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8

2013.03.11

산골 처녀 뺨 같은 분홍빛 꽃송이

얼레지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ymlee99@forest.go.kr

    입력2013-03-11 0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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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골 처녀 뺨 같은 분홍빛 꽃송이
    봄 숲엔 수많은 우리 꽃이 피어납니다. 올망졸망 피어나는 꽃들 중 어여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지요. 그 많은 봄꽃 가운데 많은 이의 첫사랑 같은 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얼레지입니다. 얼레지는 제게도 첫사랑 같은 꽃입니다. 작고 소박한 것만이 우리 꽃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던 막연한 느낌을 바꿔준 꽃이지요. 꽃잎을 한껏 뒤로 젖힌 채 피어난 분홍빛 꽃송이가 얼마나 인상 깊던지.

    이름도 참 특별합니다. 얼레지라니. 외국에서 들여온 꽃이름 같지만 분명 토종 우리 꽃입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연유는 알지 못합니다. 땀이 많이 나는 사람에게 생기는 어루러기라는 피부질환이 있습니다. 피부에 얼룩얼룩한 황갈색 또는 검은색 반점이 생기지요. 이를 ‘얼레기’ 또는 ‘어루지’라고도 부르는데, 잎에 난 얼룩무늬 때문에 이를 본떠 얼레지라고 부른 것 아니겠느냐고 추측하는 분도 있네요. 한편으론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이 고운 꽃이 피부에 생기는 곰팡이라니, 심정적으로는 결코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영어 이름은 Dogtooth Violet입니다. 어디에서 개 이빨을 상상했을까요? 꽃을 유심히 보면 꽃잎 안쪽에 결각이 진, 진한 보랏빛 무늬가 있습니다. 안쪽에 꿀샘이 들어 있다고 곤충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는 표시선 같지요. 영어 이름도 아름다운 얼레지와는 어울리지 않네요.

    이른 봄 산에 가면 간혹 야생화 군락을 만나는 행운이 찾아옵니다. 숲은 도시보다 봄이 늦게 찾아드는데, 키 큰 나무는 아직 잎도 틔우지 않은 이른 봄, 현호색이나 꿩의바람꽃 무리와 함께 핀 얼레지 군락은 평생 잊지 못할 장관입니다.

    하지만 얼레지가 아무리 고와도 집 안으로 옮겨올 생각일랑 마세요. 아주아주 가는 뿌리가 땅속 깊이깊이 들어가 있으므로 끊어지지 않게 옮기는 게 참 어렵거든요. 그냥 산에 와서 한 번씩 보라는 뜻이라고 생각하세요. 땅속에는 알뿌리가 있는데, 한 해에 하나씩 생기면서 깊이깊이 뿌리 내립니다. 아주 배고프던 시절엔 이 알뿌리를 구황식물로 이용했다는데, 어지간해서는 그리 이용하기도 어렵답니다.



    그 대신 잎은 나물로 먹기도 하지요. 약간 시큼하면서도 참나물이나 취나물과는 다른 얼레지 나물만의 색다른 맛이 있습니다. 얼레지 묵나물로는 국을 끓여 먹기도 하는데, 미역국 맛이 난다 하여 ‘미역취’라고 부르지요. 하지만 이 식물에는 독성이 있으므로 반드시 한 번 삶아 우려낸 뒤 먹어야 합니다. 하긴, 보기도 아까워 여간해선 먹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얼레지는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언 땅을 녹이고 올라온 잎새는 아기 손바닥처럼 넙적하고, 두터운 녹색 잎에는 자색 얼룩이 있답니다. 그 사이로 꽃자루가 올라와 꽃잎 6장을 한껏 펼쳐내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지요. 꽃잎을 완전히 뒤로 젖히고 긴 보랏빛 암술대와 그것을 둘러싼 수술대를 고스란히 드러낸, 수줍은 산골 처녀치곤 파격적인 얼레지의 개방을 이 봄엔 꼭 한 번 구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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