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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과자 명장 박근성

60년 제과제빵 외길 … 과자에 예술을 입히다

  • 이현주 자유기고가 whenstart77@hanmail.net

화과자 명장 박근성

화과자 명장 박근성
이른 봄,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단단한 가지에 핀 매화는 초연하고 아름답다. 사계절의 미(美)가 어디 그뿐인가. 화사한 꽃이 만발한 봄날의 정원과 차디찬 냇물에서 미끄러지듯 노니는 물고기들, 그리고 고개 숙인 채 벼가 익어가는 가을날의 정취….

이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말랑말랑한 떡 위에 오롯이 새겨 넣는 사람이 있다. 앙금과 물엿, 달걀과 다채로운 색소, 밀대와 헝겊 등만 있으면 그는 사계절 어떤 풍경도, 동식물도 한 폭의 그림이자 먹을거리로 탄생시킨다. 바로 우리나라 화과자의 명장 박근성(74) 선생이다.

1933년 태어난 박 선생은 일본 도쿄제과학교 한국인 유학생 1호다. 도쿄제과학교 최초의 외국인 객원교수라는 수식어도 가지고 있다. 제과기술 보건복지부장관상을 받은 데 이어, 한국제과기술경영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충남 계룡시에 있는 제과점 ‘미나미 화과자’ 기술고문으로 있다. 국내 제과업계에 몸담은 사람들은 평생을 빵과 화과자에 쏟아부은 그를 ‘스승’ 또는 ‘명장’이라고 부른다.

“60년 동안 한 우물을 팔 수 있었던 비결이라…. 내가 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완성품이 되어 두 손에 쥐어졌을 때 희열은 말로 다 설명 못해요. 그 보람이 없었다면 빵을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박 선생의 고향은 이북이다. 일본 소학교에 다니다 광복되자 어머니, 형제들과 월남했다. 16세 무렵 생업에 뛰어들면서 처음으로 손에 밀가루를 묻혔다. 1948년 혜화동 제과점 ‘만나장’ 연습생 시절의 일이다.



당시 만나장의 공장장은 고(故) 공윤택 선생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열린 한 제빵대회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1등에서 2등으로 강등되자 홧김에 일본인 심사원에게 주먹을 날리고 돌아온, 한국 제빵 분야의 선두주자다.

화과자 명장 박근성
16세 때 빵과 인연… 도쿄제과학교 1호 유학생

어린 박근성은 아침 6시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재료를 나르고 설거지를 도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시킨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윤택 선생한테 빵칼로 머리를 얻어맞았다. 열심히 일하고 배우겠다는 악착같은 소년의 다짐이 무너졌다. 눈물이 죽죽 흘러내렸다. 가게를 뛰쳐나왔다. 그때 누군가 달려나와 그를 달랬다.

“나는 기술 배우러 왔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속으로 다짐하고 다시 돌아갔어요. 그때부터 공 선생이 저를 좀 대견하게 생각하신 것 같습디다. ‘나름 오기 있는 녀석이구나’ 하신 거죠. 3년 뒤 공 선생과 함께 고려당에 들어갔습니다. 선생이 공장장을 맡고 제가 그 아래 자리였지요.”

고려당으로 옮겨간 이들 사제(師弟)는 연달아 히트상품을 선보였다. 슈크림빵과 파운드케이크, 러시아케이크 등이 그것이다. 곰보빵과 크림빵이 전부였던 시절, 파운드케이크의 등장은 지금의 40, 50대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안겨줬다.

화과자 명장 박근성

박근성 선생은 제빵 후배들에게 원칙과 기본을 강조하는 엄한 스승으로 불린다.

1961년 박 선생은 공장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셀 수 없이 많은 빵을 만들고 팔았다. 20년 가까이 그는 고려당에서 연구하고 실험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새로운 빵을 선보였다. 한계에 다다랐다는 기분에 사로잡힐 무렵 그는 도쿄제과학교로 유학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비자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시절이었다. 혹시 일본 조총련으로 넘어갈까 싶어 치안본부, 내무부, 중앙정보부 등에 7차례 이상 불려다녔다. 어렵사리 비자를 얻었지만, 당시 외국에 나갈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돈은 300달러에 불과했다. 아내가 그의 넥타이 재봉선을 뜯어 100달러짜리 지폐 몇 장을 집어넣고 봉합했다. 나중에 돈에 찍힌 재봉선 때문에 일본은행에서 위조지폐로 몰리는 해프닝도 겪었다.

도쿄제과학교의 제1호 한국인 유학생. 일본 언론은 그를 주목하며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화려한 레스토랑이었다. 일본 기자들은 그에게 빵 만드는 일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물었다. 패전국가임에도 일본은 한국보다 경제성장이 빠르던 시기였다. 제빵 분야 최고 기술자라고 자부하는 그의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또박또박 말했다.

“기술적으로는 확실히 일본이 앞섭니다. 하지만 한국이 아무리 못사는 나라라 해도 일본보다 앞서는 게 있습니다. 맨주먹으로 만들어내는 정신이 바로 그것이지요. 일본은 없는 재료를 외국에서 공수하지만, 한국은 살 수 없는 재료까지 손수 만들어냅니다.”

그의 말은 각 신문과 잡지에 실렸다. 박 선생은 이때부터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첫 번째 수업시간, 과제는 ‘데니시 패스트리’였다. 고려당 시절 일본어 제과제빵 책을 수차례 읽고 만들어보았던 그에게는 무척 쉬운 과제였다. 그의 데니시 패스트리가 오븐에서 나오자마자 다른 일본인 학생들이 카메라로 촬영하는 등 난리였다. 선생은 절반은 농담조로 “박상, 당신이 선생”이라고 했다. 낮에는 양과자를, 밤에는 화과자를 배웠다. 양과자는 한국에서 손에 익을 대로 익은 터라 그는 화과자에 눈을 돌렸다. 당시 일본 화과자는 당도가 높고 맛이 달았다. 한국인 입맛에 맞게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인가 속에서 끓어오르더군요. 달려들어 정복하고 싶은 대상을 찾아낸 거죠.”

계절마다 다른 그림 화과자에 새겨

화과자는 계절과자다. 봄에는 난(蘭)이, 가을에는 벼 이삭과 둥근 달이, 겨울에는 학이 도톰한 떡위로 새겨지고 치장된다. 만드는 자의 철학과 감각, 손재주가 과자에 피어난다. 예술성이 깃들어 있다. 기량에 따라 완성도가 나타난다. 자연과 인생의 희로애락, 생사(生死), 그리고 만드는 자가 걸어온 발자취가 결집되는 하나의 세계가 바로 화과자다.

1년 후 도쿄제과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당으로 돌아왔다. 당시 유수 제과업계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잇따랐으나 응하지 않았다. 귀국 후 처음 선보인 것은 바게트. 동그란 빵만 있던 시절, 기다랗고 딱딱한 빵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가게 앞에 긴 줄이 늘어섰고 10~20개씩 사가는 손님도 많았다.

바게트에는 색깔과 향을 내는 ‘모르토’라는 재료가 들어간다. 그러나 국내에는 모르토가 없어 박 선생은 가장 비슷한 비타민C를 구해 사용했다. 바게트빵의 인기가 날로 치솟자 제과업자들이 그의 가게에 찾아왔다. 그들은 ‘가르쳐달라’는 말 대신 슬쩍 빵 모양을 베껴갔다. 그들에게서 제대로 된 바게트가 나올 리 없었다. 그 때문에 바게트의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무척 아쉬웠죠. 가르쳐달라고 하면 왜 안 가르쳐주겠습니까. 빵은 원리원칙대로 만들어야 해요.”

박 선생은 지금도 빵을 즐겨 먹는다. 인터뷰 자리에 나오기 전에도 아침식사로 토스트를 먹었다고 했다. 기술고문으로 있는 미나미에는 한 달에 두어 번 내려가는데, 일흔을 훌쩍 넘은 지금도 손을 전혀 떨지 않는다고 한다. 혼자서 젊은 사람 둘 이상의 몫을 해낸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기본을 지키지 않으면 청천벽력이 떨어진다는 게 후배들의 전언이다. 국내 제과제빵 분야 수많은 명인 가운데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이 분야 최고 기술자다.

“화과자는 예술이에요. 일본 사람들이 하는 말 중 ‘피곤하고 죽고 싶으면 빵을 만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제과제빵은 평생을 배워도 모자라다는 거지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화과자 문양은 그의 상상으로 만든 것인데, 주변 사람들에게도 많은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 모양이 그것이다. 혈혈단신 척박한 인생을 거꾸로 오른 그의 칠십 인생처럼 말이다.



주간동아 602호 (p60~62)

이현주 자유기고가 whenstart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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