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7

2008.01.01

허탈…장탄식…울음 믿기 힘든 ‘낙선의 밤’

鄭·李·文 후보 “국민 선택 겸허히 수용, 새출발 다짐”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7-12-26 13: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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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탈…장탄식…울음 믿기 힘든 ‘낙선의 밤’

    정동영, 이회창, 문국현

    한나라당 이명박 당선자가 500만 표가 넘는 역대 최다 표차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제쳤다. 낙선자들은 한결같이 패배를 인정하면서 성원해준 유권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동영, 이회창 후보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 정 후보는 당권 경쟁 과정에서 책임 추궁을 당할 가능성이 적지 않고, 무소속 이회창 후보 측은 당초 기대보다 낮은 지지율로 총선가도에 적신호가 켜졌다. 사재로 대선을 치른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도 비슷한 처지다.

    12월19일 투표 당일 아침 8시30분, 정 후보는 광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동행 의원은 없었다. 수행비서 한 사람, 그리고 군 복무 중 투표일에 맞춰 휴가 나온 아들이 함께했다. 깊은 회한과 침묵, 눈물의 하루는 그렇게 밝았다.

    “고생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 후보는 이날 오전 10시 광주 5·18민주묘지 참배 이후 버스로 기름 유출사고 현장인 충남 태안 모항항으로 이동해 2시간 정도 자원봉사를 한 뒤 서울로 향했다. 버스에 올라타면서 굳게 닫혔던 정 후보의 입이 열렸다.



    “투표율이 얼마나 됐죠?”

    오후 3시40분, 투표 마감시간인 6시까지는 2시간 20분도 채 남지 않았지만 투표율은 47%(최종투표율 63%)에 머물러 있었다. 수행비서 두 사람과 자원봉사자 등 10여 명이 함께 탄 버스는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후 6시 정각, 정 후보는 서울에 도착해 홍은동 자택으로 가기 위해 갈아탄 승합차 안에서 3개 방송사에서 공동으로 실시한 출구조사 결과를 접했다. 순간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정 후보나 함께 있던 수행비서들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시간, 대통합민주신당 영등포 당사 상황실 대형 스크린 앞에 앉아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를 바라본 오충일 대표 등 당직자들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당직자들에게서는 “어떻게 저렇게까지…”라며 깊은 한숨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오후 9시20분, 정 후보는 당사 2층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50여 명의 의원과 당직자들이 뒤를 따랐다. 정적 속에 카메라 셔터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후보가 당선돼야 출입기자실도 좀 밝고 그럴 텐데, 여러분께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문을 연 정 후보는 준비해온 성명서를 낭독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국민 여러분의 선택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비록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만, 나라와 국민을 위해 항상 국민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곧바로 6층 상황실을 찾은 정 후보는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의원과 당직자들을 악수와 포옹으로 위로했다. 몇몇 이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일부 당직자들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통곡했다. 당사 앞마당에는 정 후보 지지모임인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정통들) 회원 수십명이 위로집회를 가졌다. 그는 과연 다음 대선에서도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이 꽃을 국민에게 드리고 싶다”

    오후 6시 TV 화면에 6%라는 예상득표율이 공표되는 순간, 영등포 창조한국당 당사도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아쉬움의 장탄식이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왔다. 이를 지켜보던 문 후보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길지 않은 소회를 토로했다.

    “투표장에서 저를 찍어주신 유권자 여러분의 꿈과 열정을 실현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목소리는 잠겼지만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당직자가 꽃다발을 전달하자 “이 꽃을 국민에게 다시 드리고 싶다”고 말한 뒤 당사 밖으로 빠져나갔다. 당사를 메웠던 “문국현!”이라는 구호가 잦아들었다.

    개표가 진행되자 이번에는 당사에 시민들의 항의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선거에 참패한 정동영 후보 지지자들이었다. “문 후보 때문에 민주세력이 패배했다”는 항의에 문 캠프 사람들은 “지역주의에 물든 당신들이나 반성하라”는 식의 맞고성을 질렀다.

    김영춘 의원 등 측근들 역시 얼굴에 착잡한 감정이 가득 묻어 있었다. 창조한국당의 유일한 현역 의원인 그는 “애초 득표율 10% 이상이 목표였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고, 그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을 총선체제로 변화시키겠다”고 말했지만, 득표율이 10%에 못 미쳐 중앙선관위에서 국고보조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해 총선 준비가 쉽지 않으리란 전망이다. 창조한국당은 100억원 가까운 문 후보의 사재를 털어넣었다고 한다.

    착잡한 분위기는 술자리로 이어졌다. 당직자와 출입기자들의 술자리는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한 당직자는 “문국현이 평생 모은 재산 다 까먹고도 웃는 놈들은 뭐냐”는 식의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다.

    6%에 미지치 못하는 지지로 전국 정당이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에 창조한국당 관계자들은 “민노당 역시 3%에 불과했다”는 말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이었다.

    허탈…장탄식…울음 믿기 힘든 ‘낙선의 밤’

    12월 19일 서울 남대문 이회창 후보 캠프에서 이 후보 지지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유권자 꿈과 열정 실현 최선의 노력”

    방송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직전 이회창 후보 캠프는 가라앉아 있었다. 강삼재 전 의원, 김혁규 전 경남지사,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 곽성문 의원, 이윤수 전 의원 등이 초조하게 출구조사 결과를 기다렸다.

    6시. ‘아~’ 하는 장탄식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침묵. 20분가량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한 지지자가 외쳤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또다시 좌파 세상이 될 것이다.”

    지지자 간의 말다툼도 벌어졌다. 한 지지자가 “방송사, 신문사 기자들이 이명박 후보를 도와줬다”고 기자들을 힐난하자 곽성문 의원이 “여기 모인 기자들은 함께 여관방에서 자고 국밥 먹으면서 우리를 도와준 동지”라고 달랬다.

    8시20분께 이회창 후보가 도착할 때까지 소란은 계속됐다. “두 달짜리 대통령이다” “김정일 세상이 될 것이다”라고 지지자들이 수런댔다. 몇몇 지지자들은 “부패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됐다”면서 “국민은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이회창 후보가 상황실에 도착하자 소동은 마무리됐다. 캠프 인사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눌 때 이 후보의 표정은 비장했다. 그는 준비해온 원고를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원칙’ ‘가치’라는 단어를 되풀이해 말할 때, 그는 결연했다.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저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이 길을 갈 것이다. 국민을 위해 한 알의 씨앗이 되고자 한다. 씨앗이 죽으면 열매를 맺는다. 꽃 피우고 열매 맺는 날이 곧 올 것이다.”

    그가 기자회견을 마치자 한 지지자는 “다음엔 꼭 되십시오”라고 말했다. 곽성문 의원은 이 후보의 ‘씨앗론’에 대해 “원칙과 가치를 존중하는 보수 신당을 만들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는 그의 여정엔 ‘험로’가 가득하다.

    지지자들은 그가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 ‘이회창!’을 연호했다. 그들은 “두 달 안에 우리가 끌어내리자”고 서로를 위로했다. “선관위를 찾아가 항의하자”고 소리 높이는 이도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후보를 바라보던 강삼재 전 의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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