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6

2007.10.16

재벌 안주인들은 미술을 좋아해

‘큰손’컬렉터로 미술계 안팎 막강 영향력 … “기업 사회환원 vs 상속수단” 엇갈린 평가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7-10-10 15: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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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 안주인들은 미술을 좋아해

    박문순 성곡미술관장이 9월26일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성곡미술관 전경(오른쪽).

    “박문순 성곡미술관 관장은 그림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지만, 참 착하고 야심 없는 재벌가 안주인이었어요. 그런데 미술관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신정아 씨처럼 단단한 사람에게 휘둘려서 검찰에 불려다니는 것을 보니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어느 재벌 미술관 전 학예실장)

    신정아(35) 씨 사건의 불똥이 재벌 미술관으로 번졌다. 성곡미술관의 기업후원금 횡령 및 조각품 매매 알선과정에서 리베이트 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신씨가 자신이 빼돌린 돈을 모두 박문순(53) 관장에게 상납했다고 발을 빼면서 생긴 일이다. 더욱이 박씨가 이를 부인하면서 검찰은 9월28일 성곡미술관과 박 관장 자택을 압수수색해 출처가 분명치 않은 62억여 원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 부인의 우아한 ‘사교장’이자 품위유지 수단이던 미술관이 비자금 은신처였다는 사실이 졸지에 드러난 셈이다.

    품위 유지하며 우아한 사교, 너도나도 미술관 운영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성곡미술관 등 재벌 미술관과 그 미술관을 운영하는 재벌가 안주인들에 대한 세인의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미술계에서 재벌 미술관의 영향력은 예상외로 막강하다. 이들이 미술시장의 ‘큰손’ 컬렉터이고, 기획전시 등을 통해 스타 작가를 만들어내는 구실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6년 말 현재 전국에 사립미술관은 75개에 이르지만, 이중 제대로 된 규모를 갖춘 곳은 대부분 재벌 미술관들이다. 흥미롭게도 이곳들은 모두 재벌 집안의 여성들이 관장직을 맡고 있다. 성곡미술관의 박문순 관장은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부인이다. 삼성미술관 리움(Leeum)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씨, 금호미술관은 고(故)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의 여동생인 박강자 씨, 아트선재센터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부인 정희자 씨, 아트센터 나비는 SK 최태원 회장의 부인이자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 씨가 운영하고 있다.



    재벌 미술관장들의 면면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유형과 드러나지 않고 뒤에서 활동하는 유형이다.

    첫 번째 유형의 대표격이 홍라희 관장이다. 홍 관장은 1995년부터 호암미술관, 로댕갤러리, 삼성어린이박물관 등을 운영해왔고, 2004년 개관한 리움 관장직도 겸하고 있다. 서울 한남동에 자리잡은 리움은 삼성이 그동안 소장해온 한국의 국보급 전통미술품과 근현대 미술, 국제 미술 대표작들을 볼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미술관. 홍 관장은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출신으로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은 이건희 회장 부자와 달리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특히 196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 등 전후 추상미술 사조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 안주인들은 미술을 좋아해

    미술계의 파워우먼들. 왼쪽부터 홍라희(삼성미술관 리움), 정희자(아트선재센터), 노소영(아트센터 나비), 박강자(금호미술관) 관장.

    미술계에서 홍 관장의 영향력은 재계의 이건희 회장 못지않다. 한 큐레이터는 “홍 관장은 여왕 같다. 전시회에 그가 나타나면 서로 그를 안내하려고 난리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홍 관장은 2005년 미술전문지 ‘아트프라이스’가 작가, 평론가, 화랑주, 미술기자 등 237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파워리더 1위로 뽑혔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관장이자 컬렉터로서 국내외 우수 작가의 전시를 유치하고, 활발한 국내외 미술품 수집으로 알찬 기획전을 꾸준히 개최한 것’이 이유였다. 홍 관장은 1996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훈장을 받기도 했다.

    정희자 관장도 첫 번째 유형이다. 대우가 잘나가던 시절, 서울힐튼호텔도 경영하던 정 관장은 아트선재센터와 경주의 아트선재미술관 운영에도 적극적이다. 정 관장은 오래전부터 청전 이상범, 도상봉, 김환기 등 국내 대가들의 작품을 수집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딸 김선정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도 어머니를 도와 이 미술관의 부관장으로 활동하면서 젊은 작가들을 발굴했다. 아트선재센터라는 이름에서 ‘선재’는 미국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은 정씨의 아들 이름. 정 관장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미술관 이름에 ‘선재’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 미술관장 가운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유형의 대표격이 바로 이번에 물의를 일으킨 박문순 관장이다. 지금 성곡미술관 공금 4억5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는 데다 신씨로 인해 수모를 당하고 있지만, 박 관장은 다소곳한 여성의 전형이라고 한다. 박 관장은 1995년 미술관 설립 당시부터 학예실장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미술관 운영에 별로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 성곡미술관 큐레이터 B씨는 “관장님이 비전문적이긴 해도 직원들에게 권한을 많이 줘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플러스 요인도 있었다”고 말했다.

    성곡미술관은 100여 점의 컬렉션으로 출발해 오랫동안 추가 구입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미술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기보다는 서울 신문로 요지에 있는 땅 1322㎡의 세금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미술관을 설립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미술관은 성곡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의 자택을 개조해 만들었으며 본관과 별관의 전시공간, 박 관장 자택 외에 숲과 아늑한 야외 찻집이 있어 전시가 없을 때도 관람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소유와 경영 미분리 아직까지 공개념 부재

    미술계 안팎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재벌 미술관장은 박계희 전 워커힐미술관(현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다. 최종현 고(故) SK그룹 회장 부인인 박 전 관장은 미국 미시간주 카라마주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해 전문적인 식견도 갖추고 있는 데다, 전시회를 찾아다니며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는 등 미술계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앤디 워홀의 국내 최초 개인전, 피카소와 오펜하임 등의 거장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가 작고했을 때 수많은 미술인들이 빈소를 찾아 조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노소영 관장은 시어머니인 박 전 관장의 뒤를 이어 1997년부터 미술관을 맡았다가 2000년 종로 SK본사 사옥 4층에 나비를 개관했다. 공학과 경영학을 전공한 탓에 순수예술보다는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미디어아트 분야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미국 오클라호마대에서 의류학을 전공한 박강자 금호미술관 관장은 1989년 개관 이래 실력 있는 신진작가 발굴에 힘써왔다. 박씨는 특히 신씨의 예일대 박사학위 논문이 거짓임을 들통나게 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처럼 재벌 미술관에는 다양한 이력의 관장들이 포진해 있으면서 미술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각에는 재벌 미술관들이 기업의 사회환원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호의적인 반응도 있지만,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작품을 상속수단으로 여긴다는 등의 비판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지적은 재벌 미술관들의 공(公)개념 부재다. 문화재단을 만들어 미술관을 설립하면 세금면제, 로또문화기금 수혜 등을 받으면서 공적인 요소가 커지지만 많은 미술관이 여전히 사적인 공간에 머물러 있다는 것.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채 관장직을 재벌가 안주인이나 집안사람이 맡아온 것이 단적인 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경우 록펠러 부인과 구겐하임 부인 등이 기금을 내놓아 설립됐지만, 관장에는 그들과 상관없는 전문가가 앉았던 것과 대조적이다.

    전문 큐레이터 선발과 활동 검증도 필요

    하계훈 단국대 교수(예술경영학)는 “휘트니미술관 등 기업이 후원한 해외 미술관들도 일단 비영리기관인 미술관으로 등록되면 모기업과 거리를 두고,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운영위원회나 이사회를 만들어 운영해왔다. 국내 재벌 미술관들도 이제는 좀더 공익성을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고 지적했다.

    둘째, 관장의 전문성 부재로 미술관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곳도 있다. 미술 컬렉션이나 전시회가 추상미술, 설치 비디오 등 일정한 방향을 잡아야 미술관이 성장할 가능성이 커지지만, 관장 개인의 취향이 반영돼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는 지적이 많다.

    또 개인 컬렉션과 미술관 컬렉션이 뒤섞이는 것도 문제다. 미술평론가 김모 씨는 “미술관은 작품을 시중가의 절반값에 구입할 수 있다. 또 전시회 개최 대가로 작품을 기증받기도 하는데, 그렇게 모은 작품을 개인 소유로 할 경우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지어 모 재벌 미술관은 전문성 부재로 가짜 작품을 구입한 경우까지 있다. 한국의 유명작가 그림을 구입해 버젓이 전시까지 했는데, 이를 본 전문가들이 가짜라고 지적했음에도 이를 쉬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술관의 이런 빈구석을 채워주는 사람들이 큐레이터다. 미술관의 수준은 큐레이터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처럼 중요한 큐레이터 선발도 정밀하지 않아 신씨 같은 사례가 발생했다. 신씨는 기업후원금 횡령 등의 혐의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전시회를 치를 때마다 식사비만 1000만원을 청구하는 등 도덕성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 금호미술관 학예실장 출신인 박영택 경기대 교수는 “큐레이터가 되려면 미술비평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신정아 씨는 제대로 된 비평을 낸 적이 없다”면서 전문적, 도덕적인 큐레이터 선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미술관을 갖고 있는 재벌그룹은 예외 없이 건설사를 소유했거나,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곡미술관의 모그룹이던 쌍용그룹도 쌍용건설을 갖고 있었다. 미술계 한 관계자는 “연면적 1만㎡ 이상의 건축물을 신·증축할 때 건축비용의 0.7% 이하를 미술품 장식에 써야 하는 건축물 미술장식제도를 이용해 미술관이 건설사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했다. 미술계는 공공조형물 시장 규모를 800억원대로 추산하고 있다. 덩치 큰 조형물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알선자에게 작품 가격의 40~60%의 리베이트를 지불하는 것이 관행이다. 알선자는 주로 상업화랑과 기획사, 미술관 등이다.

    이처럼 미술관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공개념 도입, 전문 큐레이터 선발, 큐레이터 활동에 대한 검증과 비판 등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등이 필수라고 지적한다. 문화예술위원회 김찬동 미술전문위원은 “미술관의 사유화를 방지하기 위해 이사회나 운영위원회를 공익적으로 구성하고 투명한 운영구조가 정착된다면 나머지 문제들은 다 풀릴 것”이라고 조언했다.

    ▼ 재벌 안주인의 미술관 운영 현황
    미술관 대지 면적(m2) 공시지가 보유 작품 수 관장 이름 대기업 총수와의 관계
    삼성미술관 리움 6373

    (195억300만원)
    199(소장 자료)

    호암미술관(1만5000점)
    홍라희-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부인
    아트선재센터 1792

    (155억원)
    113(소장 자료)

    113(등록 자료)
    정희자-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부인
    금호미술관 1666

    (112억595만원)
    1310(소장 자료) 박강자-고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 여동생
    성곡미술관 1322

    (399억411만원)
    150(소장 자료)

    112(등록 자료)
    박문순-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부인
    아트센터 나비 1060

    (임대)
    회화, 조각 등

    451(소장 자료)
    노소영-최태원

    SK 회장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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