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9

2011.03.21

게이와 정치범이 감방에서 만났을 때

연극 ‘거미 여인의 키스’

  • 현수정 공연칼럼니스트 eliza@paran.com

    입력2011-03-21 12: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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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이와 정치범이 감방에서 만났을 때
    연극 ‘거미 여인의 키스’(마누엘 피그 작, 이지나 연출)는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수감된 게이와 혁명에 대한 생각밖에 없는 이성애자 정치범이 한 감방에 수감된 상황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성격과 가치관, 취향 등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대조적인데, 이 때문에 이들의 오묘한 동거생활은 웃음을 자아낸다.

    ‘몰리나’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고 사랑 이야기만 좋아하는, 감상적인 게이다. 반면 ‘발렌틴’은 혁명을 위해서라면 사랑도 포기한다.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여주인공의 자태며 머리 장식 등을 자세히 묘사한다. 심지어 나치의 이념을 담고 있는 영화까지 아름답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발렌틴은 디테일을 생략한 줄거리의 뼈대만을 원하며, 몰리나를 “통속적이고 의식이 없다”고 비판한다.

    두 사람의 모습은 ‘현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몰리나는 환상 속으로 도피하면서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 하지만, 발렌틴은 “정신이 죽지 않으려면 현실을 직시하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작품을 끌고 가는 것은 끊임없이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몰리나다. 발렌틴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몰리나가 들려준 영화 이야기를 기억하고 엮고, 때로는 환상을 만들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몰리나는 발렌틴에 의해 ‘거미 여인’으로 표현되면서,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거미의 ‘음험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작품이 큰 감동을 주는 주요 원인은 ‘환상’과 ‘현실’의 대조에 있다. 비참한 현실과 아름다운 환상이 대비될 때 커다란 페이소스를 전달할 수 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판의 미로’ ‘어둠 속의 댄서’ 등에서 그러했듯, 처참하게 망가진 현실 속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절실한 환상은 관객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한편 몰리나의 환상 속에서 여주인공은 사랑을 이룰 수도 없고 행복한 결말을 맞지도 않는다. 이는 게이인 자신의 정체성이 투영된 것이고, 연극 전체의 내용과 연관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무대는 모던하게 디자인됐는데, 공간을 분리해주는 원통들은 조명에 따라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 수 있는 다채로움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아울러 두 사람의 정사 장면은 이중으로 만든 장막에 맺히는 어른어른한 그림자로 표현됐다. 피아노 한 대가 공연 내내 음악을 연주하며 공연의 분위기와 리듬감을 이끌어 통일성 있다.

    몰리나 역을 맡은 정성화는 극 내내 떠들고, 웃고, 울고, 노래하는 등 넘치는 에너지로 극을 이끌었다. 발렌틴 역의 최재웅 또한 역할을 잘 소화했다.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4월 17일까지, 02-764-8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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