는 집에서 자랐고 지금도 서울 서대문 한옥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그의 한옥 사랑에는 구김살이 없었다. 그런 그의 목표는 아비를 죽이지 않으면서 그 좋은 DNA만 물려받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경기 파주시 교하지구 단독주택단지 내 ‘K주택’을 둘러보고 난 뒤 든 생각이었다. 

    K주택의 외관만 본 사람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유럽식 벽돌집 같은데 한옥이라니. 이런 선입견은 집 안에 들어가는 순간 확 바뀐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널찍한 마루가 보이고 바로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청마루 너머로 마당이 펼쳐진 ‘마당 깊은 집’이 따로 없다.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게 시원한 시스템 창호를 설치하되 목조구조 뒤로 숨겨 나무기둥이 늘어선 대청마루 같은 효과를 냈다. 그 창을 열고 정원으로 나서면 목조처마와 그 아래 섬돌 역할을 하는 1.5m 폭의 돌단을 만나게 된다. 햇살과 빗방울을 차단하면서 그 풍광을 내부로 끌고 오는 ‘처마의 미학’을 살린 것이다.

    처마와 차경의 미학을 살린 집

    남향에 들어선 정원에서 바라본 대청마루와 부엌(왼쪽). 한옥의 처마와 섬돌을 현대화시킨 구조.  [지호영 기자]

    남향에 들어선 정원에서 바라본 대청마루와 부엌(왼쪽). 한옥의 처마와 섬돌을 현대화시킨 구조. [지호영 기자]

    정원 바로 앞에 집이 있긴 하지만, 다양한 꽃나무가 심긴 정원 풍경이 고스란히 1층 거실과 안방, 부엌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주변 경치를 집 내부로 끌고 오는 차경(借景)의 원리가 따로 없는 셈이다. 



    대들보와 서까래는 없다. 그 대신 경사진 목조지붕을 받치는 각(角)서까래 구조로 비슷한 느낌을 부여했다. 또 일렬로 배치된 거실과 부엌 사이에 목조 벽문(壁門)을 설치해 대청마루의 개방감과 부엌의 안온함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한옥의 다목적 공간 활용의 묘미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예다. 

    신의 한 수는 2층과 연결되는 목조계단이다. 하얀색 석고 외장재를 바탕으로 목조기둥 하나와 그것과 연결된 최소한의 난간만 남겨놓아 제법 큰 한옥에서 발견되는 석조계단의 여유와 운치를 집 내부로 끌고 왔다. 계단 폭을 4계단마다 변화를 준 점 역시 한국적 삶의 리듬감을 부여했다. 육순 넘은 건축주 부부가 계단을 오르내릴 때 쉬엄쉬엄하라는 배려의 산물이었는데, 득의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그로 인해 계단은 확장된 거실 의자도 되고, 휴식 공간도 됐다.

    ‘한옥 2.0’의 탄생

    2층 거실과 침실 공간(왼쪽). 전통 한옥구조로 꾸민 사랑방의 창호. [사진제공=박영채, 지호영 기자]

    2층 거실과 침실 공간(왼쪽). 전통 한옥구조로 꾸민 사랑방의 창호. [사진제공=박영채, 지호영 기자]

    장성한 아들이 쓰는 2층은 1층의 절반밖에 안 되는 공간이지만 통유리를 통해 심학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서재와 독립된 침실을 갖춰 한옥과 또 다른 묘미를 안긴다. 이곳에도 한옥의 요소가 숨어 있으니 서재 위에 자리한 작은 다락방이다. 

    K주택에서 전통 한옥에 가장 어울리는 공간은 1층 사랑방(손님방)이다. 별도의 뜨락을 거느린 이 사랑방은 온돌과 창호지 문은 물론, 외부로 조명이 은은히 새어 나오는 불발기창까지 설치돼 있다. 그 안에 앉아 있노라면 아늑한 한옥에 머무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건축주인 김동겸(64) 씨는 “어린 시절 자란 시골 한옥집 같은 집을 짓자고 아내와 의기투합해 8년간 전국을 돌며 500여 채 집을 둘러보고 난 뒤 조정구 소장을 택했다”며 “이사하던 날 계단참에 앉았는데,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집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것 같아 눈물이 다 나더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집을 ‘한옥 같지 않은 한옥’ ‘현대적 한옥’이라고 표현했다. 전통적 ‘한옥 1.0’에서 진화한 ‘한옥 2.0’의 탄생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벽문을 닫기 전 부엌 공간(왼쪽). 벽문을 닫았을 때. [지호영 기자]

    벽문을 닫기 전 부엌 공간(왼쪽). 벽문을 닫았을 때. [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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