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7

2008.01.01

17대 대선 미디어 승자는 라디오?

정치토크 등 시사프로그램 상한가, 허경영·에리카 김 등 출연해 화제 뿌리기도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7-12-26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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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대 대선 미디어 승자는 라디오?

    11월30일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여의도 MBC 사옥 앞에 몰려와 ‘BBK’보도’에 대한 항의시위를 벌였다.

    11월16일 아침 출근길 버스 안. 책을 읽거나 MP3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사람도 간간이 눈에 띄었지만 승객 대부분은 운전기사가 선택한 라디오 채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방송 중인 프로그램은 ‘손석희의 시선집중’(MBC). 아침 시사프로 청취율의 절반을 차지해 ‘방송권력’이라고까지 불리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승객들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BBK 연루 의혹에 관한 쟁점을 놓고 한나라당 측 고승덕 변호사와 대통합민주신당 정봉주 의원이 펼치는 공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오전 6시부터 9시까지 출근길 차 안에서 엇비슷하게 반복되는 모습이다. 특히 대통령 선거운동이 진행된 11월과 12월에는 주요 후보 캠프의 참모들이 매일 아침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핵심 이슈를 놓고 공박을 계속했다.

    정치권에선 “라디오 출연해야 진짜 실세”

    2000년대 들어 새롭게 주목받는 매체는 다름 아닌 라디오다. 주목도와 영향력이 커진 만큼 선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방송계는 그동안 라디오의 주요 청취층을 TV·신문 등 주류 매체에서 배제된 10대 청소년이나 40대 이상 주부, 노년층으로 상정하고 프로그램을 공급해왔다. 한마디로 라디오는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매력적이지 못한 존재였던 것.

    그런 상황에서, 더욱이 인터넷과 DMB(이동 멀티미디어 방송 서비스) 등 뉴미디어가 범람하는 가운데 라디오라는 ‘올드 미디어’가 부활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간 일부 학자들은 자동차 문화가 보편화된 미국의 예를 들며 “우리나라의 자동차 출퇴근 인구가 1000만명 시대에 돌입하면서 라디오의 부활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해석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라디오 저널리즘의 부활’을 자동차 대수의 급증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뭔가 미진하다. 도대체 한국의 미디어 지형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정치와 라디오의 거리는 2002년 제16대 대선을 전후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는 게 정설이다. 기존 미디어 간에 정치적 편가르기가 극심해지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인터넷 매체들이 포털뉴스에 유통되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민들이 사건 당사자들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라디오 정치’에 가장 먼저 적응한 주인공은 노무현 후보였다. 노 대통령은 2002년 대선후보 시절 ‘라디오21’에 직접 참여했고, 집권 이후에는 여성들이 즐겨 듣는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하며 자신의 감수성을 대중에게 전했다.

    라디오 저널리즘의 부활을 얘기할 때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빼놓을 수 없다. 라디오 시사 정치토크쇼의 서막을 알린 ‘손석희의 시선집중’이 탄생한 해는 2000년 10월. 이후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 그날의 가장 이슈가 되는 인물을 초청해 앵커와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은 하나의 방송 포맷으로 자리매김했다.

    MBC가 ‘시선집중’으로 관심 끌기에 성공하자 KBS와 SBS 같은 경쟁사뿐 아니라 CBS(기독교방송), TBS(교통방송), PBS(평화방송) 등 라디오 전문 채널들도 다양한 포맷의 시사프로그램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정치인은 물론 장·차관 등 고위 관료들까지 라디오에 나오는 게 문화로 정착됐다.

    스타로 발돋움한 방송 앵커들도 속출했다. 이에 따라 정치권에선 “여의도에 출근하기 전 라디오에 출연해야 진짜 실세”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조금 과장하면 라디오 아침 시사프로그램을 빼놓고는 한국정치를 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7대 대선 미디어 승자는 라디오?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백지연의 ‘SBS 전망대’, KBS1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백운기입니다’(왼쪽부터)

    이번 대선에서도 라디오를 둘러싼 해프닝은 적지 않았다.

    기호 8번 허경영 후보는 새마을운동 주제곡인 ‘새나라 노래’를 개작한 광고를 라디오에 집중적으로 내보내 유권자들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그는 12월13일 평화방송에 출연해 “박정희 전 대통령 생전에 나와 박근혜 전 대표 사이에 혼담이 있었다”는 발언으로 박 전 대표에게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놀랍게도 대중은 “거북하다”보다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른바 허 후보는 필터링이 불가능한 생방송의 약점을 이용한 셈이다.

    11월30일에는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여의도 MBC 본사를 항의 방문하고, MBC 정문 앞에서 3000여 명의 한나라당 시위대가 촛불집회를 갖는 일도 있었다. ‘MBC의 편파방송’에 대한 항의였다.

    2000년 탄생한 ‘손석희의 시선집중’ 최고 인기 구가

    ‘사건’의 시발점은 11월22일 아침. BBK 김경준 대표의 누나 에리카 김이 ‘시선집중’ 전화 인터뷰에서 무려 30분 동안 이명박 후보를 공격한 게 발단이었다. 그동안 에리카 김의 지면 인터뷰는 몇 차례 있었지만 생방송을 통해 육성 인터뷰가 나오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후 각종 매체들은 ‘시선집중’ 인터뷰를 재료 삼아 기사를 쏟아냈다.

    당연히 한나라당은 강력히 반발했다. 한나라당 이방호 사무총장은 “이런 사태가 계속되면 방송 제작자, 방송사, 방송인에 대해 손해배상청구 등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고, 나아가 ‘MBC 100분 토론’ 출연까지 거부하고 나섰다.

    파문이 확산되자 선거방송심의위원회는 이례적으로 ‘시선집중’에 ‘객관성 결여’와 ‘범죄사건 보도에 관한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주의’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MBC 노조, 학계, 시민사회 단체들이 “미디어의 인물 인터뷰에 대한 조치로는 납득하기 힘들다”는 비판을 쏟아내자 선거방송심의위원회는 12월11일 이 결정을 취소했고, 이 결정에 불복한 심의위원 두 명이 사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편 ‘시선집중’의 경쟁자 격인 KBS1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백운기입니다’는 진행자가 특정 정치세력에 우호적인 것 아니냐는 누리꾼들의 의혹에 시달려온 사례다. 제작진의 부인에도 누리꾼들은 “KBS가 보수 성향의 앵커를 내세워 같은 시간대 MBC와 경쟁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는 불만을 시청자 게시판에 올렸다. 이 프로그램뿐 아니라 기자와 아나운서, 시사평론가 출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들은 “진행자의 당파성이 지나치다”는 청취자 불만에 시달리는 일이 비일비재다.

    이 같은 일들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다”는 방송사 측의 반론과는 무관하게 라디오 저널리즘이 대선 정국에 미치는 힘이 작지 않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 인터넷은 물론 TV토론의 영향력까지 퇴조한 것이 확인되면서 라디오의 존재감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물론 지난 대선 중 불거진 한나라당과 MBC 라디오의 ‘전쟁’을 납득하기 힘들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이라지만 청취율이 TV보다 눈에 띄게 낮을 뿐 아니라 특종보도도 자주 나오는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특종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특정 시각이 증폭돼 전달되는 게 두렵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매일 아침마다 MBC의 ‘BBK 타령’에 속앓이를 해왔다는 불만이다.

    17대 대선 미디어 승자는 라디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오른쪽)의 오바마 후보 지지는 선거판의 지각변동을 불러왔다.

    PD와 작가들은 섭외전쟁으로 ‘몸살’

    1990년대까지만 해도 미디어의 힘을 측정하는 지표는 ‘의제 설정(agenda setting)’ 기능이었고, 이 힘은 대체로 신문 1면 헤드라인이나 사설 또는 밤 9시 TV 뉴스를 통해 나왔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와 정치담론 영역에서 라디오와 인터넷의 영향력이 급성장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CBS ‘뉴스레이더’ 담당자인 양기엽 국장은 “이제는 의제 설정보다 증폭 기능이 더 중요해졌다”며 “이 기능을 라디오 아침 시사프로그램들이 맡고 있다”고 자평한다.

    애초 뉴스 전달에 주력하던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은 점차 화제 인물 인터뷰에 힘을 쏟으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일견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행자 개인의 위상이 높아진 상황에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에 기댄 정치토크쇼로 진화해나간 것.

    이러한 ‘라디오 저널리즘’의 득세를 놓고 신문기자 출신인 박재영 고려대 교수(신문방송학)는 “대화 저널리즘(라디오와 블로그 등)이 속보 중심의 저널리즘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정치토크쇼의 힘은 미디어 선진국인 미국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라디오는 아니지만 CNN의 래리 킹이나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의 실질적인 러닝메이트로까지 거론되는 오프라 윈프리는 출연자와의 정감어린, 때로는 날선 논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한 사례다. 우리나라에선 손석희(현 성신여대 교수) 씨가 한 시사주간지가 평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부문에서 수년째 1위를 고수할 정도로 라디오 방송의 영향력이 정착 단계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방송사들은 대중에게 신뢰를 주면서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스타급 진행자의 스카우트에 열을 올리고 있다. 최근 국내 여성앵커 1호인 백지연 씨가 성가를 높이고 있는 ‘SBS 전망대’가 대표적인 예인데, 이 프로그램은 백씨 이전에 김신명숙(여성운동가) 진중권(시사평론가) 정진홍(언론인) 김종찬 봉두완 박경재 씨 등 중량감 있는 인물들을 내세우며 손씨와 대결구도를 구축했다.

    앵커들이 화려한 정치토크쇼로 청취자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고민에 빠져 있다면, 담당 PD와 작가들은 매일 ‘섭외전쟁’으로 몸살을 앓는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이슈 메이커는 먼저 인터뷰를 약속한 방송사에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각 방송사 라디오국 담당자들은 “취재기자들에게 제1보가 특종이냐 낙종이냐를 가리는 잣대라면 우리는 이슈 속 인물 섭외가 기준”이라며 섭외 스트레스를 토로한다.

    우리나라에서 정치 이슈를 중심으로 라디오 저널리즘이 꽃피웠다지만, 정반대 분석도 없지 않다. 대통령 후보 여론조사 1위의 위상이 1년 내내 변화가 없자 일각에서 “라디오(손석희)의 영향력이 줄었나?” 하는 회의론이 불거진 것. 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젊은 논객들이 활동하는 인터넷 블로그를 제외하고는 정치 논쟁이 사라져버린 한국적 특성을 고려할 때 라디오의 영향력은 강화된 것으로 보는 게 옳다”고 반박한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한은 라디오를 “팩트(fact)와 감성을 동시에 전달하는 데 적합한 핫미디어(hot media)”라고 정의했다. 라디오는 청취자에게 깊고 내밀한 경험을 제공하며 영향력을 극대화한다는 얘기다. 21세기 초 우리나라에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이 급부상한 상황도 이런 맥락에서 일정 부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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