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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의 휴대폰 문화인류학

무선 핫라인 타고 사랑이 흐른다

무선 핫라인 타고 사랑이 흐른다

무선 핫라인 타고 사랑이 흐른다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고정희 시인의 ‘고백’이라는 시(詩) 전문이다. 연애 감정을 감전 현상으로 묘사한 것이 흥미롭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인 비유만은 아니다. 마음의 움직임은 두뇌의 작용이고, 뇌세포 사이를 잇는 시냅스에 전기자극이 일어나면서 감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에도 전류가 흐른다. 전기가 통하면 불이 켜지는 ‘에너지 볼’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두 사람이 각각 들고 손을 잡으면 거기에 빛이 들어온다. 사랑에 빠질 때 가슴에 스파크가 일어나는 듯한 느낌이 이는 것은 필경 전자·생리적인 현상이리라. 연인을 향한 애틋한 감정을 감전에 비유한 시인의 ‘과학적인’ 통찰이 탁월하다.

전화가 등장하면서 ‘그리움의 전깃줄’은 가시적인 물질로 경험되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진 연인들은 전화를 통해 목소리를 들으며 그리움을 달래고, 또한 그리움을 더욱 키우게 됐다. 전화는 편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슴과 가슴을 이어주는 중요한 매체가 된 것이다.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남녀는 얼굴을 마주 보며 하기 힘든 사랑고백을 전화로 한다. 그런가 하면 술에 취한 밤, 헤어진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거는 남자들도 있다.

긴밀하고 빈번한 소통 ‘연애 필수품’

이제 급속하게 사라져가거나 찾는 이 거의 없이 방치된 공중전화. 지난 반세기 동안 그 수화기를 붙들고 밀어를 건네거나 흐느끼며 작별을 고한 연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장희 씨가 1974년 발표한 ‘그건 너’라는 노래 가사를 보자.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사귀고 싶지만 차마 그러자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 남자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스티비 원더의 노래처럼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I just called to say how much I care”라고 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전화를 통한 속삭임은 여성들에게 더욱 가슴 뭉클한 경험인 듯하다. 이상은의 노래 ‘사랑해, 사랑해’에는 그 간절함이 잘 표현돼 있다. ‘오늘처럼 따사로운 아침엔/ 너의 목소리 들려오는 전화기에 대고/ 사랑해 사랑해 얘기하고 싶어….’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에도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라는 구절이 있다. 7080 세대가 즐겨 듣던 팝송 가운데 ‘As Soon As I Hang Up The Phone’ ‘Telephone Line’ 등에서도 비슷한 정서가 배어난다. 곁에 있지 않기에 전화선을 타고 오가는 대화의 애절함은 각별하다.

그러나 사랑을 고백해도 상대가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 전화는 야속하기 짝이 없는 미디어다. 공일오비가 1990년 발표한 ‘텅 빈 거리에서’를 들어보자. ‘떨리는 수화기를 들고 너를 사랑해/ 눈물을 흘리며 말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야윈 두 손에 외로운 동전 두 개뿐’. 눈앞에 상대가 있으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표정이라도 읽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듯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의 핫라인으로 자리매김해온 전화는 휴대전화 시대에 접어들어 한결 뜨거워졌다. 무선통신망이 어느 나라보다 잘 갖춰진 한국에서도 통신이 교란상태에 빠질 때가 있다. 바로 첫눈 오는 날이다. 하얀 눈이 쏟아지면 연인들은 일제히 휴대전화를 열고 기쁜 마음을 문자메시지로 보낸다. 1시간에 무려 2000만 통이 날아다닌다고 한다. 그 때문에 통신망에 과부하가 걸려 잠시 송수신이 중단되는 것이다.

이제 휴대전화는 연애의 필수품이다. “난 휴대전화 따윈 필요 없어”라며 단출한 생활을 꾸려가던 사람도 애인이 생기면 장만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젊은이들은 소개팅할 때도 미리 휴대전화로 사진을 교환해 얼굴을 본 뒤 만나볼지를 결정한다. 휴대전화가 아니라면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들어가 용모를 확인한다. ‘포샵’ 기술이 발달해 폰 사진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아무튼 연애에 돌입하면 휴대전화의 가치는 절대적이 된다. 연애 기간 중 휴대전화를 분실해 며칠간 통화가 되지 않는다면 관계가 위기로 치달을 수 있다. 그만큼 연애에는 긴밀하고 빈번한 소통이 필요하다. 워낙 연애라는 것이 마음의 나눔이고, 메시지가 그 안에 넘쳐나게 마련이다. 예전에 무선전화기에 붙어 있던 문구 ‘용건만 간단히’는 이제 옛말이 됐다.

휴대전화에 관한 대학생들의 경험을 조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현재 여자친구와 사귀기 전에 딱 두 번 만났다. 그것도 장시간 만난 게 아니라 밥 한 끼 먹었을 뿐이다. 하지만 문자메시지는 2000통 넘게 주고받았다.’ 1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인간관계다.

만일 로미오와 줄리엣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다면? 춘향이와 이 도령이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면? 전혀 다른 러브스토리가 됐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전혀 새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 노동세계에서 일의 도구로 주로 쓰이던 전화가 이제 놀이세계에서 완구로 활용되고 있다. 그 주역은 바로 젊은 세대이고, 연애가 그중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인류가 발명한 소통의 도구 중 가장 탁월한 휴대전화, 그 첨단기기를 가장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다.



주간동아 617호 (p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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