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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찾는 논술 비전|이미지와 기호의 배반 ①

‘수단의 굶주린 소녀’ 그 상징성

  • 노만수 학림논술연구소 연구실장·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

‘수단의 굶주린 소녀’ 그 상징성

‘수단의 굶주린 소녀’ 그 상징성

케빈 카터의 퓰리처상 수상작 ‘수단의 굶주린 소녀’(1994년).

사진작가 케빈 카터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굶주린 채 웅크리고 앉은 어린 소녀를 우연히 발견했다. 소녀 뒤에는 살찐 독수리가 먹이를 노리는 듯 소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카터는 찰나에 셔터를 눌렀고, 1994년 이 사진 ‘수단의 굶주린 소녀’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수천의 입바른 소리보다 사진 이미지 하나가 ‘빈곤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더 크게 형성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작품이다.

대상을 정확히 관찰해 그 물성(物性)을 그리려 했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또한 이미지(그림)가 대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추출해낸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파이프를 그리고서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한다. 당연하다. 그림 속 파이프는 진짜 파이프가 아니라 이미지일 뿐이다. 결코 사물의 실재가 아니다. 사과를 그리고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라고 쓴 그림도 있다. 글이 참이라면 그림이, 그림이 참이라면 글이 거짓인 패러독스다.

즉 이미지는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전통 화법을 깨려는 역설이다. 이미지는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만들어 현실을 은폐, 변질시킬 수도 있다는 메시지다. 이미지는 가상 실재이므로 역설적으로 ‘실재 현실’이 항상 더 중요하다는 패러독스다.

‘수단의 굶주린 소녀’ 그 상징성
결국 마그리트의 의도는 이미지와 문자의 모순이라는 충격효과로 관객의 상상력과 무의식을 자극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파이프와 사과를 찾게 하고 싶은 것이다. 가시적 대상에 머물러 있던 감상자의 눈을 비가시적 대상으로 옮겨놓고 싶은 것이다.



“가령 완두콩들 사이에는 가시적이면서(색깔, 형태, 크기) 동시에 비가시적인 것(성분, 맛, 무게)이 상사(유사·similitudes)관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들은 상사관계를 갖거나 갖지 않기도 합니다.”

-르네 마그리트가 미셸 푸코에게, 1966년

마그리트는 미술이란 가시적인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철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 플라톤 같은 철학자로 불리길 원했다. 사실 마그리트는 플라톤 같다.

플라톤은 현실은 이데아(idea)의 반영이고 예술은 현실의 모사일 뿐이므로, 예술 이미지는 진리의 이데아로부터 두 단계나 ‘먼’ 사기에 불과하다면서 자신의 공화국으로부터 예술가를 추방하려 했다. 또 문자언어보다는 말을 더 좋아했다. 말이 이데아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의 책이 깡그리 구어체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마그리트에게도 문자언어는 단순히 현실의 사물을 지칭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을 뿐, 실재가 아니다. 기호는 언제나 지금 그 기호의 자리에 없는 지시물(실재)을 가리킨다. 하지만 기호 속에는 지시 대상의 소멸과 결핍이라는 이율배반이 있다. 기호가 정작 지시하는 것은 지시물 자체가 아니라, 그 지시물의 부재와 사라짐과 관련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기호화)’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실재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서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호와 실재 사이에 깃든 이 모순이 바로 ‘기호의 배반’이다.

‘수단의 굶주린 소녀’ 그 상징성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

20세기 구조주의 기호학에서 기호는 ‘기호(하늘)’가 불러내는 추상적 의미인 ‘기의(창공의 파란 공간)’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기표(하늘이라는 한글문자)’로 나뉜다. 기의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표는 기의를 감싸기 위한 ‘옷’이므로 시대·장소·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자의적이란 말이다. 한국어로 ‘창공의 파란 공간’은 ‘hanul(하늘)’, 중국어로는 ‘tian’, 일본어로는 ‘sora’, 영어로는 ‘sky’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마그리트의 그림 밑에 ‘이것은 담뱃대가 아니다’라고 적는 것도 썩 괜찮다.

그런데 ‘이미지와 기호의 배반’에 대한 염려는 20세기 르네 마그리트보다 18세기 조선의 연암 박지원이 먼저였다.

“마을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읽기 싫어함을 꾸짖자 한 아이가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하늘 천(天)자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視天蒼蒼, 天字不碧 是以厭耳)라고 합디다.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을 기죽일 만합니다.”

- 연암 박지원(1737~1805) ‘답창애지삼(答蒼崖之三)’,

춘천교대 2004년 논술

한글과 한자를 모르는 벨기에 어린이에게 하늘 ‘天’자로 하늘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내 ‘川’자에 뛰어들어 수영을, 불 ‘火’자로 추위를 막거나 물 ‘水’자로 얼룩을 닦을 수 없는 노릇이다. 실재와 기호가 따로 노는 ‘기호의 배반’ 탓이다. 위 글은 하늘(실재)을 기호(‘天’자)로만 가르치는 것은 ‘제2의 이미지’일 뿐인 ‘학교(책)’라는 틀 속에 갇혀 종국엔 교육을 잃고 마는, 즉 ‘기호의 배반’에 속수무책 당하는 ‘닫힌 교육’이란 메시지다.

르네 마그리트, 겸재, 연암! 그들 모두에게는 실재가 이미지보다 더 소중했다. 실재가 현실을 더 잘 설명해주는 까닭이다. 하지만 현실 그 자체를 늘 ‘바구니에 담아’ 다닐 순 없는 노릇이기에 ‘2차적 현실’로서의 ‘이미지’, 즉 예술이 탄생했고 -그들은 그걸 ‘기호학적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케빈 카터는 이미지와 기호의 배반을 예감하면서, 그의 작품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두고 ‘사진을 찍기보다는 어린이를 먼저 구하는 게 인간적 도리가 아닌가’라는 논란에 휩싸이다 1997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각 & 토론거리
1. 이미지에 대한 관점은 세 가지다. ⓐ 이미지는 심오한 현실을 표현한다. ⓑ 이미지는 심오한 현실을 은폐하고 변질시킨다. ⓒ 이미지는 심오한 현실과는 관계가 없다. 세 가지 관점을 각각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보자.

-연세대 2003 정시논술

2. ‘천공의 성 라퓨타’(미야자키 하야오)는 ‘걸리버 여행기’(조너선 스위프트, 1726)의 제3장 ‘공중의 섬 라퓨타 제국’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또 ‘붉은 돼지’는 르네 마그리트의 ‘행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르네 마그리트도 ‘피레네의 성’을 그릴 때 스위프트의 영향을 받고, 에셔도 ‘허공의 성’(1928)을 그렸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만든다. 이것은 모방인가? 표절인가? 패러디인가? 예술적 인용인가? 무엇인가?

3. 대량소비사회다. 거리, 상점, 가정에 물건들이 넘치고 라디오, TV, 인터넷, 위성방송 등에는 이미지가 넘친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토론해보자.




주간동아 2007.03.20 577호 (p87~89)

노만수 학림논술연구소 연구실장·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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