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6

2008.12.23

“다 죽을라”… 드라마, 위기의 계절

한류 노리고 거대 자본·스타 투입 … 출연료만 올렸다

  • 최지은 ‘10매거진’ 기자 www.10-magazine.com

    입력2008-12-17 20: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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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죽을라”… 드라마, 위기의 계절

    11월24일 열린 한국 드라마 PD협회 주최 기자간담회에서 이은규 회장은 “드라마 시장이 붕괴하고 있다”는 말로 상황의 심각성을 역설했다.

    12월4일 SBS 수목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20회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요즘 포털 사이트의 검색창에 이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자 조선의 천재 화공 김홍도 역을 연기했던 박신양의 이름을 치면 ‘박신양 출연료’ ‘박신양 출연정지’ ‘박신양 논란’이 연관 검색어로 뜬다.

    공교롭게도 ‘바람의 화원’ 마지막 회가 방송된 다음 날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회장 신현택)가 이사회를 열고, 2007년 방영된 SBS ‘쩐의 전쟁’ 연장 4회분 출연료로 6억8200만원을 요구했던 박신양에게 협회 회원사가 제작하는 드라마의 무기한 출연정지를 의결했기 때문이다.

    또한 협회는 각 방송사에 ‘쩐의 전쟁’ 제작사인 이김 프로덕션의 작품 편성 금지를 촉구하고 입회를 금지하기도 했는데, 정작 이 사태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급할 때는 어떻게든 데려다 쓰더니 이제 와서 배우 한 사람만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 논란의 시작에 대해서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볼 필요가 있다. 약 한 달 전인 11월24일, 여의도에서는 한국 드라마 PD협회가 주최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MBC 드라마 국장 출신인 이은규 회장을 비롯해 지상파 3사 드라마국 CP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는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 서서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위기’의 심각성이 현장 제작진의 목소리를 통해 공식적으로 드러났다. 이은규 회장은 “2004년 ‘겨울연가’와 ‘대장금’의 히트로 시작된 한류 열풍은 한국 드라마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만 방송사 내부의 PD, 작가 등 핵심 인재 대부분이 외부로 유출되고 드라마 제작비의 급격한 상승과 배우의 고액 출연료 등 문제들을 야기해 이로 인한 악순환이 전체 시장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작사 ‘찍을수록 적자’ 비명



    실제로 2005년부터 지상파 3사에서 방영된 80여 편의 미니시리즈 중 수익을 올린 것은 20여 편뿐, 나머지는 모두 적자를 냈다. 해외 시장을 겨냥해 기획되면서 적게는 수십억에서 많게는 수백억에 이르게 된 드라마 제작비는 마침내 해외 판매수익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제작사 내부에서는 “찍을수록 적자”라는 비명이 터져나온다. 결국 올 하반기에는 SBS 금요 드라마, KBS 2TV 일일 드라마, MBC 주말 특별기획이 차례로 폐지됐다. 3월에는 KBS ‘드라마시티’를 끝으로 단막극이 TV에서 사라졌고, 내년쯤에는 ‘드라마의 꽃’이라 불리는 미니시리즈조차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 역시 관계자들의 전망이다.

    배우의 고액 출연료가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신인급 연기자들도 미니시리즈 한 회당 1000만원가량의 출연료를 받고, ‘한류 스타’의 출연료는 5000만원에서 억대에 이르는 상황이 전체 제작비 상승과 배분의 불균형 등 ‘거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12월1일 드라마 PD협회가 주최한 ‘TV 드라마 위기와 출연료 정상화’ 세미나에서 언론개혁시민연대 양문석 사무총장은 “시청률 30%를 넘나드는 MBC ‘에덴의 동쪽’의 국대화(유동근 분) 회장이 고용인 하나 제대로 두지 못하고 살며, 대하 사극의 전투 신에 병사가 50명뿐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라는 말로 일부 배우에게 쏠리는 고액 출연료의 부작용이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는 상황을 꼬집었다. 결국 중견배우 김해숙을 필두로 송승헌 권상우 등 스타급 배우들이 자진 출연료 삭감의 뜻을 표하며 해결점을 찾던 차에 ‘박신양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몇몇 배우의 출연료 때문에 한국 드라마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2004년 한류 열풍을 기점으로 확산된 ‘드라마는 돈’이라는 인식은 기존 외주제작사 외에도 통신사와 대형 매니지먼트사 등 각종 자본을 드라마 시장에 끌어들였고, 이들은 앞다퉈 한류 스타를 내세운 대형 기획드라마를 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들은 규모와 수익성에 치중한 나머지 설득력 있는 스토리나 완성도를 갖추지 못했고, SBS ‘로비스트’와 KBS ‘못된 사랑’의 경우는 각각 송일국과 권상우를 주인공으로 기용하고도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참패했다.

    수십 개의 외주제작사가 난립하고 채널은 한정된 무한경쟁 상황에서 제작자들은 점점 시청률이나 해외 판매수익을 보장해줄 스타 캐스팅으로 몰렸고, 그렇지 못하면 참신한 기획 대신 저비용 저효율이라도 일정한 시청률이 보장되는 대중적인 기획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MBC ‘하얀 거탑’ ‘거침없이 하이킥’ ‘커피 프린스 1호점’을 비롯해 개성 있는 작품들이 쏟아졌던 지난해에 비해 올해에는 MBC ‘베토벤 바이러스’와 KBS ‘그들이 사는 세상’을 제외하면 새로운 시도가 눈에 띄는 드라마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세를 그대로 반영한다.

    “다 죽을라”… 드라마, 위기의 계절

    호화 캐스팅으로 기대를 모았던 ‘바람의 화원’.. 한국 영화가 불황에 빠지면서 박신양 문근영 같은 스크린 스타들이 안방극장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아시아에서 남미까지 ‘한류’ 열풍을 일으킨 드라마 ‘대장금’. 2008년의 드문 드라마 히트작으로 꼽히는 ‘베토벤 바이러스’ (왼쪽부터)

    단막극 폐지로 창작 기회 봉쇄

    무엇보다 MBC ‘베스트극장’과 KBS ‘드라마시티’ 등 단막극의 폐지는 한국 드라마를 만들어갈 젊은 창작자들에게서 기회를 빼앗아버렸다는 점에서 앞으로 심각한 문제가 될 전망이다. 그동안 많은 PD와 작가들이 시청률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단막극을 통해 자신들의 상상력을 실험하고 발전시켜왔으며, 그들이 바로 한국을 드라마 왕국으로 이끈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한류 드라마’로 기획하거나 ‘한류 스타’를 기용하지 않았어도 국내뿐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까지 성공을 거둔 ‘궁’의 황인뢰 PD와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이윤정 PD는 모두 ‘베스트극장’을 통해 자신들의 스타일을 만들어온 연출가들이다. 한류 열풍의 정점에 섰던 ‘겨울연가’ 역시 윤석호 PD가 90년대부터 ‘느낌’과 옴니버스 드라마 ‘컬러’ 등으로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영상미학을 실험하지 못했다면 나올 수 없었을 작품이다.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간단하다. 좋은, 그리고 잘 팔리는 문화상품을 만들고 싶다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과를 위해서도 최소한의 돈과 시간은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불황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면 호황이 오더라도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상업적 논리만을 기준으로 드라마를 기획하는 현실은 프로 선수 몇 명만 키우고 유소년 축구단을 모두 없애는 격”이라는 말로 단막극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한 KBS 드라마국 이강현 CP의 비유는 현 상황에 대한 매우 적절한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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