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마지막 주 미국 국민과 전 세계 이목이 워싱턴 정가로 쏠렸다. 과연 오바마 행정부와 공화당 주도의 하원이 극적 타협을 통해 재정지출 일괄 자동삭감 사태를 막을 수 있을지가 초미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재정절벽(fiscal cliff)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상황으로 미국 경제와 지구촌 시장이 초긴장 상태에 빠졌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 것. 이번에는 미국 연방정부 예산법에 포함된 기술적 조항인 이른바 시퀘스터(sequester) 차례였다.
발음조차 어려운 이 단어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시절 재정적자 축소를 위해 잠시 도입할 뻔했던 시퀘스터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존 베이너 하원의장(공화당)이 2011년 여름에 이룬 타협안 일부다. 당시는 연방 재정적자 상한선을 늘리지 않으면 미국 정부가 파산에 이를 수 있었던 시점. 공화당이 주도하는 하원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재정적자 상한선을 양보하는 대신 약속을 하나 받아냈다. 향후 큰 폭의 재정적자 축소안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10년간 총액 1조2000억 달러 규모의 재정지출을 자동적, 일괄적으로 삭감해 재정적자를 해소한다는 일종의 족쇄였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시퀘스터 조항이다.
그나마 2013년 1월부터 작동하기로 돼 있던 시퀘스터 규정이 지난해 12월 재정절벽을 모면하려고 벌인 양당 타협으로 유예기간 두 달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두 달간 오바마 대통령은 “시퀘스터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국민을 안심시키는 데만 급급했다. 공화당 하원 지도부 또한 “해결책은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 상원에 달렸다”며 거의 손을 놓아버렸다. 그러나 2월 마지막 주 이르러 막판 타협은 끝내 실패했고, 3월 1일자로 올해만 850억 달러에 이르는 재정지출 자동삭감 조항이 발효됐다. 2014년부터 2021년까지 정부 재정지출이 매년 1000억 달러 조금 넘는 액수만큼 삭감되는 조치 역시 궤도에 올랐다.
시퀘스터를 포함한 예산조정법이 2011년 8월 미국 의회를 통과했으니, 따져보면 1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워싱턴 여야 지도부는 모두 팔짱만 끼고 있었던 셈이다. 정치인들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일단 해놓은 뒤 막상 합의에 실패하자 책임은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와중에 그 실패 부메랑이 미국 국민에게 날아 돌아온 것이다.
미국 국민에게 날아든 부메랑
물론 시퀘스터가 실물경제에 미치는 파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먼저 워싱턴 정가의 이전투구에 이골이 난 세계 각국 주식시장은 시퀘스터 발효 후에도 잠잠한 편이다. 미국 다우존스지수는 오히려 최고치를 경신하며 3월 5일 화요일 장을 마감했다. 군사비 삭감 등 정치적 부담을 더 크게 짊어지게 될 공화당 의회가 조만간 시퀘스터 작동을 정지시킬 타협안을 제시하리라는 분석도 있다. 4월 이후에나 미국 국민이 재정지출 삭감 여파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올 한 해 미국 사회 전반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정부예산 삭감분을 꼼꼼히 따져보면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 않다. 먼저 국방비가 427억 달러 줄어드는데, 여기에는 35억 달러 규모의 해군과 공군 항공기 구매 취소, 135억 달러가 필요한 군사훈련 연기, 군사연구비 63억 달러 삭감이 포함됐다. 또한 287억 달러가량의 국내 예산이 감축되며 국립보건원 16억 달러, 질병통제센터 3억 달러 지원도 함께 중단된다. 공항 안전·경비 예산, 국경수비대 예산, 재난관리청 예산, 항공우주국 예산 등에서도 정부 지원금 일부를 삭감한다.
근본적 질문은 1789년 이래 210여 년을 훌쩍 넘는 민주주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정치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기에 이 같은 파국을 막지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 타협과 협상 전통을 자랑하던 워싱턴 정가의 오랜 불문율이 끝내 작동하지 못했다는 점은 이를 일회성 사건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미국 정치는 과연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퇴보는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먼저 미국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친 보수 대 진보 간 양극화 현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맡아야 할 구실이 어디까지냐’는 논쟁을 핵심 축으로 하는 정당 양극화는 물론 미국 정치사에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1880년대 공화당과 민주당 간 무한 경쟁은 현재 수준보다 더 심각했고, 극소수이던 무당파는 ‘비겁한 겁쟁이’라 불리며 사회에서 따돌림당할 정도였다.
보수 vs 진보 양보 없는 대립
미국 정치에서 큰 줄기만 놓고 볼 때 1896년과 1932년, 1964년과 1994년 등 대략 30~40년 주기로 소위 ‘새 판 짜기 선거(critical elections)’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워싱턴은 정국을 주도하는 대통령과 다양한 세력이 공존하는 의회가 서로 협력해 중요한 개혁 과제를 이뤄왔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012년 대통령선거(대선)는 ‘최초 흑인 대통령의 재선 성공’이라는 점 말고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는 평년작 선거였다. 2010년 중간선거 이후 하원에서 양당 의석 비율이 거의 그대로라는 점, 오바마와 롬니의 전국득표율 차이가 51%대 48%로 약 3%p에 불과하다는 사실 등이 이를 방증한다.
한마디로 롬니 후보의 미숙한 선거운동과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쏟아진 공화당에 대한 반감에도,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유권자 몰표로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미국 국민의 평가가 그다지 후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양쪽으로 갈라선 채 중도층은 날이 갈수록 소수화하는 상황, 이것이 바로 지금 미국 정치가 맞닥뜨린 양극화 현상의 골자다. 상대편 주장이나 관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 태도가 전체 국민에게 확산되는 셈이다.
이러한 극단적 흐름이 자리 잡은 이유로 양당 소속의원들이 이념적으로 갈라섰다는 점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다. 호불호가 분명할 수밖에 없는 낙태나 동성애자 결혼 등 사회·문화 이슈가 쟁점으로 떠오른 점, 선거구 조정으로 온건파 정치인이 대거 유탄을 맞고 소멸했다는 점도 함께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눈여겨볼 것은 중도층 참여율이 저조한 연방의회 예비경선 제도의 맹점과 함께 이념편향적 케이블 뉴스채널,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뉴미디어 영향력이 전체 미국 사회를 휩쓸고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인 미치 매코넬 상원의원과 공화당 지도부 일원인 존 코닌 상원의원은 2014년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다. 민주당 오바마 대통령과 조금이라도 타협한다면 내년 상원 예비경선 과정에서 곧바로 퇴출될 개연성이 높다. 이들이 ‘세금 인상 결사반대’라는 공화당 강령을 조금이라도 어긴다면 보수 이념으로 똘똘 뭉친 뉴미디어와 이익집단은 이들을 낙마시키려고 엄청난 자금과 조직을 동원할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예비선거는 투표율이 낮기 때문에 이들 소수 강경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예비선거에서 후보 자격을 얻지 못하면 본선에는 나가보지도 못한 채 의원직이 날아가는 것이다.
오바마의 비전 제시 역부족
지난해 선거에서 ‘원칙 없는 정치인’으로 찍혀 강경 보수파 그룹의 타깃이 된 인디애나 출신의 리처드 루거 상원의원이 대표적 사례다. 예비경선에서 맥없이 탈락한 그는 30년 넘게 이어온 의정생활을 한순간 불명예스럽게 마감해야 했고, 그 결과 한국은 대표적 친한파 상원 외교위원장을 잃었다. 워싱턴 정치 극단화가 바다 건너 불구경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더는 선거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오바마 대통령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혼자 힘으로 이런 양극화 현상을 누그러뜨리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2월 말 “나는 대통령이지 독재자가 아니다”라며 의회 내 반대세력을 성토하던 오바마 모습은 일견 유권자 마음을 살 만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뭔가 달라야 한다’고 기대하는 게 미국 유권자 다수의 정서인 것 또한 사실이다.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한 상원에서도 결집을 끌어내지 못하는 그에 대한 실망감이 크다.
비록 오바마 대통령이 부자 증세를 골자로 하는 단기 전략을 꺼내 들긴 했지만, 앞으로 미국 사회를 어떻게 이끌어나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 제시에는 철저히 실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바마가 잘해서라기보다 롬니가 싫어서 재선에 표를 던져준 상당수 유권자가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멋들어진 당선 인사 웅변술만으로는 국민을 감동시켜 ‘위대한 미국’ 재건을 견인할 정치적 원동력을 찾아낼 수 없다. 오히려 내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으로부터 의회를 되찾아오려고 대통령이 먼저 ‘시퀘스터 공화당 책임론’에만 몰두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마저 제기되는 형국이다.
끝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미국 정치 실패가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는 점이다. 사안에 따라 세력을 결집하고 소신껏 표결하는 대신, 여전히 정당 지도부가 정해준 이념논리적 가이드라인에 따라 표를 던지는 국회의원 행태가 그 첫 번째다. 적은 표 차이로 승리한 데다 재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우리 대통령에게서 감동적인 리더십을 느끼기란 더 쉽지 않다.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는 미디어로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을 찾기는 점점 쉬워지지만, 그만큼 이견을 좁혀 나가는 토론장은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정책 우선순위 상징물이라 해도 좋을 정부예산을 제대로 된 방식으로 국회에서 토의하고 통과시킨 적이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다.
이쯤 되면 이게 워싱턴 이야기인지, 여의도 이야기인지 구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소신과 원칙만 앞세우면 지지 세력에게 박수 받고 자신에게 떳떳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치란 차선책을 합의로 이끌어내는 예술’이라는 명언을 남긴 비스마르크는 아마도 생각이 다르지 않을까.
발음조차 어려운 이 단어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시절 재정적자 축소를 위해 잠시 도입할 뻔했던 시퀘스터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존 베이너 하원의장(공화당)이 2011년 여름에 이룬 타협안 일부다. 당시는 연방 재정적자 상한선을 늘리지 않으면 미국 정부가 파산에 이를 수 있었던 시점. 공화당이 주도하는 하원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재정적자 상한선을 양보하는 대신 약속을 하나 받아냈다. 향후 큰 폭의 재정적자 축소안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10년간 총액 1조2000억 달러 규모의 재정지출을 자동적, 일괄적으로 삭감해 재정적자를 해소한다는 일종의 족쇄였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시퀘스터 조항이다.
그나마 2013년 1월부터 작동하기로 돼 있던 시퀘스터 규정이 지난해 12월 재정절벽을 모면하려고 벌인 양당 타협으로 유예기간 두 달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두 달간 오바마 대통령은 “시퀘스터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국민을 안심시키는 데만 급급했다. 공화당 하원 지도부 또한 “해결책은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 상원에 달렸다”며 거의 손을 놓아버렸다. 그러나 2월 마지막 주 이르러 막판 타협은 끝내 실패했고, 3월 1일자로 올해만 850억 달러에 이르는 재정지출 자동삭감 조항이 발효됐다. 2014년부터 2021년까지 정부 재정지출이 매년 1000억 달러 조금 넘는 액수만큼 삭감되는 조치 역시 궤도에 올랐다.
시퀘스터를 포함한 예산조정법이 2011년 8월 미국 의회를 통과했으니, 따져보면 1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워싱턴 여야 지도부는 모두 팔짱만 끼고 있었던 셈이다. 정치인들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일단 해놓은 뒤 막상 합의에 실패하자 책임은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와중에 그 실패 부메랑이 미국 국민에게 날아 돌아온 것이다.
미국 국민에게 날아든 부메랑
물론 시퀘스터가 실물경제에 미치는 파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먼저 워싱턴 정가의 이전투구에 이골이 난 세계 각국 주식시장은 시퀘스터 발효 후에도 잠잠한 편이다. 미국 다우존스지수는 오히려 최고치를 경신하며 3월 5일 화요일 장을 마감했다. 군사비 삭감 등 정치적 부담을 더 크게 짊어지게 될 공화당 의회가 조만간 시퀘스터 작동을 정지시킬 타협안을 제시하리라는 분석도 있다. 4월 이후에나 미국 국민이 재정지출 삭감 여파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올 한 해 미국 사회 전반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정부예산 삭감분을 꼼꼼히 따져보면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 않다. 먼저 국방비가 427억 달러 줄어드는데, 여기에는 35억 달러 규모의 해군과 공군 항공기 구매 취소, 135억 달러가 필요한 군사훈련 연기, 군사연구비 63억 달러 삭감이 포함됐다. 또한 287억 달러가량의 국내 예산이 감축되며 국립보건원 16억 달러, 질병통제센터 3억 달러 지원도 함께 중단된다. 공항 안전·경비 예산, 국경수비대 예산, 재난관리청 예산, 항공우주국 예산 등에서도 정부 지원금 일부를 삭감한다.
근본적 질문은 1789년 이래 210여 년을 훌쩍 넘는 민주주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정치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기에 이 같은 파국을 막지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 타협과 협상 전통을 자랑하던 워싱턴 정가의 오랜 불문율이 끝내 작동하지 못했다는 점은 이를 일회성 사건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미국 정치는 과연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퇴보는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먼저 미국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친 보수 대 진보 간 양극화 현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맡아야 할 구실이 어디까지냐’는 논쟁을 핵심 축으로 하는 정당 양극화는 물론 미국 정치사에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1880년대 공화당과 민주당 간 무한 경쟁은 현재 수준보다 더 심각했고, 극소수이던 무당파는 ‘비겁한 겁쟁이’라 불리며 사회에서 따돌림당할 정도였다.
보수 vs 진보 양보 없는 대립
미국 정치에서 큰 줄기만 놓고 볼 때 1896년과 1932년, 1964년과 1994년 등 대략 30~40년 주기로 소위 ‘새 판 짜기 선거(critical elections)’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워싱턴은 정국을 주도하는 대통령과 다양한 세력이 공존하는 의회가 서로 협력해 중요한 개혁 과제를 이뤄왔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012년 대통령선거(대선)는 ‘최초 흑인 대통령의 재선 성공’이라는 점 말고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는 평년작 선거였다. 2010년 중간선거 이후 하원에서 양당 의석 비율이 거의 그대로라는 점, 오바마와 롬니의 전국득표율 차이가 51%대 48%로 약 3%p에 불과하다는 사실 등이 이를 방증한다.
한마디로 롬니 후보의 미숙한 선거운동과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쏟아진 공화당에 대한 반감에도,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유권자 몰표로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미국 국민의 평가가 그다지 후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양쪽으로 갈라선 채 중도층은 날이 갈수록 소수화하는 상황, 이것이 바로 지금 미국 정치가 맞닥뜨린 양극화 현상의 골자다. 상대편 주장이나 관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 태도가 전체 국민에게 확산되는 셈이다.
이러한 극단적 흐름이 자리 잡은 이유로 양당 소속의원들이 이념적으로 갈라섰다는 점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다. 호불호가 분명할 수밖에 없는 낙태나 동성애자 결혼 등 사회·문화 이슈가 쟁점으로 떠오른 점, 선거구 조정으로 온건파 정치인이 대거 유탄을 맞고 소멸했다는 점도 함께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눈여겨볼 것은 중도층 참여율이 저조한 연방의회 예비경선 제도의 맹점과 함께 이념편향적 케이블 뉴스채널,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뉴미디어 영향력이 전체 미국 사회를 휩쓸고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인 미치 매코넬 상원의원과 공화당 지도부 일원인 존 코닌 상원의원은 2014년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다. 민주당 오바마 대통령과 조금이라도 타협한다면 내년 상원 예비경선 과정에서 곧바로 퇴출될 개연성이 높다. 이들이 ‘세금 인상 결사반대’라는 공화당 강령을 조금이라도 어긴다면 보수 이념으로 똘똘 뭉친 뉴미디어와 이익집단은 이들을 낙마시키려고 엄청난 자금과 조직을 동원할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예비선거는 투표율이 낮기 때문에 이들 소수 강경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예비선거에서 후보 자격을 얻지 못하면 본선에는 나가보지도 못한 채 의원직이 날아가는 것이다.
오바마의 비전 제시 역부족
지난해 선거에서 ‘원칙 없는 정치인’으로 찍혀 강경 보수파 그룹의 타깃이 된 인디애나 출신의 리처드 루거 상원의원이 대표적 사례다. 예비경선에서 맥없이 탈락한 그는 30년 넘게 이어온 의정생활을 한순간 불명예스럽게 마감해야 했고, 그 결과 한국은 대표적 친한파 상원 외교위원장을 잃었다. 워싱턴 정치 극단화가 바다 건너 불구경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더는 선거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오바마 대통령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혼자 힘으로 이런 양극화 현상을 누그러뜨리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2월 말 “나는 대통령이지 독재자가 아니다”라며 의회 내 반대세력을 성토하던 오바마 모습은 일견 유권자 마음을 살 만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뭔가 달라야 한다’고 기대하는 게 미국 유권자 다수의 정서인 것 또한 사실이다.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한 상원에서도 결집을 끌어내지 못하는 그에 대한 실망감이 크다.
비록 오바마 대통령이 부자 증세를 골자로 하는 단기 전략을 꺼내 들긴 했지만, 앞으로 미국 사회를 어떻게 이끌어나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 제시에는 철저히 실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바마가 잘해서라기보다 롬니가 싫어서 재선에 표를 던져준 상당수 유권자가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멋들어진 당선 인사 웅변술만으로는 국민을 감동시켜 ‘위대한 미국’ 재건을 견인할 정치적 원동력을 찾아낼 수 없다. 오히려 내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으로부터 의회를 되찾아오려고 대통령이 먼저 ‘시퀘스터 공화당 책임론’에만 몰두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마저 제기되는 형국이다.
끝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미국 정치 실패가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는 점이다. 사안에 따라 세력을 결집하고 소신껏 표결하는 대신, 여전히 정당 지도부가 정해준 이념논리적 가이드라인에 따라 표를 던지는 국회의원 행태가 그 첫 번째다. 적은 표 차이로 승리한 데다 재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우리 대통령에게서 감동적인 리더십을 느끼기란 더 쉽지 않다.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는 미디어로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을 찾기는 점점 쉬워지지만, 그만큼 이견을 좁혀 나가는 토론장은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정책 우선순위 상징물이라 해도 좋을 정부예산을 제대로 된 방식으로 국회에서 토의하고 통과시킨 적이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다.
이쯤 되면 이게 워싱턴 이야기인지, 여의도 이야기인지 구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소신과 원칙만 앞세우면 지지 세력에게 박수 받고 자신에게 떳떳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치란 차선책을 합의로 이끌어내는 예술’이라는 명언을 남긴 비스마르크는 아마도 생각이 다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