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67

2012.12.17

추워서 더 고귀한 향기와 자태

한란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ymlee99@forest.go.kr

    입력2012-12-17 10: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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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워서 더 고귀한 향기와 자태
    날씨가 참 무섭게 춥습니다. 한동안 겨울 날씨가 따뜻한가 싶더니, 갑자기 닥친 한파에 눈까지 겹쳐 온 세상이 얼면서 마음까지 추워져 절로 움츠려들게 되네요. 기후변화는 단순하게 온난화 추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돼 우리를 더욱 힘겹게 합니다. 어디 우리뿐이겠습니까. 자연을 구성하는 다양한 생물 역시 그렇겠지요.

    우리나라 같은 온대 중부지역에서 식물들에게 가장 힘든 시기는 겨울입니다. 영하로 내려가는 기온에서는 수분이 정상적으로 이동하지 못한 채 얼어버려 생존 자체가 힘겨워지지요. 한해살이풀들은 물론, 여러해살이풀들도 지상부는 사라지고 땅속에서 겨울을 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식물기관 중에서도 가장 연약하고 섬세한 꽃은 온실 속이 아니고서야 겨울에 피어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겨울에 피는 꽃을 떠올려보면 먼저 동백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무에 피는 꽃인 데다 조금 추운 전북지역으로만 올라와도 봄꽃이 돼버리지요. 그런데 정말 겨울에 피는 꽃이 있는데, 바로 한란(寒蘭)입니다. 이름도 추운 데서 피는 난초라는 뜻이지요. 한반도에서는 자생하는 곳이 제주 한라산자락 한 곳이라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봄꽃이 될 염려도 없는, 그냥 말 그대로 겨울꽃 그 자체입니다.

    한란은 난초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가녀리고 향기로운 동양 난초의 품격을 잘 드러내는 꽃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선형 잎은 늘씬하게 뻗어 뒤로 젖혀지고, 한겨울 그 사이에서 올라온 꽃대에는 황색이라고도, 녹색이라고도, 자색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아주 신비롭고 아름다운 꽃이 피지요.

    한란은 꽃 피는 시기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라는 곳도 특별합니다. 제주 서귀포 자생지는 그 자체가 한란 종(種)과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은 유일한 한란 자생지로 가장 북한계(北限界)를 이룬다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난초들은 조직배양을 통해 대량 생산, 보급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꽃가게에서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연 그대로의 다양한 변이를 지닌 자생지에 핀 한란의 경우, 정말 ‘탐욕스럽게’ 욕심내는 사람이 많아 대부분 훼손됐다는 점이지요. 현재 한란 자생지는 몇 겹으로 울타리가 쳐진 천연 요새 같은 모습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한란은 사람들이 하나하나 개체를 확인,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손길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렇게 보호한 지 그리 오래지 않아 다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한란이 여기저기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보존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도 흐뭇하게 보람을 느끼고 있답니다.

    혹시 1840년 제주에 유배되어 9년 동안 살면서 제주 한란을 재배하고 또 그 모습을 그림으로 즐겨 그린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주 한란을 발견하고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날씨도, 세상도 추우니 그 고고한 한란의 자태와 은은한 향기가 더욱 귀하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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