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3

2010.04.27

4·19혁명, 사람은 가도 정신은 남았다

1960년 동아일보 발행 ‘민주혁명의 기록’ 화보집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10-04-20 1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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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 사람은 가도 정신은 남았다

    4월 19일 오전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교문을 나와 거리로 향하자 경찰들이 진압봉을 휘두르며 저지하고 있다.

    1960년 4월 19일, 10만여 명의 시위대가 서울 시내에 모였다. 시위대는 어떠한 정치세력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한목소리를 냈다. 장기집권을 하며 부정부패를 저지른 자유당 정권의 퇴진 요구. 이날 하루에만 전국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나왔으나 독재정권의 총과 몽둥이는 국민의 분노를 막지 못했다.

    분노는 하루아침에 폭발하지 않았다. 그해 2월 28일 대구 경북지역 고교생들이 대정부 시위에 나선 것이 도화선이 됐다.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대구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대구지역 고교 대표들은 당시 경북고 학생부위원장이었던 이대우 군(2009년 9월 작고)의 냉돌방에 모여 일당독재에 항거하는 학생데모를 결의했다. 2·28대구민주운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시위의 불길은 부산과 대전, 마산으로 이어졌고,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채 발견된 마산상고 김주열 군의 시신은 공분을 자아냈다.

    25일 서울의 대학교수 258명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사퇴 압박을 견디지 못한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틀 뒤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됐던 이기붕 씨 일가가 자살하면서 긴박했던 4·19혁명은 일단락됐다.

    4·19혁명이 일어난 지 한 달여가 지난 1960년 6월 1일 동아일보가 발간한 타블로이드판 52쪽짜리 사진집 ‘민주혁명의 기록(Struggle for Democracy in Korea)’에는 자유와 정의를 외치던 50년 전 역사가 283장의 현장 흑백사진과 함께 담겨 있다.

    4·19혁명, 사람은 가도 정신은 남았다
    4·19혁명, 사람은 가도 정신은 남았다
    4·19혁명, 사람은 가도 정신은 남았다
    4·19혁명, 사람은 가도 정신은 남았다
    1 11일 오후 4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



    2 18일 거리 시위 중 갑자기 나타난 100여 명의 정치깡패로부터 폭행을 당한 고려대 학생들.

    3 19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민주주의 사수’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 시위에 나선 학생들.

    4 서울 각 대학 교수들이 25일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 행진에 나섰다.

    5 26일 한 어린이가 폐허가 된 최인규 내무부 장관 집에서 그의 명패를 들어 쳐다보고 있다. 3·15부정선거를 주도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은 1961년 12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됐다.

    6 삼엄한 경비를 펼친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

    7 24일 서울 용산육군야구장에서 열린 4·19 합동위령제(서울시 주최)에서 유족이 위패를 부여잡고 오열하고 있다.

    8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서울 종로에서 질서회복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화보집 사진설명에는 ‘4월 26일 하오부터 학도는 질서회복의 선봉을 서 다시 한번 시민의 갈채를 받았다’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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