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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해 송유관은 ‘시한폭탄’

러·그루지야 지역분쟁 넘어 국제분쟁 … 양보할 수 없는 에너지 냉전시대 돌입

  • 그루지야 = 정위용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카스피해 송유관은 ‘시한폭탄’

카스피해 송유관은 ‘시한폭탄’

그리스에 사는 그루지야인들이 8월11일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 모여 러시아의 공격 중단을 촉구하는 시위를 펼치고 있다.

시커먼 매연을 내뿜으며 줄지어 남(南)오세티야로 달려가는 소련제 탱크, 츠힌발리로 가는 도로 곳곳에서 보급차량을 수리하는 러시아 병사들, 카프카스(코카서스) 산맥 계곡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포성….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이 일어난 지 이틀째인 8월9일 러시아 영토 북(北)오세티야에서 기자가 목격한 장면들이다.

전쟁이 일어난 남오세티야를 10km 앞둔 지점에서도 러시아 행군 부대들은 한가한 표정이었다. 소련제 탱크에 올라탄 군인들은 더운 날씨 탓에 웃통을 벗은 채 담배를 물고 있었고, 소총을 옆에 세워놓고 조는 경계병들도 눈에 띄었다.

전방으로 투입되는 병사들 중에는 순수 러시아 태생도 섞여 있다. 하지만 카프카스에서 태어났거나 중앙아시아 출신 군인들이 다수였다.

소련 시절이나 지금이나 러시아는 변방지역에서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선호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국 간의 전쟁에 휘말린 오랑캐(夷) 병사들에게서 하늘을 찌를 듯한 사기나 긴장감을 기대하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제정러시아와 소련 시절에는 변방지역 소수민족 정책이 그런대로 성공을 거뒀다. 오세티야인들이나 그루지야인들은 제정러시아 때 카프카스 산맥에 거주하던 50개 민족 가운데 하나였다.

러, 변방지역 이이제이 정책 선호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직후 그루지야에서는 혁명 주도세력 볼셰비키가 비주류였다. 스탈린이 변방민족 말살 정책을 내놓을 때까지 그루지야는 멘셰비키가 통치했다. 이 멘세비키들은 볼셰비키에 줄을 섰던 스탈린과 그의 고향 친구들 손에 하나 둘씩 사라졌다.

스탈린과 그의 고향 후배 베리야(소련 비밀경찰의 대부)는 이 지역에서 민족 뒤섞기 정책을 펼쳤다. 같은 민족이 밀집된 지역에서는 강제이주 정책으로 민족을 분산시키는 한편 다른 민족끼리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도록 했다. 이른바 분할통치(Devide and Rule) 기술이었다.

하지만 이런 통치 기술은 사회주의 말기에 소련을 해체하는 힘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1980년대 말 미하일 고르바초프 초대 소련 대통령 시절 변방에서 터져나왔던 소수민족 독립운동이 그것이다.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는 그루지야나 오세티야를 피해가지 않았다. 1991년 3월 그루지야는 발트 3국 가운데 한 민족이었던 리투아니아의 선례를 보고 소련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그해 5월 그루지야 국민들은 반체제 작가 즈비야드 감사후르디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오세티야인들은 분리독립 대열에 끼어들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작은 민족이었다. 게다가 카프카스 산맥을 중심으로 남북이 갈려 있었다. 소련 붕괴의 원심력은 오세티야인들에게도 미쳤으나 신생독립국들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1991년 그루지야에 살던 오세티야인들은 감사후르디아의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며 궐기했으나 그루지야 정부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들은 또 소련 붕괴 후 무주공산이 된 토지와 토착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1992년 가을 폭동에 참여했으나 내륙에 둘러싸인 인종 섬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신생독립국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시점도 그때였다. 러시아가 남오세티야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과 오세티야인들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그루지야 정부군과 남오세티야 무장군의 분쟁을 중재한 뒤 남오세티야에 평화유지군(PKO)을 주둔시켰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그루지야 전쟁과 휴전 논란의 씨앗은 1990년대 초반에 심어진 셈이다.

전후 복구 작업 치열한 싸움 예상

카스피해 송유관은 ‘시한폭탄’

세계 최장의 송유관이 지나는 그루지야 인근 지역.

그런데 올해 전쟁은 1990년대의 지역분쟁 틀을 넘어섰다. 분쟁지역을 제외한 그루지야 본토 내 러시아 정규군의 점령, 러시아군의 폭격을 받은 그루지야에 대한 미국의 지원 선언, 유럽의 휴전 중재 등은 냉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전쟁 도중 북오세티야에서 만난 그루지야 출신 러시아 국적자들이나 오세티야인들은 이번 전쟁을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으로 보고 있었다.

인구 500만명도 되지 않는 그루지야는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를 경유, 터키의 항구 세이한으로 이어지는 1760km의 세계 최장 송유관(BTC)이 지나는 나라다. 하루 100만 배럴의 처리능력을 갖고 있는 이 송유관은 에너지 강국 러시아를 배제시킨 첫 대규모 송유관이다.

유럽과 미국은 이 송유관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중동 의존도를 줄이고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의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는 루트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도 카스피해 원유와 중앙아시아의 가스에 사활적 이해를 걸고 있다. 카프카스 산맥 주변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잃으면 천연가스와 원유에 대한 독과점적 공급권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루지야 현지인들이 “이번 전쟁의 배후 동력은 카스피해의 원유”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러시아와 그루지야가 휴전에 합의했지만 평화협정과 함께 전후 복구작업에 들어갈 때도 미국 러시아 유럽 국가들은 이 지역에서 물리적 충돌 못지않은 치열한 싸움을 벌일 것이 뻔하다.



주간동아 2008.09.02 651호 (p32~34)

그루지야 = 정위용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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