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81

2011.04.04

폐위된 황제 장례식 날 6·10 만세운동 들불 타올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유릉(裕陵)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1-04-04 11:0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폐위된 황제 장례식 날 6·10 만세운동 들불 타올라

    유릉의 석수상은 황제릉 형식으로 조각기법이 서양과 일본식이 가미돼 세밀하고 정교하나 구조적으로 약한 감이 있다.

    유릉(裕陵)은 조선의 제27대 왕이자 마지막 임금이며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인 순종황제(純宗皇帝, 1874~1926, 재위 1907~1910)와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1872~1904) 민씨,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 윤씨의 능이다. 한 능침에 3인을 함께 모신 유일한 동봉삼실형 합장릉이다.

    3년 1개월 재위 후 이왕으로 강등 수모

    유릉은 순종의 부모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洪陵)이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지구 능역에 있다. 유릉은 종래 조선 왕릉 제도와 다른 새로운 황제능묘 제도에 따라 조성됐다. 이곳에는 홍릉과 유릉 이외에 영친왕과 그의 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의 영원(英園), 의친왕 묘 그리고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덕혜옹주의 묘, 고종의 후궁묘, 황세손 이구의 회인원(懷仁園) 등이 있어 대한제국의 황실 무덤군이라 할 수 있다.

    순종은 조선 제26대 왕이며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제의 이름은 척()이다. 다른 왕과 황제처럼 외자다. 순종은 1874년 2월 8일에 창덕궁 관물헌에서 태어났다. 1897년(광무 원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가 된 그는 1907년 일제의 강요와 모략으로 고종이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됐다. 그러나 일본 통감의 지도와 일본 관리의 명을 받는 협약이 체결돼 순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허수아비란 지적을 받았다. 이때 조인 서명은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이토히로부미가 했다.

    협약 조인 당일 일본 통감은 법률1호로 ‘신문지법(新聞紙法)’을, 법률2호로 ‘보안법’을 발표했다. 일제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언론 장악이었다. 조인 다음 날 이완용은 궁내부 대신에 임명됐다. 순종은 즉위식 날 조령을 내려 “세상을 유신(維新)하고자 머리를 깎고 군복을 입겠다”며 “짐을 따를 것”을 명했다. 그러고선 황태자이던 영친왕을 육군보병 참위(參尉)에 임명했다. 국권을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일제의 강요 때문이었을까? 역사가들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해석한다. 내각에서는 순종을 달래려고 그의 비(妃) 무덤인 유강원(裕康園)을 유릉으로 승급할 것을 권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능의 이름도 일제의 간섭으로 이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일제는 각 능원의 토지증명서상 경계를 해자(垓字·산불 방어를 위해 능 주변에 잡목 등을 제거한 방호 선) 안과 향탄산(香炭山·산릉 제사용 향나무와 숯 굽는 참나무를 기르는 산)의 일부로 제한함으로써 능역을 축소 수정했다. 왕실 재산 수탈 작업의 일환이었다.



    풍수가 사이에서 길지 vs 흉지 논란

    폐위된 황제 장례식 날 6·10 만세운동 들불 타올라

    유릉의 문석인은 눈알의 표현이 없으며 서구적 체격에 정체성 없이 세밀함만 있다.

    순종은 3년 1개월간 재위했는데 1910년 무력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일제강점기 순종은 처소를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황제가 아닌 이왕으로 강등돼 허수아비 왕으로 대우를 받다 여생을 마쳤다. 창덕궁에 갇혀 지내던 순종은 임종 직전 ‘한일병합이 역신들의 만행임을 알리고 광복을 부르짖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0년 7월 24일 국권피탈 조약이 체결되고 두 달 뒤 발효돼 조선과 대한제국은 519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멸망했다. 조약 체결 다음 날 경운궁에서 폐위된 순종은 창덕궁에서 16년 동안 머물다 1926년 4월 25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장례는 도쿄의 국내성에서 주관해 일본 국장으로 했는데 황제장이 아니라 이 왕가가 진행하는 형식으로 했다. 장례 기간도 한 달 반으로 짧게 하고 능호도 순명효황후의 유릉 이름을 그대로 따랐다.

    이런 순종의 국장 내용이 사진집으로 남아 있어 세계문화유산등재 때 일부 사진을 자료로 제공했다. 특히 재궁에 함께 매장한 유물은 조선의 원래 형식은 아니지만 실물 사진을 제공할 수 있어 매장 유물에 관심을 갖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위원들을 이해시키는 데 좋은 자료가 됐다. 매장 유물은 옥새, 옥구슬, 책, 반지, 백금시계, 금테안경, 금주발 등이다. 순종의 하관일인 1926년 6월 10일에는 광복을 위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의 장례일에 3·1운동이 일어났듯 국부를 잃은 국민의 슬픈 감정이 독립 만세운동으로 결집돼 폭발한 것이다.

    정비 순명효황후 민씨는 1897년 황태자비가 됐으나 순종 즉위 전에 승하해 지금의 능동(현 어린이대공원, 유강원 터)에 세자빈묘의 형식으로 모셔졌다가 순종 승하 때 천장돼 이곳에 함께 모셔졌다. 순정효황후 윤씨는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순명효황후가 사망하자 1906년 황태자비가 됐으며 이듬해 순종이 황제에 오르자 황후가 됐다. 나라를 잃은 후 일제의 침탈행위와 광복, 6·25전쟁을 겪었으며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해 슬픔을 달래다 1966년 춘추 72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해 유릉에 동혈삼광지제(同穴三壙之制)로 합장됐다. 순정효황후는 국권이 찬탈당하던 날 강제병합 조약 소식을 듣고 치마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친일파였던 숙부 윤덕영이 들어와 강제로 빼앗아갔다고 전해진다.

    유릉은 능침-침전-홍전문 등이 직선형으로 배치된 홍릉과 달리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의 축이 각기 다르게 배치됐다. 유릉은 풍수가 사이에서 길지(吉地)니, 흉지(凶地)니 의견이 분분한 곳이기도 하다. 어떻든 홍릉과 유릉은 쓰러져가는 조선의 국권을 강화하고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능침공간은 조선의 전통 왕릉 형식을 유지하되 제향공간은 국민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인 만큼 황제릉 형식을 도입한, 독특한 대한제국의 황릉 형식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유릉의 비각 안 비석에는 ‘대한순종효황제 유릉 순명효황후부좌 순정효황후부우’라고 전서체로 음각돼 있다. 유릉은 황제와 황후 2명의 현궁이 함께 있는 합장릉으로 이제까지 지켜졌던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제일 왼편에 황제의 재궁이 있어야 하나, 이곳은 다르다. 가운데 순종, 우측에 순정효황후, 좌측에 순명효황후의 재궁을 두어 우왕좌비(右王左妃)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이는 중국 황제릉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폐위된 황제 장례식 날 6·10 만세운동 들불 타올라

    동봉삼실합장릉인 유릉은 가운데가 순종, 오른편이 순명효황후, 왼편이 순정효황후의 재궁이다. 이는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을 무시한 유릉만의 형식이다.

    유릉 제향공간은 홍릉과 같이 황제릉 양식으로 일자형의 침전이 있다. 침전 안 어좌 뒤편에는 일월오악도의 병풍 그림이 있었으나 훼손된 채 일부만 남아 아쉬움이 크다. 침전 앞에 다양한 형태의 석물이 있는데 고종 때 세자비로 있다가 승하한 순명효황후의 유강원 것을 일부 가져와 쓴 것으로 ‘순종효황제산릉주감의궤’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의궤는 제목도 도감(都監)이 아니라 주감(主監)으로 격하하고 기록도 간략하게 작성했다. 혼유석과 장명등 등은 고종 때의 것이며 문무인석을 비롯해 침전 앞 신도의 석물은 일제의 영향 아래 조각된 것이다.

    유릉 신도의 석물은 홍릉의 것보다 사실적이면서 예리한 수법으로 조각됐다. 순종의 능역을 조성하는 산릉주감은 조선인이었으나 실제적 실무자는 도쿄대 교수이면서 메이지신궁(明治神宮) 등을 지은 일본인 건축가 이토추타(伊東忠太)였다. 이 상황에서 일본인들은 유릉의 석조물을 일본식으로 조각하길 고집했다. 1927년 6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유릉의 침전 앞 석물을 조성하는 과정을 기록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일제가 처음부터 조선의 전통기술을 무시하고 한 나라의 문화를 짓밟으려 한 의도를 잘 파악할 수 있다.

    어정과 제정 두 우물 제 모습 갖춰

    폐위된 황제 장례식 날 6·10 만세운동 들불 타올라

    뚝섬의 살곳이다리를 건너는 순종황제의 국장 행렬(1926, 어장의 사진첩).

    “그 모형을 신라시대부터 이어온 조선식에 근대 일본식을 가미한 절충식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그 후 이와 반대되는 순일본식으로 하자는 의견이 높아져 드디어 순일본식으로 하여 짐승의 다리를 앙상하게 내어놓고 선(線)을 일본식으로 하고”…“고종제의 황릉 앞 석물은 중국식을 가미한 것으로 졸렬하고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장래에 좋은 사실을 남기기 위해 홍릉을 지척에 두고 전연 딴 취미의 석상을 만드는 것이란다.”

    이 때문일까. 유릉의 어재궁의 건축과 일부 침전 앞 조각은 예리하고 사실적인 면이 강하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의 조각기술을 도입해 석고로 본을 떠 만드는 새로운 기술을 시험해본 결과다. 서구의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시험적으로 도입하면서 일본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적 행위였던 것이다. 즉 서구의 기술을 통해 조선이나 중국의 문화는 쇠퇴하고 일본의 문화가 앞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조선 식민지화와 중국 대륙 침탈의 정당성을 우리 국민에게 강요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후 일본은 조선을 무력 점거하고 동북아 지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그래서인지 유릉의 문무석인은 정교하고 세밀하기는 하나 근거도 없는 유럽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표정도 없다. 문석인은 눈망울도 없다. 마치 앞 못 보는 사람을 표현한 것 같은 인상이다. 다른 것은 사실적으로 정교하게 조각하면서 그렇게 조각한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여타 조선 왕릉의 문무석인은 투박한 한국인의 표정과 모습이 살아 있어 정감이 가는 반면, 유릉의 것은 정감은커녕 정체성 없는 세밀함만 있다. 결국 유릉의 석물 일부는 조선의 기술이, 나머지에는 일제와 서구의 기술이 도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릉의 석수 조각을 놓고 선진기술로 다리 부분 등을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긴 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다리가 부러지고 손상을 입은 것이 많다. 사실 조선 초기(건원릉과 헌릉)에도 짐승의 다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해 네 다리가 드러나게 조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석질은 인성이 약한 화강암이라 자주 갈라지고 부러지는 까닭에 점차 다리를 통째로 만들어 상징적 묘사를 했다. 석질도 경질이며 잘 튀는 강화돌이라 투박한 상징적·해학적 표현을 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우리 전통재료의 특성을 잘 파악한 선조의 지혜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릉의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과 제정(祭井) 두 우물이 아직까지 제 모습을 갖춘 채 남아 있다. 능에서 우물의 중요성과 기능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그리고 한국 전통건축의 진수인 어재궁이 잘 보존돼 있는 것도 다행이다. 담장 밖으로는 외재실 일부가 남아 있으나, 외금천교는 근래 북동쪽으로 옮겨지는 바람에 원형 경관을 잃어 아쉽다. 능원을 감싼 화소담도 조성 당시 일본식 콘크리트로 쌓아놓아 몰락하는 왕조의 역사를 되새겨볼 수 있는 장소다.

    지금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외금천교, 외재실, 수라간 등 훼손된 시설을 원래의 자리에 복원하는 작업이다. 그래야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세계인에게 왕릉과 황릉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세계유산이라 주장할 수 있다. 아울러 능 주변의 정비와 보존을 위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작업을 해나가는 한편 세계인이 함께 보고 느끼고 체험하도록 관광종합개발 계획부터 만들어야 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