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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은의 vitamin 詩

정정한 거목 할아버지가 쓰러졌다

정정한 거목 할아버지가 쓰러졌다

정정한 거목 할아버지가 쓰러졌다
작아지는 몸

당신 곁에 앉아 당신을 보는 것은

작아지는 몸을 수수방관하는 일

당신을 어루만져 작게 만들고 있는

투명한 손 곁에서의 속수무책



당신은 작아지고

쭈글쭈글해지고

샘처럼 어두워지고

당신이 산그늘에 누워 춥고 먼 골짜기들을 그리워할 때

절룩거리는 무릎뼈를 내려놓고

배추밭 사이를 가벼이 날아갈 때

배추흰나비와

호롱불 같은 얼굴들과 물동이와

싸락눈과

춥던 군불 속으로 들어갈 때

내 손을 가만히 놓고 오십년, 육십년 전으로

조그맣게 떠내려갈 때

당신은 인형처럼 야위고

또 작아지고, 무엇보다도

작아지고 싶어 하고

당신 곁에 앉아 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을 자꾸만 조그맣게 만들고 있는

작고 가녀린 힘을,

막을 가녀린 힘이 내게 없는 일

샘과 물동이와 군불이 목이며 눈에 들어오는 일

메다가 젖다가는 터져버릴 것 같은

쓸모없는 큰 힘만이 두 손에 가득한 일

― 이영광 ‘아픈 천국’(창비, 2010)에서

정정한 거목 할아버지가 쓰러졌다

할아버지께서는 풍채가 좋았다. 쌀 한 가마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논두렁을 뚜벅뚜벅 걸었다. 마당 한가운데에 그 가마니를 내려놓은 뒤, 나를 번쩍 들어 목말을 태워주곤 하셨다. 장작을 팰 때마다 넣었던 기합 소리는 뒷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목소리로 아버지를 호되게 꾸짖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을 때, 세상에서 제일 큰 사람이 바뀌었다. 아버지에서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로.

할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처음에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정정한 거목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고개를 푹 수그릴 리 없었다. 지난주에 넌지시 내 손에 귤을 쥐여 주시던 분이 지금 병상에 누워 있다는 사실은 차라리 초현실적이었다. 기억이란 게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논두렁을 뚜벅뚜벅 걷는 대신, 나는 “조그맣게 떠내려”가듯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하루가 다르게 “작아지고/ 쭈글쭈글해”지던 할아버지는, 급기야 눈두덩이 푹 꺼져버린 할아버지는 슬프게도 해를 넘기지 못했다. 혈혈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호롱불 같은 얼굴들”을 떠올리며 탄광촌에서 일하셨던 당신. 호롱불을 조금 더 밝히기 위해, 버는 돈은 죄다 고국으로 부치셨던 당신. 광복을 맞이하고 그 돈이 모두 거짓말처럼 백지가 돼버렸을 때, 백지장을 맞들어도 상황이 좀체 나아지지 않았을 때, 그때도 할아버지께서는 기백을 잃지 않으셨다고 한다. 껄껄 웃으시며 새 출발에 대한 의지를 다지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주검을 보고 나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저세상에 간 사람의 몸뚱이가 순식간에 얼마나 왜소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작고 가녀”려질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쌀 한 가마니를 어깨에 짊어지시던 할아버지는 이제 쌀 한 가마니보다 가벼워지신 듯싶었다. “당신 곁에 앉아 당신을 보는”데, 또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수수방관”하는 나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정정한 거목 할아버지가 쓰러졌다
장례식장 밖으로 어칠비칠 걸어나오는데 눈앞이 깜깜했다. 그간 나를 지탱해온 어떤 체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목말에서 억지로 내려와야만 하는 어린아이의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십대의 마지막 해였다. 더는 울지 않기 위해 주먹을 꾹 쥐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는데, “쓸모없는 큰 힘만이 두 손에 가득”해졌다. 파도에 젖은 “배추흰나비”처럼 무기력한데도, 한동안 나는 북받치는 설움에 어디론가 꾸역꾸역 날아가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떴더니, 당신의 “육십년 전”처럼 스무 살이 돼 있었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주간동아 2011.12.12 816호 (p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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