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28

2012.03.12

사라진 약혼녀는 왜 신분세탁을 했는가

변영주 감독의 ‘화차’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2-03-12 11:1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사라진 약혼녀는 왜 신분세탁을 했는가
    태초에 신이 “빚이 있으라” 하니 세상 사람이 세 가지로 나뉘었다. 채무자와 채권자, 그리고 채권추심인. 즉 빚진 자와 빚을 준 자, 그리고 빚 받는 자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의 만사를 주관하시는 유일신인 자본, 그중에서도 전능하신 금융자본은 우리에게 빚을 거래할 자유를 주셨으니 ‘신용’이야말로 신의 언어이자 논리며, ‘이자’는 제단에 바치는 속죄양의 피리라. 무릇 ‘투자’는 생명이고 ‘파산’은 죽음이라. 우리의 신은 ‘투기’의 신이며, 은행과 증권, 보험, 투자신탁, 신용카드사가 ‘연체’ ‘파산’을 최고 형벌로 내리는 정통의 신이라면, 사채는 ‘신체포기각서’ ‘인신매매’ 등 극형을 일삼는 사교 혹은 이단의 교주다.

    한국 영화는 채권자와 채무자, 채권추심인으로 나뉜 현대인의 수난사를 기록해왔다. ‘푸른소금’의 신세경은 사채업자에 쫓겨 권총을 잡았으며, ‘잔혹한 출근’의 김수로와 이선균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유괴범죄에 나섰다. ‘김씨표류기’에서 신용카드사의 빚 독촉 전화에 쫓겨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한강의 무인도로 떠밀려간 정재영은 ‘카운트다운’에선 냉혹한 채권추심인으로 변신했다. ‘오직 그대만’의 소지섭 역시 한때 잔인한 채권추심인으로서 가련한 가장을 생사 갈림길로 몰아넣었다. ‘똥파리’의 양익준도 가차 없는 폭력으로 빚쟁이를 다그쳤다. 김기덕 감독이 새롭게 착수한 영화 ‘피에타’에서는 이정진이 사채업자를 대리해 돈을 받으러 나섰다.

    채권자는 왜 주인공으로 나타나지 않느냐고? 신은 늘 배후에 있을 뿐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임창정과 엄지원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불량남녀’처럼 빚진 남자와 빚 받으러 다니는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사채는 대개 지옥행 특급열차의 값싼 티켓이다.

    사라진 약혼녀는 왜 신분세탁을 했는가
    빚진 여인의 절망과 수난

    변영주 감독의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화차’에도 지옥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빚진 여인의 수난사, 개인파산의 연대기가 펼쳐진다. 어느 날 약혼녀가 사라진다. 결혼을 앞두고 남자의 부모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른 문호(이선균 분)가 커피를 사러 간 사이, 옆자리에 앉아 평소와 다름없이 즐겁게 대화를 나눴던 피앙세 선영(김민희 분)이 감쪽같이 사라진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선영의 휴대전화는 꺼졌고, 문호가 선영의 집을 찾아갔을 땐 이미 모든 짐이 정리된 뒤였다.



    사라진 약혼녀는 왜 신분세탁을 했는가
    미친 듯이 약혼자를 찾아헤매던 문호는 은행에서 일하는 친구로부터 선영에게 개인파산 전력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문호가 알던 선영의 직장 이력은 완전히 허위였다. 없어진 약혼자의 자취를 쫓던 문호는 결국 그의 이름을 포함한 신원 정보가 통째로 조작된 것이며, 전혀 다른 여자의 것을 도용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다. 과연 문호가 사랑한 여자는 누구였고, 그는 왜 신분을 감출 수밖에 없었으며,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일까.

    문호는 뇌물수수 혐의로 해직당한 전 강력계 형사이자 사촌형인 종근(조성하 분)에게 약혼녀 추적을 의뢰한다. 종근은 문호의 약혼녀가 신분을 도용한 ‘강선영’이라는 여자의 행방을 조사하던 중 약혼녀 실종 사건이 살인과 연관됐음을 직감한다. 종근과 문호의 추적이 계속되면서 약혼녀의 행각이 하나 둘씩 드러난다. 강선영과 그를 도용한 약혼녀의 가짜 삶, 그리고 두 여자의 인생에 감춰진 죽음과 살인의 비밀. 여기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채 빚, 그리고 연좌제보다 무서운 보증의 고리, 헤어날 수 없는 절망과 가난의 수렁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김민희의 놀라운 변신에 눈길

    사라진 약혼녀는 왜 신분세탁을 했는가
    이 작품의 원작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일본 여성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소설이다.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최근 일본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한국 영화가 잇따른다는 사실이다. 송강호, 이나영 주연의 ‘하울링’은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를 각색했으며, 배우 출신 방은진 감독이 작업 중인 ‘완전한 사랑’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 원작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백야행’은 이미 손예진과 고수 주연의 한국 영화로 만들어졌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비롯해 김용화 감독의 ‘미녀는 괴로워’, 권칠인 감독의 ‘싱글즈’, TV 드라마 ‘요조숙녀’ ‘꽃보다 남자’ 등 주로 2000년대 초중반 활발했던 일본 만화의 영상화 및 드라마 리메이크 작업과 더불어 최근 한국 대중문화에 나타난 의미심장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독자와 영화제작자를 매혹시킨 일본 추리소설이나 범죄 스릴러물은 일단 극적 짜임새가 대단히 좋다.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국내에도 상당히 폭넓은 팬층을 형성한 검증받은 흥행작이다. 최근 국내에 소개된 유럽과 미국의 추리·범죄소설이 테러나 이단종교, 극우단체 등을 소재로 한 잔혹한 내용인 반면, 일본 작품은 인간적이고 따뜻한 결말과 분위기를 가진 작품이 많다. 영웅적인 해결사보다 착하고 평범한 인물이 극 중심에 있고, 일본 사회의 범죄나 정신병리적 현상이 한국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점 또한 일본 소설이 한국 영화계에 매력적인 이유다.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역시 이러한 특성을 고루 갖췄다. 소설은 1990년대 초중반 거품경제가 꺼진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개인파산’ 탓에 삶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20년쯤 지난 한국 사회로 무대를 옮겨왔지만 원래부터 우리네 사정이었던 듯 설정이나 줄거리가 설득력 있다. 다만 소설은 약혼자 실종 사건을 의뢰받은 형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반면, 영화는 문호와 종근의 시점 및 비중을 비슷하게 배분하고, 결말의 비극적 색채를 좀 더 짙게 했다.

    이선균과 조성하는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기존의 평판을 증명해 보였다. 이 영화에서 단연 눈에 띄는 배우는 김민희다. 그동안 연기자보다 패셔니스타로 더 조명받았던 그의 변신과 발전이 눈부시다. 약혼녀가 빚의 저주를 풀려고 내린 극단의 선택과 김민희의 가냘픈 몸, 처연한 표정이 썩 좋은 대조를 이룬다.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와 극영화 ‘밀애’ ‘발레 교습소’를 연출한 변영주 감독의 신작이다. 소설을 변용한 스토리텔링과 드라마의 호흡은 매끄러운 편이지만, 구성과 스타일은 새롭거나 파격적인 면모가 부족해 아쉽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