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7

2010.10.11

특수부 검사 신화 붕괴…日열도 충격

증거 조작 범인 날조, 상관은 은폐 지시 … 검사들 줄줄이 구속, 조직 해체 여론 후폭풍

  • 도쿄=이종각 한일관계 전문 칼럼니스트 jonggak@hotmail.com

    입력2010-10-11 10: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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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수부 검사 신화 붕괴…日열도 충격
    검찰 특수부 주임검사가 압수한 피의자의 증거를 조작한 혐의로 구속되고, 그 검사의 상사였던 부부장과 부장이 검사의 조작을 묵인한 혐의로 구속되는 일본 검찰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오사카(大阪)지검 특수부의 마에다 스네히로(前田恒彦·43) 검사가 2009년 5월 유령 장애인단체가 우편요금 할인제도를 악용, 일반 기업의 광고우편을 대신해주고 차액 중 일부를 착복한 우편 부정사건의 주임검사를 맡은 데서 시작한다. 그는 검찰 내에서 피의자로부터 결정적 진술을 받아내 사건을 잘 해결하는 검사, 즉 ‘와리야(割り屋)’로 불리는 엘리트 검사였다.

    마에다 검사는 이 단체에 가짜 장애인단체 증명서를 발급해준 혐의로 후생노동성의 가미무라 쓰토무(上村勉·41) 계장을 2009년 5월 26일 구속하고, 이어 6월 14일에는 그의 상관인 무라키 아쓰코(村木厚子·54) 국장이 가짜 증명서 발행을 지시했다며 허위공문서 작성 및 동행사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7월 4일)했다.

    그런데 가미무라 피고의 자택에서 증거자료로 압수한 가짜 증명서가 보관된 플로피디스크의 최종 업데이트 날짜는 2004년 6월 1일 새벽이었다. 이것대로 작성 날짜가 6월 1일이라면 무라키 국장의 지시가 있었다 해도 ‘5월 중’에 지시한 것이 돼, 국장이 6월 초에 지시를 내렸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었다. 이에 마에다 검사는 무라키 국장이 2004년 6월 초에 가짜 증명서의 발급을 지시한 것으로 만들고자 디스크의 최종 업데이트 날짜를 ‘2004년 6월 8일’로 조작(7월 13일)했다.

    우편부정사건 꿰맞추기식 수사



    마에다 검사는 자신이 그려놓은 이 사건의 밑그림, 즉 ‘6월 초 국장의 지시로 부하가 가짜 증명서를 발급해준 후생노동성의 조직적인 범죄’에 억지로 꿰맞추려고 증거를 조작한 뒤 무라키 국장을 구속하고 기소로 몰고 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마에다 검사는 직속상관인 특수부 사가 모토아키(佐賀元明·49) 부부장과 오쓰보 히로미치(大坪弘道·57) 부장에게 증거 조작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고, 무라키 국장 등의 구속을 알리는 ‘착수보고서’에 의도적으로 데이터의 날짜를 기재하지 않았다. 이 보고서는 오사카지검 및 오사카고검, 최고검(한국의 대검에 해당)의 결재라인을 통과해 관련자 4명이 구속됐다.

    마에다 검사는 관련자들을 기소한 후인 7월 16일 디스크를 가미무라 피고 변호인 측에 반납했고, 이 무렵 친한 동료 검사에게 데이터 조작 사실을 고백했다. 이 동료 검사는 “설마 이런 일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후일(마에다 검사가 구속된 뒤 대검의 참고인 조사 때) 말했다.

    2010년 1월 27일, 무라키 국장에 대한 첫 공판에서 변호인 측이 검찰이 제시한 플로피디스크 최종 업데이트 날짜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이 사건이 불거졌다. 이에 마에다 검사는 어쩔 수 없이 오쓰보 부장과 사가 부부장에게 증거 조작을 보고했다.

    2월 초 마에다 검사에게서 전화로 첫 보고를 받은 사가 부부장은 사태의 심각성에 놀라 거의 흐느끼며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한 뒤 오쓰보 부장과 대책을 논의했다.

    오쓰보 부장과 사가 부부장은 증거 조작 사실이 드러나면 자신들은 지휘 책임을 져야 하고, 마에다 검사는 증거인멸죄에 의한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고 판단해 조작 사실을 은폐키로 했다. 사가 부부장은 마에다 검사에게 우선 후일 조작이 발각될 경우 ‘데이터가 변경된 것은 (컴퓨터를) 잘못 만진 과실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도록 입을 맞추었다.

    이어 두 상사는 마에다 검사에게 데이터 조작이 발각될 때를 대비, 그간의 경위를 적은 ‘상신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마에다 검사는 2월 10일경 두 상사에게 각각 상신서를 보고했다. 두 상사는 조작이 의도적이 아니라 ‘과실에 의한 것’으로 보이게 상신서 내용을 여러 차례 수정하도록 지시하고, 마에다 검사에겐 그 누구에게도 증거 조작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오쓰보 부장은 마에다 검사에게 “데이터 수치를 잘못 입력했다지?”라며 애써 실수로 인한 것임을 강조했다. 이 상신서를 오쓰보 부장은 오사카지검의 책임자인 지검장과 넘버2인 차장검사에게 올리지 않은 채 “마에다 검사가 데이터를 변경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단순한 실수이므로 문제가 없다”고 구두보고를 했다.

    이처럼 증거 조작은 관련 특수부 검사들의 은폐와 함구로 무사히(?) 넘어가는 듯했다. 올해 4월 오쓰보 부장과 사가 부부장은 각각 교토(京都)지검 차장검사, 고배(神戶)지검 특별형사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8월 중순, 무라키 국장에 대한 재판을 심리 중이던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검사가 유도해 피의자 조서를 만들었다”며 특수부의 수사 기법에 의문을 제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5개월여 수감생활을 한 뒤 보석 상태로 있던 무라키 국장은 무죄가 확정되면서 8월 말 후생노동성에 복직했다.

    이어 특수부의 데이터 조작 사실이 신문 등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대검은 수사를 시작해 9월 21일, 오사카지검 특수부에 계속 근무 중이던 마에다 검사를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했다. 일본 검찰이 현직 특수부 검사를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일본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소수정예 50여 명 ‘범죄 집단’으로 추락

    대검은 마에다 검사 구속 후인 9월 말, 특수부 출신 검사를 앞세워 오쓰보 전 부장과 사가 전 부부장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마에다 검사로부터 실수로 입력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들었고, 그렇게 믿었다. 고의라곤 생각지 않았으며 위에도 그렇게 보고했다”면서 은폐를 일관되게 부인했다. 대검은 두 사람이 연일 조사에서 은폐를 부인하며 ‘철저 항전’하자 신병을 구속하는 강경 카드를 꺼내 들었다. 마에다 검사의 집무실을 가택수색해 그가 구속 직전 컴퓨터에서 삭제한 상신서 파일을 복원, 두 상사가 수정한 증거도 확보했다.

    10월 1일 대검은 두 사람을 범인은닉 혐의로 구속했다. 특수부 주임검사 구속에 이어 그의 직속상관인 부부장, 부장이 구속되는 전대미문의 사태로 비화한 것이다. 이 사태는 연일 신문 1면 톱으로 보도되는 등 국민의 비상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특수부는 도쿄, 오사카, 나고야(名古屋) 세 지검에 설치돼 있다. 주로 정치인이나 관료의 부정부패 사건을 수사해 구속, 기소한다. 특수부 검사는 전국 검사(정원 1768명) 가운데 도쿄 36명, 오사카 11명, 나고야지검 7명으로 50여 명에 불과해 소수정예라 불린다.

    특수부는 그동안 록히드 사건, 리쿠르트 사건 등 정치적·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을 주로 담당해 소속 검사들은 엘리트 의식이 강하고, 특수부 출신이 검찰에서 출세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특수부 검사들이 “한 건 올려야 한다는 의식이 강한 나머지 무리하게 수사한다”는 지적도 받아왔다.

    실제 마에다 검사는 대검에 구속된 뒤, 증거를 조작한 이유에 대해 “플로피디스크의 날짜를 그대로 보고할 경우 (무라키 씨) 구속 결재가 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수사 현장까지 직접 와서 확인하는 오사카고검 간부가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특수부 검사로 근무하면서 공명심에 눈이 멀어 범인 조작까지 서슴지 않는 체질이 됐다고 할 수 있다.

    1976년 미국 록히드 항공사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은 당시 집권 자민당의 최대파벌 다나카파의 보스였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를 구속시킨 도쿄지검 특수부는 국민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법과 증거에 의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검찰 본래의 사명에 입각해 권력자에 굴하지 않고 성역 없는 수사를 펼친 검찰에 대한 신뢰와 격려의 표시였다.

    ‘최강 수사기관’으로 불렸던 일본 검찰 특수부는 이번 사건으로 증거를 조작해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날조하고, 조직 전체가 그 사실을 철저히 숨기는 ‘조직범죄’ 집단으로 추락했다. 일본 검찰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검찰총장 사퇴는 물론 차제에 특수부 해체 등 환골탈태를 해야 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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