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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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라덴 사살 ‘리얼 드라마’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제로 다크 서티’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3-03-11 10: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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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마 빈라덴 사살 ‘리얼 드라마’
    “당신 예전 상관이 이라크에 WMD(Weapons of Mass Destruction·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거짓말했을 때 제가 그 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그때는 사진이라도 있었는데 말이죠.”

    “물론 당신 말을 인정하고 그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당신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군요. 어떻게 위험요소를 감지할 수 있다는 거죠? 해보지도 않고 말입니다. (다 잡은) 빈라덴이 당신 손가락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습니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 영화 ‘제로 다크 서티’에서 오사마 빈라덴 사살 작전을 실행에 옮기기 전 백악관 고위 관료와 미국 중앙정보국(CIA) 파키스탄 본부장이 나눈 대화 내용이다. 영화 주인공인 CIA 여성요원 마야(제시카 채스테인 분)는 어렵게 추적한 끝에 빈라덴 수하의 연락책임자 소재를 파악하는 데 성공하고, 그의 활동범위 안에 있는 파키스탄 아보타바드 지역 대저택을 타깃으로 지목한다. 하지만 빈라덴이 숨어 있을 개연성은 크나 물증은 전혀 없는 상황. 백악관은 증거를 요구하고, CIA는 정황을 내세운다.

    백악관 고위 관료와 CIA 파키스탄 본부장의 대화 전 나오는 회의 장면에선 양측이 이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당신들(CIA)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숨어 있는 사람이 신원 미상 알카에다 고위 간부일 확률 40%, 사우디와 거래하는 마약상일 개연성 35%, 쿠웨이트 무기 밀매업자일 확률 15%…. 빈라덴일 수도 있지만,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CIA 여성요원 결국 임무 성공

    백악관 측 주장에 대해 CIA는 “억류자 프로그램이 중단되면서 이를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소송을 준비 중인 관타나모 수감자에게 한 번 물어볼까요?”라며 항변한다. 관타나모 미군기지는 2011년 9ㆍ11테러 직후 미국 부시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테러 용의자 및 테러 조직 관련 용의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 가둔 쿠바 내 미국 사법 관할지역이다. 억류자 프로그램은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수용된 포로들을 심문해 빈라덴 소재와 국제 테러조직 정보 및 계획을 추적하는 것. 미군은 테러범죄 가담이 전혀 확인되지 않은 소년과 노인, 여성 등 일반인까지 무차별적으로 체포하고 수용한 뒤, 잔학한 고문과 인권유린을 자행해 국제적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결국 2008년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는 관타나모 미군기지의 점진적 폐쇄를 포함한 개선 계획을 내놨다. 영화 속 CIA 파키스탄 본부장의 항변은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후 고문 등 테러 용의자를 심문할 수 있는 억류자 프로그램이 없어져 빈라덴 추적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토로한 것이다.

    결국 백악관은 정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CIA 측 확신만 믿고 빈라덴이 은신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저택에 대한 공격을 허락한다. 그리고 결과는 실제 그대로다.

    2011년 5월 1일 미국 특수부대원 24명과 CIA의 공조로 빈라덴은 사살됐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던 영화 속 ‘그 집’에서였다. 무리한 추측이 한 번은 실패했지만, 한 번은 성공한 것이다. ‘화학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이라크 침공 명분은 거짓으로 판명 났지만, 9ㆍ11테러 원흉으로 지목해 추적했던 빈라덴 소재는 확증 없이 습격했음에도 결과적으로 타깃을 명중시켰다.

    ‘제로 다크 서티’는 미국이 저지른 두 가지 원죄와 그에 따른 트라우마에 대한 힐링이자 면죄부처럼 느껴진다. 미국은 9ㆍ11테러 이후 감행한 명분 없는 이라크 침공과 ‘테러와의 전쟁’ 일환으로 설치한 관타나모 미군기지에서의 인권유린으로 세계적인 비난에 휩싸였고, 이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원죄이자 트라우마가 됐다. ‘제로 다크 서티’는 미국이 9ㆍ11테러 원흉으로 지목한 빈라덴 사살 작전을 리얼하게 스크린에 재현함으로써 결국 미국이 그동안 벌인 ‘테러와의 전쟁’을 영화적 방식으로 사후 승인한다.

    오사마 빈라덴 사살 ‘리얼 드라마’
    ‘팍스 아메리카나’ 윤리적 정당화

    ‘제로 다크 서티’는 157분에 이르는 긴 상영시간 동안 제법 복잡한 정보전과 대테러작전을 그리지만, 이야기 줄기는 단순하다. 빈라덴을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한 CIA 여성요원이 결국 임무에 성공한 과정인 것이다. 정보수집과 첩보전에 유능한 것으로 정평이 난 요원 마야는 9ㆍ11테러 직후 억류자 프로그램에 투입돼 빈라덴 은신처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실마리를 추적해간다. 잔학한 고문에도 입을 굳게 닫은 테러조직 관련자들,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증언 속에서 빈라덴 종적은 갈수록 묘연해진다. 그러던 중 병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투석 장비를 요구하는 한 알카에다 요원으로부터 중요한 단서를 얻은 마야는 미리 파키스탄 내에 심어둔 적진 정보원과 거래를 시도한다. 하지만 이 작전은 함정으로 드러나고, 알카에다의 자폭 테러로 마야는 가장 친한 동료를 잃는다. 빈라덴을 향한 증오와 집착이 더해가는 가운데 마야는 목숨을 건 작전 끝에 빈라덴 수하의 소재를 확보하고, 이를 근거로 CIA 수뇌부와 백악관에 타깃 공격 허락을 요청한다.

    엄밀한 취재와 자료에 바탕을 두고 미국이 10년간 펼친 빈라덴 추적 프로그램과 2011년 5월 1일 사살 작전을 리얼하게 재현한 이 영화는 스릴러로서의 긴장감과 전반적인 완성도가 만족할 만하다. 요약하자면 뛰어난 CIA 여성요원이 백악관의 안이한 태도와 CIA의 관료적 분위기 속에서 집념을 이루는 ‘영웅 드라마’다. 영화 초반 미국 측의 테러 용의자 고문을 적나라하게 그리는 등 정치적으로 중립적 처지에 서서 사태 추이를 건조하게 묘사하는 듯싶지만, 그것 역시 ‘팍스 아메리카나’의 윤리적 정당화에 이바지한다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제목 ‘제로 다크 서티’는 ‘자정에서 30분이 넘은 시각’이자 ‘미국 특수부대가 오사마 빈라덴 은거지에 당도한 시간’ 혹은 ‘하루 중 가장 어두워 타깃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때 침투하는 시각’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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