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4

2010.09.13

反正으로 정권 잡았지만 明나라 쫓다 ‘삼전도 굴욕’

인조와 인열왕후의 장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09-13 1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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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反正으로 정권 잡았지만 明나라 쫓다 ‘삼전도 굴욕’

    인조와 인열왕후의 장릉은 영조 때 옮겨졌다.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능원 양식으로 평가받는다.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자리한 장릉(長陵)은 병자호란, 남한산성 항전, 삼전도의 굴욕, 소현세자의 아버지로 알려진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 3~1649. 5)와 원비 인열왕후(仁烈王后, 1594~1635) 한씨의 합장릉이다.

    인조는 먼저 세상을 떠난 인열왕후를 파주 북쪽 운천리에 장사 지내면서 그 오른쪽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쌍릉으로 마련해두었다가 승하 후 묻혔다. 그러나 능 주위에 뱀과 전갈이 나타나는 바람에 영조 7년(1731)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비범한 외모 어려서부터 선조의 총애 받아

    인조는 1595년 11월 7일 임진왜란 중 피란지인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와 인빈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원종으로 추존)이고, 어머니는 인헌왕후(추존) 구씨다. 제15대 왕 광해군의 서조카(庶姪)이고, 인목대비에게는 서손자가 된다. 인조의 휘는 종(倧), 자는 화백(和伯)이다. 어려서 선조의 총애를 받은 인조는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많았다. 선조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이것은 한고조(漢高祖)의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인조는 1607년 능양도정(綾陽都正·도정은 조선시대 종실과 외척에 관한 일을 맡아 하던 정3품 벼슬을 가리킴)에 봉해졌다가 능양군으로 진봉(進封·봉작을 높여줌)됐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세자 책봉 문제로 고민하던 선조는 인빈김씨 소생의 신성군을 세자 삼으려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됐고, 이어 계비인 인목대비의 아들이자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물려주려던 차에 급서했다. 결국 왕위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세자가 된 공빈김씨 소생의 광해군에게 돌아갔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 반대파를 철저히 제거했다.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고 대비의 아버지를 반역죄로 몰아 사형에 처하는가 하면, 8세에 불과한 영창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냈다가 증살(蒸殺)케 했다(광해군 6년, 1611). 훗날 이러한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왔다.



    1615년 신성군의 양자로 간 능창군(인조의 막내동생)이 역모사건으로 투옥돼 자살하자, 능양군은 광해 15년(1623) 광해군에게 불만을 품은 서인 세력과 함께 반정을 일으켰다. 3월 12일 밤 대궐(창덕궁)을 장악한 반란군이 불을 질러 인정전만 남기고 모두 탔다. 광해군은 어의(御醫) 집에 숨어 있다 잡혔다. 잿더미가 된 침전에서 광해군이 숨겨놓은 은괘 4만 냥이 나왔고, 후원에서 어보(御寶·옥새)를 수습했다. 능양군은 곧장 경운궁(慶運宮·경희궁)에 유폐됐던 인목대비를 찾아가 어보를 바쳤다. 이에 기뻐한 인목대비가 그 자리에서 다시 옥새를 전하려 했으나 능양군이 환궁해 정전에서 받겠다며 사양했다. 정통성을 갖추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환궁 후 능양군이 서둘러 어보를 받으려 하자 이번에는 대비가 “먼저 이혼(李琿·광해군) 부자의 머리를 가져와라. 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뒤에야 책명을 내리겠다”고 했다. 이에 능양군 등이 “폐치(廢置·왕위를 폐하고 내버려둠)한 전례는 있으나 주륙(誅戮·죄를 물어 죽임)한 선례가 없다” 하며 어보를 받았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그동안 중립외교를 펴온 대북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친명사대주의를 표명해 정국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으로 결국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청나라와 군신관계가 됐다. 두 차례의 호란은 왜란에 비해 전쟁 기간이 짧았지만 피해는 엄청났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끌려갔다. 조정은 청에 대한 적대 감정과 복수심에 불탔다. 이 시기 명나라가 몰락하고 일본은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조는 대동법을 확대하는 등 정국을 주도하고자 했으나 정책 대부분이 이미 광해군 때 실시한 것이어서 새로운 발전은 없었다.

    능원에 뱀과 전갈 나타나 교하로 이장

    인열왕후는 고려의 태위(太尉) 한난(韓蘭)의 후손이며 청주가 본인 서평부원군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선조 27년(1594) 7월 1일 원주의 우소(仁洞)에서 태어나 무실동에서 자랐다. 왕비에 오른 지 13년 동안 친인척을 궁내에 들이지 않고 내정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부드럽고 온순하고 정결하고 조용했으며, 인자하고 후덕하고 공손하며 검소한 덕을 지녔다. 심지어 인조가 왕후를 위해 원유(園·정원)를 가꾸는 것도 자신을 위해서라면 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다. 인조와 슬하에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 등 5남을 두었다.

    인열왕후는 인조 13년(1635) 12월 9일 창덕궁 산실청에서 승하했다. 시호는 인(仁)을 따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서 인열(仁熱)이라 했다. 초장은 경기도 문산읍 운천리에 묘좌유향(卯坐酉向·동에서 서향하는 것)으로 모시고, 능호는 장릉(長陵)이라 했다. 이를 위해 이곳에 있던 무덤 756기를 이장했는데 무연고 묘에도 예를 갖춰줬다.

    인조 27년(1649) 5월 왕의 병세가 좋지 않아 침을 맞았다. 8일 인조가 위독해 세자(효종)가 손가락을 잘라 쾌유를 기원하지만 보람 없이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승하했다. 소식을 들은 중전(장열왕후)이 경덕궁에 머물다 급히 달려왔으나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다.

    대행왕(大行王·임금이 죽은 뒤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의 침상을 동쪽으로 향하게 하고, 속광(屬·임종 때 햇솜을 코밑에 놓아 숨졌는지 확인하는 것)을 행하고, 내시 2명이 지붕에 올라 상위복(上位復·임금이 평소에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마루에 올라 왼손으로 깃을,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 북향해 “임금님 돌아오소서”라고 외치는 것)을 세 번 하니 모두가 곡했다. 닷새째 되는 날 효종(봉림대군)이 즉위해 인조의 상례를 준비했다. 인열왕후의 장릉 왼쪽에 우상좌하의 쌍릉으로 예장했다.

    그러나 영조 7년 능원에 뱀과 전갈이 나타나자 불길하다고 해 교하고을로 옮기고 객사 뒤에 자좌오향(子坐午向·북좌남향)으로 모셨다. 파충류와 전갈은 돌 틈을 좋아하고, 특히 비가 온 후에 젖은 몸을 말리려고 바위나 마른땅을 찾는다. 그래서 능원은 석회와 진흙 등의 삼물을 이용해 빈틈을 없앤다. 천장한 장릉 내부의 재궁(梓宮·관)은 자좌(子坐·정남) 향인데 능침은 임좌(壬坐) 향으로 조영하며, 표석에 ‘외측임좌(外則壬坐)’라고 적었다.

    천장할 때 쌍릉을 합장릉으로 모셔 봉분의 형태와 규모, 조각이 바뀌었다. 봉분의 지름과 석물의 배설은 세종 영릉(英陵)의 예를 따르고, 병풍석 등의 십이간지 표식은 인석에 새긴 원래대로 했다. 즉 옛 능의 병풍석·난간석·혼유석 등은 형태와 척수(尺數) 등이 맞지 않아 그 자리에 묻고 새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파주 장릉은 초장 때 만든 문석인, 무석인, 동물상과 천장할 때 새로 만든 병풍석, 혼유석 등이 어우러져 17, 18세기의 석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反正으로 정권 잡았지만 明나라 쫓다 ‘삼전도 굴욕’

    1 장릉 곡장의 암키와와 수키와의 문양. 왕실을 상징하는 봉황, 용, 연꽃이 새겨져 있다. 2 장릉의 정자각 신계(동계) 배석의 아름다운 목단과 구름무늬. 3 수백 년 세월에도 끄떡없이 균형을 이룬 장릉의 혼유석. 현대 토목학자들도 감탄하는 조영기술이다.



    反正으로 정권 잡았지만 明나라 쫓다 ‘삼전도 굴욕’

    1 백두산 용맥의 기(氣)가 들어오는 모습을 잘 표현한 장릉의 능침 뒤편. 이것을 일부 풍수가는 잉(孕)이라고도 한다. 2 인석의 만개한 연화와 병풍석의 목단화는 장릉에서부터 나타나는 대표적 양식이다. 3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장릉의 무석인, 패배의 서러움을 간직한 모습으로 인조 때 작품이다.

    장릉은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 능제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등 사신(四神)의 형국이 완벽한 풍수적 길지에 반듯하게 조영됐다. 곡장 뒤 혈맥이 흐르는 능선의 표현도 특이하고 재미있다. 곡장의 조영도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곡장 중앙 태양석(원형의 지지돌·日月星辰)과 구름무늬를 도입한 것도 재미있다.

    병풍석의 면석(面石·석탑 기단의 대석과 갑석 사이를 막아 댄 넓은 돌)에는 보통 운문과 십이지신상을 새기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모란문, 연화문 등 화문을 새겨 새로운 양식을 남겼다. 이것은 이후 사도세자의 융릉과 홍릉, 유릉으로 이어졌다. 인석(引石·왕릉의 호석이나 병풍석에 얹은 돌)에도 만개한 화문이 있는데, 그 중심부에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장릉에는 혼유석(상석) 두 개가 나란히 있어 합장릉임을 알 수 있다. 반질반질하게 물갈이한 혼유석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완벽하다. 무게가 십수t이나 되는 두 개의 돌이 수백 년 동안 균형을 잃지 않게 조영한 기술에 현대 토목학자들도 감탄한다. 망주석에는 상행, 하행하는 세호(細虎·가늘게 새긴 호랑이로, 무덤을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이다)가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때부터 분명하게 세호가 나타난다. 장릉의 석호는 통통한 몸체에 짤막한 다리, 삐죽 튀어나온 송곳니를 지닌 독특한 형태다. 인조 때 만든 문무석인은 이전의 웅장하고 투박한 조각에서 벗어나 세련미를 보여준다.

    완벽한 균형 감각으로 조영한 혼유석

    맑은 날 장릉의 능침에서 멀리 조산(朝山)을 바라보면 부천의 계양산이 보인다. 계양산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묻힌 김포 장릉의 조산이기도 하다. 수십km나 떨어져 있지만 부모와 자식이 같은 조산을 바라보게 한 데서 영조의 깊은 뜻을 읽을 수 있다. 최근 교하지구에 신도시 건설이 한창이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두 능의 일치된 조산축이 훼손될까 우려된다. 두 능을 연결하는 녹지축의 통경선(중요문화재나 산 등을 볼 수 있게 일정한 폭으로 시설물을 설치하지 않는 것)을 두어 상징성을 강조하면 어떨까? 아버지를 향한 인조의 그리움을 배려해 신도시에 녹지축을 만든다면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런던 등 유럽에는 역사공간을 잇는 통경선과 녹지축을 연결한 사례가 종종 있다.

    인조는 정비 인열왕후 한씨와 장열왕후 조씨, 후궁 조씨 등 5명의 부인에게서 6남1녀를 두었다. 인조보다 스물아홉 살이나 어렸던 계비 장열왕후 조씨는 자식을 낳지 못하고, 효종이 죽자 대왕대비가 되면서 예송논쟁(상복 입는 기간을 문제로 해 일어난 서인과 남인의 정치 다툼)에 휘말렸으며, 1688년에 사망했다. 능호는 휘릉(徽陵)이며 구리시 동구릉역 내 서측 능선에 있다.

    일제강점기 토지 수탈을 위해 만든 측량 도면에 따르면 장릉의 재실 입구에 연지(蓮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전답이 됐다.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연지의 복원을 권고했다. 아울러 장릉은 교하읍을 이전하고 조영한 곳이라 전면의 사유지에 많은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신도시 조영 때 특별한 관리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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