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5

2007.05.15

“‘나 홀로 집에’ 고통 엄마 아빤 몰라요”

방과 후 부모 보살핌 못 받는 아이 100만 ~ 120만명 ‘마음의 병’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7-05-09 14: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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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홀로 집에’ 고통 엄마  아빤 몰라요”
    열한 살 난 남자아이 건우(가명)는 엄마가 곁에 없으면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든다. 사업 실패로 채권자들을 피해 도피 중인 아빠 대신 2년 전부터 부동산중개업, 보험설계사, 세일즈 일을 전전해온 엄마를 이해하면서도 저녁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엄마에게 수십 차례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확인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다.

    일을 마친 엄마가 친구나 지인들과 모임을 갖고 늦게 귀가할라치면 건우의 불안은 증폭된다. 그럴 땐 동생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와 서성이기까지 한다. 엄마는 이런 건우를 달래기도 하고 혼내기도 했지만 별 변화가 없자, 외할머니를 불러와 건우를 돌보게 했다. 그래도 건우의 불안 증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엄마는 결국 소아정신과 문을 두드렸다.

    전문의가 내린 진단은 분리불안에 의한 강박적 불안증. 심리검사 결과 건우의 불안 및 우울 성향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건우의 불안 증상은 석 달에 걸친 약물요법을 비롯한 6개월간의 치료를 통해 나아졌고, 건우는 그제야 예전의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

    외동자녀·맞벌이 맞물려 계속 증가

    ‘방임(放任) 아동’의 정신건강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한 부모 가정이나 조손(祖孫) 가정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던 아동 방임이 최근 경제불황으로 장시간 생계에 매달려야 하는 맞벌이 부부와 외동자녀의 급증과 맞물려 크게 늘면서 아이들이 속병을 앓고 있는 것. 부모가 다 있는 가정에서의 아동 방임은, 특히 갈수록 늘어가는 사교육비 부담으로 많은 엄마들이 돈벌이에 뛰어드는 현상과 궤를 같이하며 되레 아이의 미래를 갉아먹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영재(가명·9)의 경우도 그렇다. 영재 아빠는 건설회사에 다니고, 엄마는 영재의 어학연수 비용 등 미래에 대한 투자를 위해 영재가 일곱 살 되던 해부터 학습지 교사, 초등학생 과외 등의 일을 해왔다. 부모의 학력은 대졸. 두 사람 다 밤 9~10시는 돼야 귀가한다. 영재가 걱정되는 엄마는 저녁 무렵 항상 영재에게 전화해 저녁은 먹었는지, 학원은 잘 다녀왔는지 등의 안부를 확인한다. 그런데 두 달 전부터 영재가 전화를 받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준비물을 사러 나갔다 왔다” “친구 집에서 놀았다”고 답하던 영재는 얼마 뒤부터는 더 자주 집을 비웠다. 이상히 여긴 엄마가 영재를 다그쳤고, 결국 “문구점 앞에서 전자오락을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문구점 주인에게 직접 확인한 결과, 영재가 오랜 시간 자주 오락기 앞에 붙어 있으며, 한 번은 큰 아이들한테서 무언가를 요구받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 아이들을 내쫓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주인이 영재에게 밤늦도록 집에 안 가는 이유를 묻자 “엄마한테 허락을 받아서 괜찮다”고 거짓말까지 한 사실을 알아냈다.

    영재의 정서상태가 걱정된 엄마는 소아정신과를 찾았고, 심리검사 결과 정상으로 나왔다. 영재의 행동에 대한 전문의의 임상적 판단은 ‘저녁시간대 방임에 의한 아동의 잘못된 대처전략 때문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나 홀로 집에’ 고통 엄마  아빤 몰라요”

    전자오락에 몰두하고 있는 아동들(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련 없음).

    영재는 왜 문구점 주변을 배회했을까. 전문의에게 털어놓은 영재의 답변이다.

    “언제부턴가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서운 느낌이 들고, TV를 보거나 컴퓨터를 해도 그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학원 차에서 내린 뒤 동네 아이들이 문구점 앞에서 오락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후 나도 자주 오락을 하게 됐고, 아이들이 돌아간 뒤에도 왠지 집에 가기 싫어 인근 놀이터에서 혼자 놀다 엄마가 올 시간쯤 집에 들어갔다. 엄마가 화를 내니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막상 학원 차에서 내리면 나도 모르게 오락기 앞으로 달려가게 된다.”

    조인희 가천의대 길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장에 따르면, 영재 또래의 아이가 밤늦도록 홀로 있는 것은 전형적인 아동 방임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영재의 행동이 비행(非行)이나 문제행동으로 보이지 않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2차로 정서적 문제가 발생하고 각종 범죄나 사고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으므로 반드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한다.

    자기방어 능력이 약할 수밖에 없는 방임 아동들 중 상당수가 혼자 있다가 성범죄와 유괴의 표적이 되거나, 화재 등 끔찍한 사고에 무방비로 당하는 비극은 언론 보도를 통해 익히 알려져 있다. 심지어 개에게 물려죽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간과되고 있는 방임 아동의 또 다른 문제는 상처받은 정신건강이다. 조 과장은 “아이의 성격적 특성이나 가정 구조에 따라 아이가 다양한 문제들을 드러낼 수 있는데, 대체로 부모의 귀가를 반복적으로 확인하면서 불안해하는 강박증적 불안, 분리불안장애, 원인을 알기 힘든 복통이나 두통, 어지럼증 등을 호소하는 신체형장애, 짜증과 공격성의 증가, 우울증, 비행행동 등을 보인다”고 말하면서 “식사를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려 위염이나 원형탈모증이 생기는 사례도 있다”고 덧붙였다.

    “‘나 홀로 집에’ 고통 엄마  아빤 몰라요”

    지난해 2월 맞벌이 부부가 집을 비운 사이 세 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강원도 영월군 쌍룡리의 가정집 화재 참사 현장.

    불안·초조 정신건강 위험수위

    방임에 따른 문제 때문에 부모가 아이와 함께 정신과를 찾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반복적인 복통, 구토 등 원인을 찾기 힘든 통증 때문에 약물치료를 받고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는 어린이 환자들을 소아과 측에서 정신과에 진단을 의뢰하거나, 다른 문제로 정신과를 찾았다가 상담과정에서 방임 상태임이 드러나는 사례가 더 많다.

    방임 아동에 대한 정신과 진료는 일반 진료와 다르지 않다. 상담을 통해 아이의 생각을 들은 뒤 나이와 상태에 따라 놀이치료나 상담치료를 시행한다. 초기에는 불안·우울 증상을 최대한 호전시키기 위해 약물치료를 병행하기도 한다. 증상이 빨리 사라지지 않으면 장기적인 등교 거부, 또래 관계나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조 과장은 “그나마 병원을 찾는 부모들은 방임 문제를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어서 치료하면 아이의 상태가 대부분 좋아진다”면서도 “가족 내의 관계 갈등 또는 부모나 자녀의 개인적 인성 및 성격 장애가 심각한 경우엔 장기치료로 이행되거나 부모가 일방적으로 치료를 중단해버리는 일도 있다”고 밝힌다.

    아동발달 전문가인 유미숙 숙명여대 교수(아동복지학·원광아동상담센터 소장)에 따르면, 방임에 가장 취약한 연령대는 초등학생이다. 이 시기는 아이들이 어른의 보호와 도움을 받으면서 자기조절 및 욕구 지연 능력을 배워 깨치는 중요한 때인데, 방임될 경우 그러한 능력이 길러지지 않아 향후 대인관계 형성에 문제를 일으킬 위험성이 크다는 것. 유 교수는 “부모들은 대부분 아이가 6세를 넘어서면 자기통제력을 갖게 된다고 여기지만, 이는 그들만의 과잉기대”라면서 “자기통제력이 갖춰지지 않으면 자칫 타인에게 충동적 욕구를 발산하거나,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 씨처럼 자기만의 공상세계에 빠질 우려가 높다”고 지적한다.

    부모와 아이의 생각은 얼마나 괴리를 보일 수 있을까. 앞서 예를 든 건우의 경우를 보자.

    건우 엄마는 전문의와의 상담에서 “남편의 사업 실패로 얻은 화병과 스트레스를 달래기 위해 일을 마친 뒤 친한 사람들과 술을 한두 잔 마신 것은 사실이지만, 업무상 사람들을 소개받기 위해 모임에 나가야 하는 날도 많았다. 동생은 이를 잘 이해하는데, 다 자란 건우가 그렇지 않아 너무 속이 상한다”고 말했다.

    반면 건우는 이렇게 답했다. “엄마가 늦은 시간까지 일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가 늦으면 나와 동생을 버리고 아빠처럼 어디인가로 숨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금방 온다고 해놓고 2년간 소식이 거의 없다. 엄마는 말로는 우리밖에 없다고 하지만, 내가 울면서 빨리 오라고 해도 오지 않을 때가 많고, 그럴 때마다 자꾸 불안해진다.”

    모자간임에도 생각은 이렇게 다를 수 있다.

    현재 국내의 방임 아동 수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통계는 없다. 아동복지 전문가들이 방과 후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100만~12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할 뿐이다. 그렇다고 부모들이 당장 맞벌이를 그만두고 아이에게만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맞벌이도 아이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고의로 방치하는 부모 또한 극히 드물다. 대안은 없는 것일까.

    보육시스템 인프라 태부족

    유서구 숭실대 교수(사회복지학)는 “부모들이 직접 챙기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선 그들의 수준에 맞는 방과 후 보육시스템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현재 각 부처가 시행 중인 방과 후 교실, 청소년 공부방, 지역아동센터 등의 인프라는 크게 부족한 실정”이라면서 “방임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적극 발견해내는 지역사회 단위의 사전 관리 시스템도 마련돼야 한다”고 말한다.

    방임 아동이 보이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부모에게 돌리긴 어렵다. 하지만 부모에게 방임 관련 문제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동복지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방임이 아동학대의 한 유형이라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저출산이 문제화되면서도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는 아이들이 점점 줄고 있는 희한한 사회.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한다’는 대한민국 어린이헌장 제1조가 무색한, 가정의 달 5월이다.

    방임 자녀를 둔 부모에게 주는 고언

    “선진국에선 아동학대 … 부모 인식 바꿔야”


    “‘나 홀로 집에’ 고통 엄마  아빤 몰라요”

    아동 방임에 대해 상담하고 있는 조인희 과장(왼쪽).

    저출산과 노령화에 따른 생산인구 감소로 여성의 경제활동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지고 있음에도 정작 학령기 자녀의 방과 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모순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선적으로 아동 방임에 대한 부모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선진국에선 아이를 방치하는 것을 범죄로 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하는 엄마의 자녀들이 밤늦게까지 집에 혼자 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짙어 아이들을 보호의 사각지대로 내몬다.

    그렇다면 정신과에선 방임 아동의 부모에게 어떤 ‘처방’을 내릴까. 다음은 조인희 가천의대 길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장이 부모들에게 들려주는 조언이다.

    생계형 방임인 경우 부모에게 아이의 심각성을 알린 뒤, 부모 중 한 사람이 일하는 시간을 줄이거나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을 하도록 권한다. 이것이 불가능하면 이웃이나 친척을 동원하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한다. 만일 아이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부모라면 반드시 아이를 정기적으로 만나고, 평소에 자주 아이와 전화 등으로 대화하며, 만나는 날엔 물건을 사주거나 식사를 같이 하기보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놀아주는 시간을 많이 갖도록 유도한다.

    생계형 방임이 아닌 경우 아이 문제의 원인을 설명한 뒤, 엄마가 일을 그만두고 아이가 안정 상태가 될 수 있도록 시간을 함께 보내고 곁에서 돌봐주는 것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대개 심각한 가족 내 문제나 다른 요인이 없는 가정인 경우, 부모가 이를 납득하고 수용하는 단계에서 치료는 종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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