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3

2010.04.27

왕과 왕비 혼령 이동 조선왕조 최초의 합장릉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04-20 15: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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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과 왕비 혼령 이동 조선왕조 최초의 합장릉

    영릉의 전경, 멀리 주산인 북성산이 보인다. 이런 형국을 회룡고조형이라 한다.

    경기도 여주군에 있는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왕 세종(世宗, 1397~1450)과 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심씨의 능으로,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 세종은 1397년 5월 15일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이며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졌다. 만백성의 스승인 세종이 태어난 날을 기려 ‘스승의 날’이 5월 15일이 됐다.

    세종은 1418년(태종 18)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왕세자로 책봉돼 22세에 제4대 임금에 등극했다. 그리고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 6개월간 재위하면서 ‘훈민정음’ 창제, 집현전 설치, 민본정치 실현 등 조선시대 정치·경제·사회의 안정과 문화의 융성을 일궈내며 역대 군왕 중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한 세종이 몸이 쇠약해지도록 공부만 하자 이를 걱정한 태종이 책을 모두 거둬들였다고 할 정도로 세종은 공부벌레였다.

    어깨에 메는 상여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는 영의정 심온의 딸로 세종과의 사이에 8남 2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이 제5대 문종, 둘째 아들이 제7대 세조이며 제6대 단종이 장손이다. 그러나 조선 개국공신 중 한 사람인 심온의 삶은 딸이 왕비가 된 후 평탄치 않았다. 외척세력을 철저히 배제했던 상왕 태종은 심온이 영의정이 되자 명나라 사신으로 파견, 국정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더니 돌아오자마자 체포했다. 심온은 수원으로 압송되던 중 자결했다.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병이 나자 동궁(세자)과 대군들이 산천, 신사, 불사로 가서 기도드리고 팔(臂)을 불태우며 소신공양을 했으나 그해 3월 24일 소헌왕후는 수양대군의 집에서 승하했다. 국장도감(장례위원장)은 영의정 황희(黃喜), 산릉도감은 우의정 하연(河演)이 맡았다. 승하 4개월이 되는 7월, 장례일을 택하는데 7일과 19일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서운관(풍수비서관)이 7일은 임금에게 안 좋고 19일은 금기일이라 하자 세종이 직접 7일로 결정했다. 장지를 결정할 때도 논란이 있었다. 신하들은 대모산 아래 서쪽이 좋지 않다고 했으나 세종은 부모 곁만 한 길지가 없다며 지금의 서초구 세곡동 인릉 주변에 자신과 왕비의 능을 만들었다. 세종의 결단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예조에서 “그동안 운구를 유거(柳車·재궁을 실어 소나 말로 운반하는 수레)로 한 것은 중국의 풍습으로,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아 불편하니 어깨에 메는 상여가 좋다”고 하자 이 말을 따랐다. 이것이 민가로 퍼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의정부에서 대행대비의 시호를 소헌, 효순, 효선으로 추천하자 세종은 “뛰어나고 깊이 깨달은 것이 소(昭)이고, 선을 행하여 기록하는 것이 헌(憲)”이라며 소헌으로 정했다.

    왕과 왕비 혼령 이동 조선왕조 최초의 합장릉

    영릉은 ‘국조오례의’의 형식을 따른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 혼유석이 2개인 것은 합장릉을 의미한다.

    한 달 뒤 능지의 산역 행사가 시작됐다. 현궁(玄宮·임금과 왕비의 봉분)은 같이 하고 광중(壙中·석실)은 달리하며 석양과 석호, 석인은 2개 광중의 예에 따르라 명했다. 왕후는 동측, 왕은 서측에 배치했다. 광의 깊이는 10척으로 했다. 광중 동실(왕후 방)의 천상에 먹칠을 하고 하늘 모양을 만들어 동서에 해와 달을 그리고 성신과 은하, 성좌를 둥글게 그렸다. 왕후의 석실 벽에는 분으로 바탕을 칠하고 서측에 백호, 북측에 현무, 동측에 청룡, 그리고 남측 문 두 짝에는 주작을 그렸다. 백호와 청룡은 남측으로, 현무와 주작은 서측으로 머리를 향한다. 이처럼 세종은 생전에 자신의 합장릉(수릉)을 조성하면서 현궁은 석실로 하고 삼물(석회·황토·마사토)과 숯가루, 본토를 사용했다.

    4년 뒤인 1450년 2월 16일 세종이 위독해 정사를 중단했는데 다음 날 막내아들인 영흥대군의 동별궁에서 승하했다. 세종은 일찍이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지내다 승하한 선왕들과 달리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하루도 국정을 놓지 않았다.

    세종에 대해 실록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며,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로우며,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침실)에 있을 때 배우기를 좋아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라고 기록한다. 의정부에서 존시를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 하고 묘호를 ‘세종(世宗)’이라 올리니 그대로 따랐다. 묘호를 올리면서 성군의 업적을 기록하는데 “태평한 정치와 거룩하신 공적이 탁연하여 비할 데 없다”라고 했다. 그해 6월 10일 장례 때 청조(靑鳥·푸른빛 봉황)가 능지를 점치고 황룡이 앞길을 인도했으며, 능지인 대모산(영릉 초장지의 주산으로 현재 서울 서초구 헌인릉 뒷산)을 향할 때 한강의 물조차 목메어 울고 바위굴이 어두워 구름조차 못 간다고 했다.

    장생수파 터로 옮겨

    그로부터 17년 뒤 단종을 폐하고 사약을 내린 세조는 신숙주, 한명회, 임원준, 서거정 등에게 영릉 천장을 명하나 풍수가들과 서거정이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468년 아버지 세조의 뜻을 이어받은 예종이 다시 천장을 요구하자 정인지, 신숙주, 노사신, 서거정, 한명회 등이 상지관의 의견을 들어 이계전 분묘가 장생수파(長生水破)의 터라고 추천했다.

    일화에 따르면 이들이 여주 북성산에 올라 사면을 바라볼 때 마침 산기슭에 정기가 어린 곳이 있어 찾아가보니 풍수적으로 뛰어난 지세였다. 하지만 이곳에는 이미 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이계전과 우의정을 지낸 이의손의 묘가 있었다. 일행은 서울로 돌아와 예종에게 이를 아뢰었다. 몇 군데 산릉 자리를 살펴보았지만, 이계전 무덤 자리야말로 자손이 창성하고 만세에 승업을 계승할 땅이라며 왕릉 모실 장소로 이보다 좋은 곳이 없다고 했다. 예종은 평안도 관찰사(지금의 도지사)로 있던 이인손의 맏아들 이극배를 불렀으나 대놓고 그 자리를 비워달라는 말은 못하고 은근히 그 뜻을 비쳤다. 이에 이극배는 아우들과 상의한 끝에 조상의 묘자리를 내놓았다. 예종 또한 기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대신 부모의 묘를 이장하는 것이 매우 애절한 일이라며 이극배를 의정부 우참찬(정2품)으로 승진시켰다.

    이극배의 집안에서도 이장을 위해 산소를 파고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왔다.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바람에 날려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묘를 옮기어 모셔라.”

    여러 사람이 신기하게 여겨 그대로 했더니 과연 연은 바람을 타고 서쪽 약 10리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 자리에 이장한 뒤에도 자손이 번창했다. 그곳은 연이 떨어진 마을이라 하여 ‘연주리’가 됐다. 훗날 영릉이 이 자리로 이장해서 조선 왕조가 100년 더 연장됐다는 설이 퍼졌다. 이를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 한다.

    왕과 왕비 혼령 이동 조선왕조 최초의 합장릉

    정자각 측면에서 바라본 영릉.

    영릉 터는 천하명당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풍수가들은 이곳을 용이 똬리를 트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 봉황이 알을 품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며, 북성산에서 떨어져나온 작은 산맥인 안산(案山)들이 마치 신하가 왕릉을 향해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는 데다 좌우의 청룡과 백호는 겹겹이 산머리를 돌아 혈(穴)을 감싸주어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형상을 한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의 명당이라 한다.

    천장을 할 때 세조의 뜻에 따라 석실이 아닌 회격실로 하고 광릉(光陵·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의 예를 따랐다. 병풍석을 쓰지 않고 명기 등은 새로 만들었다. 비석, 잡상, 정자각, 향관청 등은 옮겨서 사용하지 않고 땅에 묻었는데 이를 197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발굴했으나 비각만 발굴되고 다른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함께 발굴된 석물들은 영릉의 것이 아니라 옆에서 천장한 희릉의 것으로 2008년 판명됐다. 잡상들도 옮기지 않고 으슥한 곳에 묻었다. 이 유물들은 헌인릉 주변에 묻혀 있거나 수세기 후 인릉에 다시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1469년(예종 3) 2월 23일, 구지(舊址)를 천장하려 천궁을 하니 현궁에 물기 하나 없고, 재궁(齋宮)과 의복이 새것 같았다고 한다. 3월 6일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는 영흥(여주)으로 옮겨 안장됐다.

    왕과 왕비 혼령 이동 조선왕조 최초의 합장릉

    1970년대에 발굴된 영릉 초장지의 신도비, 청량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입구에 있다(왼쪽). 세종과 소헌왕후의 비. 영조 때 만들었다.

    영릉은 1469년 이장하면서 예종 때 선포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제도를 폐지하고, 회격으로 하는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능의 석물은 병석(屛石)에서 영저(靈杵)·영탁(靈鐸)·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만 조각해 조선 난간석의 기본을 확정했다. 또한 혼유석(왕릉의 봉분 앞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의 고석을 5개에서 4개로 줄이는 등 제도상 바뀐 것들도 있다. 난간석에 방위를 표시하기 위해 그동안 십이지신상을 조각해왔으나 이때부터 십이지간 문자로 표현한 것도 변화 중 하나다.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이 2개인 것은 합장릉임을 나타낸다. 합장릉은 2개의 격실 사이에 48cm의 창문(창혈)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통하게 했다.

    영릉은 1970년대 성역화 사업 중 원형 일부가 훼손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에서 우려를 하고 있다. 최근 재실 터가 발굴돼 재실의 원위치 복원과 경관 보존이 요구되고 있다.

    세종은 소헌왕후와 5명의 후궁 사이에 18남 4녀를 두었는데 이 중 첫째 문종의 현릉(顯陵)은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에 있으며, 둘째 세조의 광릉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99-1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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