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3

2010.11.22

허 찌르는 블랙유머로 관객 요리

손재곤 감독의 ‘이층의 악당’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10-11-22 09: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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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 찌르는 블랙유머로 관객 요리
    별다른 기대 없었는데 잘 만들어진 영화를 영접할 때면, 평론가는 황무지에서 노다지를 캔 것 같은 심정이 든다. 내게는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이 그랬다. TV용으로 만들어져서일까, 연출은 평이하다 싶었지만 대사와 상황 자체가 주는 웃음은 발군이었다. 영어 강사인 노총각이 첫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알고 보니 사귀는 여자는 이민아가 아닌 이미자라는 기혼 여성이었고, 두 번 결혼해서 두 번 다 남편이 죽은 무서운 시추에이션. 그런데도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이 났다.

    손재곤 감독의 신작 ‘이층의 악당’도 마찬가지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200% 재기발랄하다. 솔직히 최근에 본 한국 영화 중 재미로는 으뜸이었다. 채플린과 히치콕을 섞어놓은 듯한 블랙코미디에 손 감독 특유의 인장이 가득하다고 할까. 일단 손 감독의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사는 남녀의 로맨스를 축으로 한다.

    ‘이층의 악당’에서 주인공 연주는 남편을 잃고 딸 성아와 함께 살며 생활고에 시달린다. 그러던 차에 2층에 세입자가 나타난다. 그가 바로 창인. 그런데 알고 보니 창인은 연주의 남편과 문화재 밀반출을 공모한 전과자이며, 연주네로 이사한 목적도 소리 소문 없이 연주의 남편이 숨긴 20억짜리 청화백자 찻잔을 찾기 위해서다. 그 속내도 모르고 연주는 점점 창인에게 빠져든다.

    손 감독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안아줄 사람을 찾아 세상을 헤매는 신경쇠약 직전, 히스테리의 극치를 보이는 인물이다. 연주가 창인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그가 잘나거나 잘나가는 사람처럼 보여서라기보다는 그녀 주변의 몇 안 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에 빠진 그녀가 신경정신과 의사를 위시하며 세상에 바라는 것은 ‘경청’이지만 세상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니, 그녀는 짜증만 난다.

    집이라는 특정 장소에 값비싼 문화재를 숨겨두고 엎치락뒤치락 소동극을 벌이는 연주, 창인, 성아 세 사람의 이야기는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손 감독의 손에서 다양한 주제와 장르의 변주를 거친다. 일단 연주의 딸 성아는 어렸을 때 우유모델을 했는데, 끊임없이 예뻐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주변에 벽을 쌓고 살아간다. 연주 역시 창인과 관계를 맺고 처음 하는 소리가 “나 직장에 나가지 말까?”다. 가부장제 밖에서 다시 가부장제 안으로 진입하고 싶어 하는 여자의 속마음을 창인이라는 악당이 은근슬쩍 받아주지만 그의 속내는 따로 있는 형국. 손 감독은 관계에 대한 ‘오해’를 지렛대로 관객들의 허를 연속으로 찌르며 진한 블랙유머를 뿌린다.



    특히 무성영화 시대의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지하실 장면. 찾는 보물이 지하실에 있는 줄 알고 잠입한 창인이 부지불식간에 연주가 지하실 문을 잠가버리는 바람에 꼼짝없이 갇히게 되면서 벌어지는 필사의 탈출극은, 문이라는 간단한 설정 하나만으로 감독이 얼마나 관객을 신명나게 요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 영화의 백미라 할 만하다.

    그러면서도 ‘이층의 악당’은 사회 풍자적이다. 여자 둘이 사는 집에 사내가 들어왔다며, 윗집의 호기심 많은 노파는 틈만 있으면 아랫집을 훔쳐본다. 이러한 장면은 히치콕 감독이 영화 ‘이창’에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맞은편 집의 악당을 훔쳐보게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런 우스꽝스러운 풍광조차 동네 전봇대에 딸린 CCTV가 지켜보고 있다. 오갈 데 없는 시선의 그물에 갇힌 주인공들은 거대한 관음의 세상에서 20억 원짜리 다기를 찾아 헤매지만, 다기는 결국 큰 의미 없는 맥거핀(영화 초반부에 중요한 것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일종의 속임수)일 뿐.

    영화 ‘닥터 봉’ 이후 근 15년 만에 만나 연기 앙상블을 이루는 김혜수, 한석규의 관록의 연기를 다시 보는 것도 즐겁다. ‘이층의 악당’은 근자에 보기 드문 시간도둑 구실을 톡톡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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