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0

2011.08.16

트빌리시서 거리공연 후 온천서 묵은 때 벗기다

프로메테우스의 산, 캅카스

  • 김은열 독도레이서 www.facebook.com/dokdoracer

    입력2011-08-16 12: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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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빌리시서 거리공연 후 온천서 묵은 때 벗기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죄로 산 정상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형벌을 받은 신화 속 비극의 영웅. 그가 묶였다는 코카서스 산의 다른 이름은 ‘캅카스’다. 해발 5000m 이상의 높고 험준한 산이 즐비한 캅카스 지역은 신화의 무대로 등장할 만큼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터키를 떠난 독도레이서가 향한 곳이 바로 이 캅카스 3개국 중 하나로, 우리에겐 아직 그루지야로 익숙한 조지아다.

    이스탄불을 떠나기 직전, 정체 모를 괴한이 차 뒤 유리창을 박살 낸 불상사가 가뜩이나 다사다난했던 터키 일정의 대미를 장식했다. 눈물을 흩뿌리며 차 수리에 ‘거금’ 730리라를 쏟아부은 우리는 조지아에 가까워질수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터키까지는 워낙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국가라 정보도 많고 외국인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지금부터 향하는 국가는 과거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던 터라 대부분 개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여행 정보가 부족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위험 지역으로 분류된 곳도 많다. 당장 첫 관문인 조지아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애용해온 구글 맵에서 상세 지도를 검색할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생각보다 안전하고 따뜻한 조지아

    더구나 캅카스는 50여 개 민족이 뒤섞인 분쟁지역이다. 별칭이 ‘민족과 언어의 산’ ‘화약고’라니 이만하면 말 다한 셈. 유럽과 러시아, 중동을 연결하는 곳이어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데다 석탄, 철광석, 석유를 비롯한 풍부한 자원까지 보유한 이 지역에 바람 잘 날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2008년 8월 조지아에서 독립한 남오세티야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조지아가 닷새 동안 벌인 전쟁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쟁 후 조지아는 국명조차 러시아식인 그루지야에서 영어식인 조지아로 바꾸고 TV와 라디오에서 러시아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소련의 지배를 받던 과거를 부지런히 청산하는 중이다.

    마음속 불안과 설렘이 뒤섞인 채 조지아로 들어가는 길. 입국 과정에서 막무가내로 돈을 요구하는 험상궂은 장정들을 지혜롭게 따돌리고 국경을 통과한 것까진 좋았으나 바로 다음 순간 우리는 모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당황해야 했다. 문제는 낙후된 거리나 구(舊)소련의 잔재가 아니었다. “간판을 읽을 수가 없어!” 지금껏 돌아다닌 16개국 중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마법의 문자’,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꼬불꼬불 장식이 많은 이 ‘음케드룰리’는 조지아 고유의 문자다. 옛 소련 국가가 러시아어와 문자나 문법이 전혀 다른 자국어를 쓰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라고 한다.



    첫날부터 우리를 ‘한 방 먹인’ 나라답게 조지아에서의 열흘은 외부의 얄팍한 정보로는 예상할 수 없던 반전으로 가득했다. 한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수도 트빌리시를 돌아다니며 느낀 점은 치안이 생각보다 훨씬 안정돼 있다는 것. 거리 곳곳에 경찰이 배치돼 있고, 낯선 동양인을 신기하게 쳐다보긴 했지만 적대감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쓰던 30대 이상의 세대는 여전히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최근 친미 정책으로 돌아선 까닭에 영어를 쓰는 사람도 늘고 있다. 웬만한 가게에는 영어나 러시아어를 곧잘 하는 점원이 한두 명쯤은 꼭 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조지아는 예상보다 외국인이 살기 좋은 나라고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기간산업이 빈약하고 내수가 부족한 탓에 외자 유치만이 살 길이라서 외국인 친화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 최근 대통령의 해외순방이 잦아진 것은 물론, 규제를 대폭 완화해 외국인의 무역과 사업을 권장한다. 전 세계 곳곳에서 트빌리시로 직항하는 항공편을 확충해 외국인의 접근성을 높이는 등 눈물겨운 노력 덕에 조지아를 방문하는 외국인 수는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바로 그 외국인 가운데 일부인 독도레이서 역시 조지아에서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트빌리시 구시가지에서 동방정교회 교회를 방문해 느낀 이국적 분위기도 좋았지만,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북쪽으로 차를 몰아 트레킹에 나섰던 ‘신들의 영역’ 캅카스의 풍광이다. 트레킹 베이스캠프인 게르게티 마을로 향하는 길, 도로를 점거한 우공(牛公) 사이에 갇혀 쩔쩔매다 또 급격한 커브 길에 기겁하다 보니 어느새 산꼭대기 만년설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 하나 없이 헐벗은 산은 뾰족한 세모꼴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 좀 더 자세히 보면 연두색 벨벳을 그대로 펼쳐 놓은 듯한 풀밭과 지표면에 드러난 암석,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어우러져 피부와 뼈, 혈관으로 이뤄진 생명체를 연상케 했다.

    트빌리시서 거리공연 후 온천서 묵은 때 벗기다

    캅카스의 험준한 산맥 앞에 선 독도레이서 대원들.

    수많은 편견 깨고 여행 묘미 만끽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 태양을 머리 위에 얹고 마을 뒤로 난 등산로를 올랐다. 해발 2200m 지점에는 조지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교회라는 츠민다 사메바 교회가 있다. 만만치 않은 경사를 오르며 몇 번이나 미끄러지고 햇빛을 피해 쉬다 가다 하는 사이 어느새 정상에 도달했다. 등 뒤에 해발 5044m에 달하는 카즈베크 산을 업고 굽어보는 방향 저 멀리가 바로 체첸 지역이다. 교회의 독특한 외관과 성화로 장식한 내부를 감상하고 약수터의 시원한 물을 만끽한 뒤 새로운 각오를 다지며 산을 내려왔다.

    조지아의 또 다른 명물은 트빌리시의 온천이다. 사실 이 도시가 조지아 왕국의 수도가 된 데는 온천과 관련한 재미난 일화가 있다. 바크탕 고르가사리 왕이 통치하던 시절, 사냥에 나선 왕이 활로 새를 맞혀 떨어뜨렸는데 당연히 죽었어야 할 새가 온천에 빠지자 어느새 상처를 회복해 날아가버렸다고 한다. 이 장면을 목격한 왕은 이 지역 유황온천의 약효가 뛰어난 것을 알고 수도를 옮겼고, 이후 ‘따뜻한 땅’이란 뜻의 트빌리시는 지금까지 조지아의 수도로 남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찌 가만있을 수 있나. 트빌리시에서 거리 공연과 홍보활동을 끝낸 독도레이서 대원은 조지아를 떠나기 전날 구시가지의 온천을 찾아가 묵은 때를 벗겨냈다. 출국한 지 150여 일 만에 처음으로 간 온천이었다. 여정이 5개월을 넘기면서 몸도 마음도 지친 우리는 죽은 새도 살려냈다는 트빌리시의 온천에서 목욕재계하며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앞날이 걱정됐던 조지아에서 오히려 뜻밖의 선물을 한 아름 얻어가는 셈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매체의 발달로 세계 각지의 정보가 홍수처럼 범람한다. 그럼에도 직접 뛰어들어 발품을 팔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게 마련이다. 위험하고 불편할 것이라 예상했던 조지아에서 열흘을 머무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편견을 깨고 여행의 묘미를 만끽했다. 아마도 이곳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지구촌 어디를 가든 선입견에 휘둘려 피하지 말고 직접 거리로 나서서 세상과 사람을 만나보라는 깨달음이 아닐까.

    * 독도레이서 팀은 6개월간 전 세계를 여행하며 아름다운 섬 ‘독도’를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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