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7

2010.10.11

아찔한 급발진 … “아, 이렇게 죽는구나”

단 5초 만에 차량 3대 파손하고 겨우 멈춰 … 소비자에 사고 입증책임 전가 당해보니 ‘황당’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10-10-11 09: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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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찔한 급발진 … “아, 이렇게 죽는구나”

    급발진 관련 사고가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으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진 바가 없다.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사고를 당한 차량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손됐다.

    추석 연휴 막바지였던 9월 23일 기자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후진 주차를 위해 변속기를 P모드(주차)에서 R모드(후진)로 옮기는 순간, 차가 엔진이 터질 듯한 굉음을 내며 전속력으로 후진해 뒤에 서 있던 차량을 받았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차는 오히려 전방으로 튕겨나가 앞서 주차해 있던 차량을 심하게 찌그러뜨린 뒤에야 겨우 멈췄다. 차량 3대가 파손되고, 2명의 사람이 다친 데 걸린 시간은 단 5초에 불과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폭주하는 차량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동차 전자파는 거짓말 가능

    급발진(急發進). 자동변속 차량이 정차 중이거나 낮은 속도로 달리는 중 예기치 못한 급가속으로 나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지난 추석에 유독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사고가 많았다. 9월 21일 울산 울주군 언양종합시장에선 차례 음식을 사러 나온 최모(60) 씨의 차량이 갑자기 굉음을 내며 상가로 돌진해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음 날에는 중부내륙고속도로 양평 방면 괴산휴게소에서 정차해 있던 차량이 시동을 걸자 휴게소 식당으로 들이닥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시민 11명을 잇따라 치받고 반대쪽을 부순 뒤에야 멈춰 선 사고가 일어났다.

    급발진 추정 사고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국산차와 수입차, 소형차와 중대형차 그리고 신차와 노후차 등 차종과 연식을 가리지 않고 발생한다. 1994년 한국소비자보호원(현 한국소비자원)에 급발진 사고 피해가 접수된 이후 꾸준히 증가세를 보여 1999년에는 연간 833건이나 됐다. 이후 접수 건수는 감소 추세를 보였지만 지난해에도 78건이나 되는 등 매년 수십 건씩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원인에 대해선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일각에서는 과거 수동식 차량에선 급발진 사고가 보고된 점이 없음을 들어 전자제어장치(ECU)의 오작동을 급발진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오토매틱 차량에 탑재하는 ECU는 점화 시기, 연료 분사량, 공회전과 최고 회전 수, 한계값 설정 등 엔진 핵심 기능을 정밀 제어하는 일종의 컴퓨터다.



    ECU 오작동 가능성을 밝혀내 2002년 자동차 분야 ‘명장’에 뽑힌 박병일 씨는 “자동차는 컴퓨터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미 전자화됐다. 급발진은 엔진과 관련한 복잡한 전자장치의 오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10년 전만 해도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밟거나 떼면 페달과 연결된 케이블이 엔진의 연료 밸브를 직접 열고 닫았다. 지금은 가속페달에 장착된 센서가 페달의 움직임을 감지한 뒤 그 정보를 ECU에 전달한다. 컴퓨터가 오작동을 일으키듯 ECU가 잘못된 신호를 엔진에 전달할 수 있다. 자동차는 거짓말을 안 한다지만 전자파는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자동차 제조사들은 운전자의 과실에 무게를 둔다. 따라서 급발진이란 용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 자동차 제조사 관계자는 “워낙 순간적인 상황이니까 자신이 브레이크를 밟았는지, 가속페달을 밟았는지 정확히 기억 못한다. 실제 급발진이라 보고된 차량을 가져와 정밀검사를 해봤는데 차체에서는 어떤 결함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급발진 가능성을 일축했다. 급발진 방지장치를 개발한 혜산발전기 관계자는 “후진하면서 몸을 뒤로 돌리거나 백미러를 볼 때 자신도 모르게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에 동시에 발이 걸쳐지는 경우가 많다. 이때 브레이크를 밟는다면 어떤 각도로 밟았는지,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에 따라 제동력이 제대로 안 들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급발진 논란으로 대규모 리콜 사태를 불러일으켰던 도요타 렉서스의 경우도 사실상 운전 과실로 결론이 내려졌다. 지난 8월 발표된 미국 고속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예비보고서에는 “도요타 렉서스 운전자들이 브레이크를 밟으려 했으나 실제로는 가속페달을 밟았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 차체 결함이 아니라 운전자 과실로 결론 내린 것으로 급발진을 부정하는 도요타 측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지금껏 급발진 추정사고가 발생하면 보험사들은 일단 피해 보상에 대해선 보험 처리를 하지만, 대부분 운전자 과실로 인정해왔다.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해자들은 직접 자동차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불사한다. 1996년에는 급발진 사고 피해자라 주장하는 190여 명이 자동차 3사를 상대로 피해보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간혹 1심에서 급발진 사고를 제조사 책임으로 인정하는 판례가 나오기도 하지만, 고등법원 이상 상급심에서 급발진 피해자가 자동차 제조사를 상대로 승소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10년 전 조사로 제조사에 면죄부

    구매한 지 일주일도 안 된 벤츠 E클래스 차량이 갑자기 건물 벽으로 돌진한 사고에서 1심 재판부는 “급발진 규명 책임은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와 판매사에 있다”며 “계약을 판매사와 한 만큼 피해 보상은 판매사가 배상하라”고 판시해 화제가 됐다. 하지만 최근 2심 재판부가 제조물 결함의 입증책임을 제조사에만 적용하면서, 차량을 잘못 만들었으면 제조사가 배상해야지 판매사가 배상할 문제가 아니라는 취지의 판시를 해 급발진의 원인 규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대법원이 급발진 사고와 관련해 판결을 내리는 데는 1999년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성능연구소 조사결과가 중요한 잣대로 적용된다. 자동차성능연구소는 1999년부터 3년간 엔진, 변속기, 제동장치 및 전자파 등 총 44개 항목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당시 결과 보고서에서 자동차성능연구소는 “ECU 오작동에 의한 엔진 회전속도 상승은 있을 수 있지만 급발진 사고로 이어질 만큼의 출력은 나오지 않는다”며 “기계적 결함은 없는 것으로 나왔고, 운전자 조작 미숙이 원인일 수 있다”고 결론을 냈다. 이후 추가로 진행된 급발진 원인 연구는 없다.

    그러다 보니 급발진 사고의 입증책임은 피해자가 아닌 제조사가 져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하다. 2000년에 제정된 ‘제조물책임법’이 제조물 결함으로 발생한 손해에 대해 제조업자 등의 손해배상책임을 규정하고 있으나, 손해배상을 위한 입증책임 관련 규정이 없어 민법상 불법행위 소송처럼 피해자가 고스란히 입증책임을 진다. 지난 7월 자동차 급발진, 전기밥솥 폭발 등 제조물 관련 사고로 인한 손해배상소송 시 입증책임을 제조사로 전환하는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다.

    개정안을 제출한 민주당 박선숙 의원 측은 “소비자가 제품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이 입은 피해가 제품의 결함에 따른 것임을 입증토록 하는 것은 부당하다. 입증책임을 제조업자에게 전환함으로써 자동차 급발진 사고 등 제조물 책임소송에서 일반 소비자가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라고 개정안 취지를 설명했다.

    정확한 원인 규명이 되지 않다 보니 급발진에 대한 예방책도 제한적이다. 박병일 씨는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에서 충분히 시동을 걸어서 배기판의 기기가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때 차량을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본적인 대책은 급발진에 대한 정확한 원인 규명이다. 자동차 정비업계 한 관계자는 “10년 전 조사 결과 하나로 자동차 제조사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국가적 차원에서 철저히 조사해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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