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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은의 vitamin 詩

백지로 뛰어들던 날, 그 막막함

백지로 뛰어들던 날, 그 막막함

백지로 뛰어들던 날, 그 막막함
그날

처음으로 시의 입술에 닿았던 날

내가 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환하고도 어두운 빛 속으로 걸어간 날



도마뱀을 처음 보던 날

나는 푸른 꼬리를 잡으려고 아장아장 걸었다

처음으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던 날

따스한 모래 회오리 속에서

두 팔 벌리고 빙빙 돌았던 날

차도로 뛰어들던 날

수백 장의 종이를 하늘 높이 뿌리던 날

너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커튼의 파란 줄무늬

그 뒤에 숨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양손에 푸른 꼬리만 남기고 네가 사라져버린 날

누가 여름 마당 빈 양철통을 두드리는가

누가 짧은 소매 아래로 뻗어나온 눈부시게 하얀 팔꿈치를 가졌는가

누가 저 두꺼운 벽 뒤에서 나야, 나야 소리 질렀나

네가 가버린 날

나는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를 뒤집어놓았다

―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2008)에서

백지로 뛰어들던 날, 그 막막함

언제부터 시를 썼나요? 처음 만난 사람들은 으레 묻곤 한다. 이것이 마치 나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질문이라도 된다는 듯. 나는 쭈뼛거리기 일쑤다. 질문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정작 내가 나를 잘 모르겠어서다. 처음 시를 쓴 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시를 쓴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쓴 것을 시라고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시는 내게서 너무 멀리 있었다. 나다운 게 아닌 것 같았다.

시를 써야겠다는 일념으로 백지에 “뛰어들던” 순간은 데뷔하고 한참 뒤에야 찾아왔다. 그전까지 나는 그저 “뒤에 숨어서” 상황을 엿보는 파수꾼에 가까웠다. 동료 시인들의 작품을 읽고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같았다. 아주 가끔, 내 심장이 너무 차갑거나 내 머리가 너무 뜨거운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외국에 머물던 어느 날, 나는 불현듯 시가 쓰고 싶었다. 오늘은 왠지 뭔가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만의 말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거기’에서 ‘지금, 여기’를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컴퓨터를 켤 때, 온몸에서 파드닥파드닥 정전기가 일었다. “처음으로 시의 입술에 닿았던” 순간에는 첫눈이 내렸다. 때는 한여름, 나는 헛것을 본 것이다.

그것은 “차도로 뛰어”드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시작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커다란 종이를 마주했을 때 엄습하는 막막함이었다. 밤새 쓴 글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수백 장의 종이를 하늘 높이 뿌리”는 건 그야말로 예사였다. 간혹 쾌재를 부를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자주 낙담했다. 그래도 좌절하지는 않았다. “푸른 꼬리”를 잡는 상상을 하면 금세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시가 잘 안 써질 때면 습관처럼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신기하게도, 모래의 양이 아까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바야흐로 경험이, 생각이, 감정이 축적되고 있었다. 그러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그날”이 찾아왔다. 그 순간이 들이닥쳤다. “저 두꺼운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벽 뒤에서, 거짓말처럼 나를 닮은 네가 나타났다.

백지로 뛰어들던 날, 그 막막함
오늘도 나는 풀려나기 위해 스스로 갇힌다. 누가 나를 찾는지 알아보기 위해 “환하고도 어두운 빛” 속으로 홀홀히 걸어 들어간다. 철없는 나는 그렇게라도 해서 나 자신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너는 원래 있지도 않았는데,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네가 없었으므로 나는 너를 상상했다. 기꺼이 만들었다. 나와 너는 몹시 생생해서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꽃을 쏘아 올렸는데 단비가 떨어지기도 했다. 아주 가끔, 그림자에서 터무니없는 빛이 났다. 시인(詩人)으로서 시인(是認)한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주간동아 822호 (p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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