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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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아 소년의 악취미 관음증에 관한 보고서

  • 심영섭 영화평론가 · 대구사이버대 교수

    입력2007-09-05 15: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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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아 소년의 악취미 관음증에 관한 보고서
    아무것도 없는 무지화면(無地畵面)에 낚시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목소리만이 잡힌다.

    “우리를 볼 수 있나요?”

    “아니, 못 본단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있지.”

    영화의 모든 것을 집약한 첫 대사이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암시하는 대사. 그런데 어째 좀 으스스하다. 목소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것인데 시점은 물고기의 것이다. 물론 아들이 잡다가 놓친 대어(大魚)는 물고기만이 아니다. 이미 시점을 가진 물고기, 보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살인마. 그는 지금 우리 이웃에 산다.

    프랑수아 트뤼포(‘누벨바그’라는 영화 사조의 기수인 프랑스 감독)가 히치콕 감독의 ‘이창’에 대한 영화평을 썼을 때, 그는 이 영화를 ‘불가능한 행복과 뜰에서 더럽혀진 리넨 천, 고독한 도덕에 관한 영화, 일상생활과 묵살된 꿈이 만나서 이루는 기이한 심포니’라고 평했다. 물론 일상과 묵살된 꿈의 기이한 심포니는 그 후 영화 역사의 유구한 전통이 되어 살아남았다. 우리는 아직도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블루 벨벳’이나 심지어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서조차 히치콕의 기이한 심포니가 남긴 핏자국을 볼 수 있다.



    할리우드 고전들을 모험과 판타지로 비벼놓은 느낌

    중산층의 안온한 삶은 이미 영화의 초장부터 박살나버렸다. 아버지가 탄 차는 이중 삼중의 사고로 궤멸하고, 사면초가에서 혼자 살아남은 소년은 문제아가 됐다. 소년은 결국 100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벨이 울리는 경보기를 발목에 차는 신세가 됐다. 물론 소년은 왕년의 숱한 주인공들이 그러했듯, 할 일 없이 이웃집 창을 기웃거린다. 관음증, 그 훔쳐보기 신화야 이미 히치콕이 ‘이창’에서 발견한 것이기에 ‘디스터비아’는 그에 대해 경쟁심을 느끼기보다 거장의 발자국을 따라 스릴을 즐기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관음증을 소재로 한 ‘디스터비아’는 ‘본다’라는 오래된 영화 철학의 문제를 10대 버전으로, X-box와 유튜브 버전으로 새롭게 번안해놓는다.

    아무래도 깁스한 채 점잖게 휠체어에 앉아 망원경만 들여다보는 제임스 스튜어트(‘이창’의 주인공)에 비하면 톰 행크스와 존 쿠색을 반반씩 섞은 듯한 샤이어 라버프(‘트랜스포머’의 바로 그 소년)는 순발력 경쟁에서 단연 앞선다. 게다가 ‘이창’의 거세적 이미지와 달리 샤이어 라버프에게는 그의 몸을 대신할 친구(한국계 배우 아론 유가 맡았다)와 여자친구마저 있다. 당연히 영화는 그에 걸맞게 B무비적 감수성으로 충만하다. 클래식하게 주인공의 시점 샷으로 일관하기보다는 비디오 카메라로, 휴대전화의 액정화면으로, 컴퓨터와 TV 화면으로 훔쳐볼 수 있는 도구는 죄다 사용해 창문을 들여다본다.

    연출상 가볍게 ‘치고 노는’ 이 감수성은 아무리 보아도 이반 라이트먼(‘고스트 버스터스’ 감독)이나 존 휴즈(‘나홀로 집에’ 제작자), 조 단테(‘그렘린’ 감독)적이다. 일종의 재활용 차원에서 건져낸 할리우드 고전들을 모험과 판타지로 비벼놓은 스필버그 사단의 내공이 팍팍 느껴진다. 아닌 게 아니라 드림웍스의 작품에다 이반 라이트먼이 제작했으니, ‘그렘린’이나 ‘고스트 버스터스’의 왁자지껄함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 터.

    그런데 이 감독 D.J. 카루소에게 또 다른 미덕이 있으니, 좁은 공간인 집 앞과 뒤를 요리조리 활용해 새로운 스릴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집의 꼭대기인 2층이지만 끝은 집의 가장 밑 부분, 인간의 심연 같은 지하실이다. 또한 ‘이창’과 달리 ‘디스터비아’는 옆창과 앞창을 모두 활용하는 ‘훔쳐보기에 관한 영화’이자 ‘경계의 영화’로서 자신을 재정의한다. 알고 보니 이웃집 남자는 매일 밤 여자를 데려와 살인을 하는 사이코였고, 소년과 소녀는 서로의 몸을 더듬으며 이 사실을 조금씩 눈치채간다.

    그러므로 소년이 자신의 훔쳐보기에 대해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식으로 거리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인 듯하다. 집 주변에 스스로 쳐놓은 100발자국의 경계를 넘을 때, 그는 외부에서 가둔 외재화된 규칙을 어기고 내면의 룰을 따라 돌진한다. 그 끝에는 물론 위기에 빠진 엄마 혹은 죽은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앞서 족쇄로 작용하던 경계를 넘어, 마침내 소년은 ‘무시무시하게 나쁜 아빠=이웃집 남자’를 죽이고 어머니를 구출할 것이다. 소년에서 자라 어른이 될 것이다.

    문제아 소년의 악취미 관음증에 관한 보고서

    영화 ‘디스터비아’의 한 장면들.

    상업적 땟물과 영화 보기의 즐거움 공존

    이렇게 오이디푸스적으로 해석해놓고 보니, 왜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감 잡겠다. 그는 D.J. 카루소라는 젊은 친구와 함께 낄낄거리며 그 옛날 ‘죠스’ 시절에 만든 영화들, 그 퇴행과 영원한 소년이고 싶은 피터팬적 소망을 다시 한 번 이루어냄으로써 회춘하려는 것 같다.

    어쩌면 ‘디스터비아’는 ‘이창’의 창의적 진화이자 퇴행적 반복이며, 좋았던 80년대를 회고하는 할리우드의 성공한 감독-영화광들이 히치콕에게 올려붙이는 경례 같은 것이리라. 이들이 그려내는 것은 10대 시절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던 그 세상이다. 이웃집 벽장에는 비밀이 잔뜩 숨겨져 있고, 아이들은 부모 몰래 포르노를 보고 사내들은 여자 꼬시러 밤마을이나 나가는 세상이었다.

    그러므로 제발 훔쳐보기 운운하지 말고, 영화를 즐기시라. 이미 미국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의 위업이 말해주듯 ‘디스터비아’는 작은 영화지만 할리우드의 유산을, 그 지독한 상업적 땟물과 영화 보기라는 속세의 쾌락을 모두 안겨주는 특이한 영화다. 이젠 그런 영화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마음먹었다가도, 다시 한 번 속아주자고 결심하게 되는 영화.

    히치콕이 살아생전에 보았다면 무척이나 좋아했을 이 작품은 진지하고 학구적인 태도만 버린다면, 롤러코스터 타듯 재미있고 즐길 거리가 차고 넘친다. 히치콕의 작품을 모사하고 전송했듯, 언젠가 할리우드는 스필버그 작품도 재활용하고 재전송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밝혀두자. 히치콕은 할리우드를 전복했고, ‘디스터비아’는 할리우드를 사수한다. 그 질긴 고리의 한 끝에 ‘디스터비아’가 있다. 할리우드의 전통을 전혀 디스터브(disturb·방해)하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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