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 아니라도 좋다’(사월의책)는 ‘국민배우’ 안성기의 드라마틱한 인생사를 담은 평전이다. 안성기는 다섯 살에 영화계에 입문한 이후 54년간 국민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그의 영화 인생 역정이 바로 한국 영화사나 다름없다. 이 책은 안성기의 영광과 수난, 성공과 좌절을 객관적으로 잘 그렸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와 문화사도 담았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인 무라야마 도시오. 필자는 한국 영화사를 이만큼 감동적으로 정리한 책은 처음 봤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외국영화 수입을 할당받기 위한 영화 만들기, 비현실적 소재와 국책 선전을 위한 계몽 영화, 반공영화의 범람이 관객이 영화를 외면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하이틴 영화는 주로 고교생활을 소재로 하여 1976년부터 1978년에 걸쳐 얄개 시리즈, 여고 시리즈, 진짜진짜 시리즈 등이 제작되어 성공을 거두었지만, 사회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젊은이 대상의 오락영화였다. (중략) 짧은 유행으로 끝난 하이틴 영화 시리즈를 대신하여 등장한 것은 ‘별들의 고향’을 포함한 ‘호스티스물’로 불리는 영화들이다. 1975년에 문화공보부는 ‘폭력영화의 제작 및 수입 불허기준’을 발표하여 영화에서 폭력을 다루는 걸 금지했다.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위기, 정치적 폐쇄감, 사회적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관객이 한정된 선택지 속에서 요구한 것이 관능영화였을지도 모른다.”
이즈음 안성기는 배우로서 자신감을 잃어가며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후 그는 리얼리즘 영화를 추구하던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에 중국집 배달원으로 출연해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영화인으로서 자신감을 회복했다고 한다. 저자는 또한 ‘성공시대’ ‘화엄경’ 등을 제작해 뉴웨이브의 일각을 담당한 장선우가 이 영화를 본 뒤 ‘영화를 통해 사회참여를 할 수 있구나’라는 확신을 얻어 감독을 지망한 사실도 알려줬다.
최근 필자가 읽은 일본 저자의 책은 한결같이 ‘오타쿠’적 속성을 제대로 보여준다. 야마다 쇼지의 ‘해적판 스캔들 : 저작권과 해적판의 문화사’(사계절)는 저작권 개념과 기한을 둘러싸고 18세기 영국에서 ‘영구 저작권 분쟁’을 벌인 ‘도널드슨 대(對) 베케트 재판’의 진행 과정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재구성했다. 이 사건은 동서양의 저작권법 교과서에 어김없이 등장하지만 이 책처럼 박진감 있게 그린 책은 일찍이 없었다. 야마다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케임브리지대에서 9개월간 무수한 문헌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밝혔다.
일본의 대표적 생태농업 운동가 요시다 타로의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서해문집)는 미국의 경제봉쇄에다 소련 붕괴로 석유 공급 중단 사태까지 겪어야 했던 쿠바가 저성장·순환형 사회로 방향을 튼 이후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이 꼽은 지구상에서 지속가능한 개발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나라가 된 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한 책이다. 1998년 이후 해마다 한 차례 이상 휴가를 내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취재를 해온 저자는 쿠바에 대한 책을 다섯 권이나 펴냈다.
이런 책은 일본이 ‘기록과 조사의 나라’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개인이나 기관의 기록문화가 생생이 살아 있지 않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책들이다. 영화인도 아닌 무라야마 도시오가 통역을 하다가 알게 된 안성기를 추적하면서 개인사와 영화사, 그리고 현대사까지 잘 녹아든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기록문화를 중시하는 일본의 문화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기초적인 기록은 물론, 조사와 통계까지 엉망인 우리는 일본의 논픽션에서 출판이 나아갈 길을 제대로 배워야 마땅하다는 것을 거듭 깨달았다.
1958년 출생.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학교도서관저널’ ‘기획회의’ 등 발행. 저서 ‘출판마케팅 입문’ ‘열정시대’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베스트셀러 30년’ 등 다수.
“외국영화 수입을 할당받기 위한 영화 만들기, 비현실적 소재와 국책 선전을 위한 계몽 영화, 반공영화의 범람이 관객이 영화를 외면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하이틴 영화는 주로 고교생활을 소재로 하여 1976년부터 1978년에 걸쳐 얄개 시리즈, 여고 시리즈, 진짜진짜 시리즈 등이 제작되어 성공을 거두었지만, 사회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젊은이 대상의 오락영화였다. (중략) 짧은 유행으로 끝난 하이틴 영화 시리즈를 대신하여 등장한 것은 ‘별들의 고향’을 포함한 ‘호스티스물’로 불리는 영화들이다. 1975년에 문화공보부는 ‘폭력영화의 제작 및 수입 불허기준’을 발표하여 영화에서 폭력을 다루는 걸 금지했다.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위기, 정치적 폐쇄감, 사회적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관객이 한정된 선택지 속에서 요구한 것이 관능영화였을지도 모른다.”
이즈음 안성기는 배우로서 자신감을 잃어가며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후 그는 리얼리즘 영화를 추구하던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에 중국집 배달원으로 출연해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영화인으로서 자신감을 회복했다고 한다. 저자는 또한 ‘성공시대’ ‘화엄경’ 등을 제작해 뉴웨이브의 일각을 담당한 장선우가 이 영화를 본 뒤 ‘영화를 통해 사회참여를 할 수 있구나’라는 확신을 얻어 감독을 지망한 사실도 알려줬다.
최근 필자가 읽은 일본 저자의 책은 한결같이 ‘오타쿠’적 속성을 제대로 보여준다. 야마다 쇼지의 ‘해적판 스캔들 : 저작권과 해적판의 문화사’(사계절)는 저작권 개념과 기한을 둘러싸고 18세기 영국에서 ‘영구 저작권 분쟁’을 벌인 ‘도널드슨 대(對) 베케트 재판’의 진행 과정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재구성했다. 이 사건은 동서양의 저작권법 교과서에 어김없이 등장하지만 이 책처럼 박진감 있게 그린 책은 일찍이 없었다. 야마다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케임브리지대에서 9개월간 무수한 문헌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밝혔다.
일본의 대표적 생태농업 운동가 요시다 타로의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서해문집)는 미국의 경제봉쇄에다 소련 붕괴로 석유 공급 중단 사태까지 겪어야 했던 쿠바가 저성장·순환형 사회로 방향을 튼 이후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이 꼽은 지구상에서 지속가능한 개발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나라가 된 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한 책이다. 1998년 이후 해마다 한 차례 이상 휴가를 내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취재를 해온 저자는 쿠바에 대한 책을 다섯 권이나 펴냈다.
이런 책은 일본이 ‘기록과 조사의 나라’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개인이나 기관의 기록문화가 생생이 살아 있지 않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책들이다. 영화인도 아닌 무라야마 도시오가 통역을 하다가 알게 된 안성기를 추적하면서 개인사와 영화사, 그리고 현대사까지 잘 녹아든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기록문화를 중시하는 일본의 문화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기초적인 기록은 물론, 조사와 통계까지 엉망인 우리는 일본의 논픽션에서 출판이 나아갈 길을 제대로 배워야 마땅하다는 것을 거듭 깨달았다.
1958년 출생.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학교도서관저널’ ‘기획회의’ 등 발행. 저서 ‘출판마케팅 입문’ ‘열정시대’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베스트셀러 30년’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