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측의 목소리 온도는 비슷한 정도로 냉랭했다. 9월 28일 지상파와 케이블TV(SO·종합유선방송사업자) 업계가 처음으로 ‘협상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수신료를 둘러싼 이들의 다툼을 보다 못한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가 마련한 자리였다. 양측은 오전 10시부터 두어 시간 의견을 나눴으나 소득은 ‘제로’. “형사 고발계획을 취소하고 유료화를 전제하지 않는 상태에서 협상하자”(SO), “‘2009년 12월 18일 이후 디지털 가입자의 재전송을 금지하라’는 재판부 판결을 이행하라”(지상파)는 요구에 둘 다 꿈쩍도 안 했다. 지상파의 대표자 격인 MBC의 한 관계자는 “본 테이블에 가면 수신료 협상이 논의되겠지만, 현재로서는 입장을 좁히기 힘들어 보인다”라고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추석 연휴 기간, TV로 여흥을 돋우던 국민들은 폭탄 뉴스에 눈이 동그래졌다. 바로 “추석 연휴 이후부터 케이블TV 가입자는 지상파 방송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후 ‘지상파 방송’에서 ‘지상파 광고’로 수위를 조정하긴 했지만, 그것도 꽤 충격적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은 9월 30일 열린 2차 협상에서 국면 전환을 맞았다. 이날 양측은 방통위의 중재로 보름간 ‘숙려 기간’을 갖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15일까지는 광고 대신 검은색 정지화면이 나오는 생뚱맞은 상황을 면하게 됐다.
법원 판결로 갈등 부각
이번 논란은 ‘지상파를 시청자에게 보여주는 대가로 SO들이 지상파 측에 사용료를 내느냐 마느냐’를 두고 지상파와 SO가 팽팽히 맞서는 꼴이다. 현재 전국 93개 SO는 지상파 채널과 케이블 방송채널(PP) 60~140여 개 그리고 지상파 채널을 시청자에게 제공하는데, 그간 PP 측에만 사용료(수신료의 20~25%)를 내왔다. 시청자들에겐 낯설지만 갑작스레 튀어나온 이슈는 아니다. 1995년 SO사업자가 탄생하면서부터 잠복해 있던 문제다. 한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1995년 출범한 우리나라 케이블TV는 이원 체계다. 방송채널(PP)은 콘텐츠를 생산하고, SO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그런데 SO가 자리 잡으면서 그간 지상파 난시청을 지원하던 RO(중계유선방송) 대부분이 SO로 전환했다. SO는 난시청 해소에 도움을 준다는 생각으로 지상파를 재전송해왔다. 한데 지상파가 2005년 즈음부터 ‘우리 콘텐츠를 합의 없이 쓰고 있으니 사용료를 내라’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양측은 지금껏 뾰족한 대안 없이 시간을 끌어왔다.”
해묵은 갈등이 최근 극적으로 부각된 계기는 법원 판결이다. 9월 8일 서울중앙지법은 지상파 3사가 CJ헬로비전 등 5개 주요 SO를 상대로 낸 ‘저작권 등 침해정지 및 예방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르면 SO들은 2009년 12월 8일 이후 디지털 가입자의 지상파 재전송을 멈춰야 한다. 하지만 SO 측이 판결 이행을 거부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것. 법원이 지상파의 손을 들어준 근거는 뭘까. 원주대 법학과 고민수 교수의 설명이다.
케이블 프로그램 제작사인 PP협의회도 기자회견을 열고 “SO 측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SO 측은 “수신 보조행위가 분명하다”라며 ‘판결 절대 불복’을 외치고 있다.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김진경 미디어지원국장은 “그간 지상파가 난시청 해소 의무에 소홀했고, 케이블 가입자가 늘면서 자연히 SO가 그 의무를 이행해왔다”고 반박했다. 한 SO 업계 관계자도 “지상파는 국가에서 주파수를 할당받았고, 5·7·11번이라는 황금채널의 이익을 누려왔다. 따라서 공적 책임이 있다. 이번 판결은 현장을 반영하지 않은 법리적 해석”이라며 불만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 MBC 뉴미디어기획부 이상술 차장은 “이들의 논리는 물건 가진 소유주에게 잘 먹고 잘 사니까 공짜로 달라는 격”이라며 “대체재가 있는 상황에서 지상파를 못 보게 된다는 것도 과장”이라고 맞받아쳤다.
땜질 처방으로 문제 계속 키워
이번 논란이 수신료를 둘러싼 단순한 밥그릇 싸움만은 아니다. 이들 간 갈등의 기저에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깔려 있다. 방송통신법에 따르면 2012년까지 지상파는 아날로그를 모두 디지털로 전환해야 한다. 서울과학대 매체공학과 최성진 교수는 “2년 2개월이 남았는데 현재 60% 정도 전환했을 뿐이다. 앞으로 어마어마한 자금이 필요한데, 사용료 요구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간 재전송 범위, 난시청 의무 등에 대한 법적 근거가 모호한 상태에서 자금 상황이 어려워지자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IPTV·위성채널과 SO 간의 형평성도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현재 SO의 경쟁자 격인 ‘SK브로드밴드’ 등 IPTV와 ‘스카이라이프’ 등 위성방송은 지상파에 사용료를 내고 있다. 지난 2007년 IPTV는 지상파와의 사용료 협상에서 SO의 무료 재전송을 협상 카드로 활용했다. 그때부터 지상파는 SO 재전송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의 한 관계자는 “현재 IPTV와 위성채널은 경쟁자의 고전으로 인한 반사이익을 내심 기대하는 중”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9월 13일 열린 SO협의회 임시 총회. 의사봉을 두드리는 이화동 협의회장.
이 복잡한 실타래를 풀 방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낡은 법 제도를 개선하면서 양측의 갈등도 조정해나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간 재전송 문제는 방통위 중재로 ‘그때그때’ 해결해왔다. 이와 관련해 고민수 교수는 “저작권은 사적계약원칙이 지배되는 부분이다. 양측 당사자가 정할 문제이므로 방통위가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미디어 체질 개선 계기 삼아야
법 제도와 관련해 방통위는 다양한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9월 30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방통위 손승현 뉴미디어정책과장은 의무 재송신 채널(현행 KBS1, EBS)을 확대하는 안과 일정한 조건으로 SO에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의무 제공 제도’ 등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법 제도 개선은 추후 일이라 하더라도 당장은 양측 간 합의가 문제다. 해결의 열쇠는 “얼마를 주고 얼마나 받느냐”에 있다. 최성진 교수는 “지금은 서로 원하는 가격을 받아내기 위한 전 단계다. SO도 현재는 무료화를 주장하지만, 가격이 합리적으로 떨어진다면 줄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지상파가 요구하는 사용료는 가입자당 월 280~320원(채널 1개 기준). 하지만 SO 측은 이 가격이 비합리적이라고 본다. 가뜩이나 저가로 형성된 유료방송 시장인데, 지상파에 사용료까지 내고서는 수지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SO 측 한 관계자는 “콘텐츠 가격은 파는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지상파는 SO의 기여도를 간과한 가격을 제시하고 있다”라며 가격의 비합리성을 꼬집었다.
이번 갈등을 미디어 ‘체질 개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디어 업계에는 재전송 외에도 다양한 숙제가 쌓여 있다. KBS 수신료, 외주제작사와 지상파의 기형적 관계, 보편적 시청권의 개념, 난시청 해소 의무 등이 대표적. 최성진 교수는 “SO와 PP들이 재전송에 이토록 민감한 것은 그들의 먹고살 거리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법제도가 환경을 따라잡지 못해 쌓인 병폐를 이번 기회에 대수술해야 한다”라며 말을 이었다.
“PP들이 지상파 방송을 재탕, 삼탕하는 것은 콘텐츠를 직접 생산할 능력이 없어서다. Mnet의 ‘슈퍼스타K’ 같은 프로그램이 대박 나도 그간 적자폭이 커서 이득은 미미한 수준이다. 이는 지나치게 낮게 책정된 가입료에 1차 원인이 있다. 지상파는 재전송료를 낮춰 ‘박리다매’를 지향해야 한다. 그래야만 SO와 PP의 경쟁력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
통신환경이 바뀌면서 ‘어쩌다 보니’ 지상파 재전송을 해오게 된 SO는 “우리 덕분에 지상파 채널이 널리 방영될 수 있었다”라고 말하고, 지상파 측은 “우리의 콘텐츠 때문에 SO들이 성장한 것”이라고 맞받아친다. ‘지상파 vs 케이블TV’의 2라운드가 어떤 시나리오로 흘러갈지는 미지수다. 소송과 협상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어 지루한 줄다리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일각에서는 “지상파 재전송을 중단하면 협상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전망도 한다.
양측은 새로운 디지털 환경을 기회로 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불행 중 다행은 이들의 안중에 시청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지치기 시작했다. 이제 양측 모두 본질을 흐리는 공방전은 삼가고, ‘책임성’과 ‘양보’를 생각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