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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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전이와 김일성의 ‘특별한 인연’

  • 입력2007-06-07 1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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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전이와 김일성의 ‘특별한 인연’

    청년 시절의 김일성(왼쪽).

    “그리운 전우여, 당신을 반세기나 찾았다네.”

    북한의 고(故) 김일성 주석은 1994년 5월6일 저녁 평양 초대소에 방금 도착한 중국의 항일투쟁 동지 후전이(胡眞一·여·당시 74세)에게 전화해 반가움을 표했다. 옆에서 통화내용을 듣던 조선노동당 당사(黨史) 연구소 김모 부소장이 깜짝 놀라며 “주석님이 외국인에게 직접 전화를 건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김 주석의 ‘특별대우’는 다음 날 열린 주석궁의 연회에서도 이어졌다. 두 사람의 반세기 인연을 처음 보도한 ‘충칭(重慶)시보’는 “후씨는 김 주석 앞에 앉아서 얘기할 특권을 누리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전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3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항일투쟁을 하던 김 주석은 7명의 전우가 일본군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자 당시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 경찰국 부국장이던 차이스롱(柴世龍)에게 구출해달라고 부탁했다. 차이 부국장은 궁리 끝에 조선인 독립투사 7명을 빼줬지만 일경(日警)에 쫓겨 해외로 도피했다. 1931년 9월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동지들을 규합해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이후 그와 김 주석은 서로 도와가며 동북3성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이 집중 공세를 벌이자 둘의 부대는 많은 시련을 겪었다. 두 사람의 목에는 수만 냥의 현상금이 걸렸다. 이때가 바로 후씨가 막 동북항일연군에 가입한 시기로, 후씨는 일본군과의 전투에 여러 번 참가했다. 아내가 사망해 혼자 지내던 차이 부국장은 1936년 주위의 권유로 젊은 여성 전사인 후씨와 결혼했다. 당시 차이 부국장은 42세, 후씨는 16세 소녀였다. 1937년 어느 날 차이 부국장은 김 주석을 집으로 데려와 후씨를 소개했다.



    1939년 일본군은 동북항일연군의 토벌작전을 크게 강화했다. 1941년 1만여 명의 동북항일연군은 소련 땅 하바로프스크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차이 부국장과 김 주석 일가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 차이 부국장은 얼마 뒤 당의 비밀 지령을 수행하다 병사했다. 1945년 패퇴하는 일본군을 좇으며 국내로 진공하면서 김 주석 일가와 혼자 된 후씨는 이별을 고했다. 이후 그들은 반세기 동안 만나지 못했다.

    김 주석은 후씨를 열심히 찾았지만 충칭까지 내려간 그를 찾기는 어려웠다. 1994년 북한의 선양(瀋陽) 영사관은 우연히 후씨를 찾았고, 평양에서는 곧바로 후씨 모자를 초대했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후씨가 평양을 떠난 지 한 달 조금 지나 김 주석이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중국 언론은 얼마 전 이 소식을 전하며 “후씨는 김 주석이 반세기 이상 ‘첸과(牽팓·마음을 놓지 못하고 걱정 근심한다는 뜻)’한 유일한 여인”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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