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7

2010.10.11

세월 흘러도 연애편지는 가슴 떨려

게리 위닉 감독 ‘레터스 투 줄리엣’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10-10-11 12: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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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 흘러도 연애편지는 가슴 떨려
    줄리엣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해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을 판박이로 닮으란 법은 없다. 전 세계 여자들이 이탈리아 베로나의 발코니에서 줄리엣에게 편지를 쓰고, 또 다른 이탈리아 여자들은 그녀들에게 답장한다. 일종의 ‘여성의 전화 편지 버전’인 이 은밀한 일이 지금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된 ‘사랑의 도시’ 베로나에서 일어나고 있다.

    소피(어맨다 사이프리드 분)는 잡지사 ‘뉴요커’의 ‘팩트 체커’(책 속 사실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사람)로 일하는 작가 지망생이다. 식당 개업을 앞둔 약혼자 빅토(가엘 가르시아 버널 분)와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지만, 빅토는 와인 경매다, 송로 버섯이다 하며 소피를 방치한다. 혼자서 베로나를 둘러보던 소피는 줄리엣의 하우스에서 세계 각지에서 온 여성들이 줄리엣 앞으로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써서 담벼락에 붙여놓는 걸 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우연히 50년 동안 담벼락에 숨겨져 있던 클레어(버네사 레드그레이브 분)의 편지를 발견해 답장을 쓴 소피는 이것을 인연으로 클레어와 젊은 시절 헤어졌던 연인 로렌조(프랑코 네로 분)를 함께 찾아 나선다. 이 와중에 클레어 손자인 찰리는 소피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할머니가 상처받지나 않을까 염려해 사사건건 소피와 충돌한다.

    헤어진 연인을 찾아 베로나 전역을 찾아 헤매는 클레어는 여전히 ‘사랑이 죽을 수 없는, 죽지 않는’ 가능성의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다. 반면 팩트 체커라는 직업이 말해주듯 현실에 대한 확인을 계속하며 사는 소피는 눈앞에 있는 사랑, 즉 찰리조차 영원한 기다림의 블랙홀 속으로 밀어내려 한다.

    헤어진 옛 연인의 발자국을 뒤따르는 영화적 모티프는 ‘무도회의 수첩’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여기에 약혼자 대신 새로운 남자에게 떨리는 마음과 이루어질 수 없는 옛사랑의 그리움 등이 자유와 르네상스적인 일탈을 상징하는 이탈리아의 고풍스러운 풍광, 환한 햇볕과 겹쳐진다. 이미 영화는 ‘전망 좋은 방’이나 ‘온리 유’ ‘냉정과 열정 사이’ 등의 로맨틱 코미디와 별반 차이 없는 전략을 동원한다.



    ‘줄리엣’은 연인과 헤어진 세상 모든 여자의 이름이다. 이 줄리엣을 상징하는 두 여인이 클레어와 소피. 그런데 나는 젊은 소피, 즉 ‘맘마미아’의 신데렐라 어맨다 사이프리드보다 클레어 역의 늙은 배우 버네사 레드그레이브의 원숙함에 더 끌린다. 클레어가 금빛 물결 같은 신비의 머리채를 휘날리며 이탈리아 곳곳을 헤집고 다니다 결국 꿈에 그리던 로렌조를 만나 키스하는 순간은, 줄리엣이 로미오란 인생의 반쪽을 얻는 특별함의 정점을 이룬다. 더욱이 로렌조 역을 맡은 프랑코 네로와 클레어 역의 버네사 레드그레이브가 1967년 영화 ‘카멜롯’을 찍을 때 사랑에 빠져 40년을 함께 살아왔으니, 현실의 사랑과 영화의 사랑이 완벽히 일치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레터스 투 줄리엣’은 햇빛 가득한 관광도시 베로나를 배경으로 한 전형적인 엽서 영화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는 지나치게 문어체적이고 감정의 파이프라인은 밋밋하다. 이런 류의 로맨틱 영화에서 귀에 걸리는 음악이나 주인공의 심리적 억압과 내밀한 감정, 하다못해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유산이라도 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구식 사랑이 여전히 숨 쉬는 판타지 공간에서, 전 세계 곳곳의 줄리엣을 향해 할리우드는 이국의 언어로 사랑을 부르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오히려 슬퍼진다. 그 환영과 같은 시간의 마법은 다 어디로 갔는가. 스릴러가 판치는 작금의 영화판에서 장르 영화에게 진심으로 부탁한다. 로맨틱 코미디여, 사라진 마법의 시간을 돌려주오. 부유하는 뽀얀 숨겨진 감정의 씨앗들을 꽃피게 해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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