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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꿈과 욕망을 팔다

새 얼굴로 다시 돌아온 신세계백화점 … 근대에서 포스트모던까지 한국적 ‘도시성’의 상징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도시의 꿈과 욕망을 팔다

도시의 꿈과 욕망을 팔다
모 월간지에 ‘쇼퍼홀릭’이라는 쇼핑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자타공인 쇼퍼홀릭 K 기자. 2월28일을 기다리고 기다려 마침내 서울 신세계백화점으로 달려갔다. 2년 동안의 리뉴얼 공사를 마치고 이날 다시 문을 연 신세계백화점 본관 ‘투어’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 엄마 손잡고 외출하던 기억 속에서 이 백화점은 동화책 속의 궁전과 닮아 있어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조차 ‘자못 장엄’했다. 또한 K 기자가 한국의 건축물과 야경에 관심을 갖게 될 무렵, 이 건물은 서울에서 보기 드문 근대 르네상스풍으로 인식됐으며 쇼퍼홀릭 증세를 보이기까지 계단이 닳도록 드나든 곳이었다.

실제 최초의 근대주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완공 뒤 지금까지 77년 동안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유일한 공간인 신세계백화점 본관은 ‘복원’과 함께 세계적 아티스트들의 가장 ‘팹(fabulous)’한 아이템들을 디스플레이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왔다. 요약하면, 이 백화점은 근대에서 21세기 포스트모던까지 한국 ‘도시성’의 역사를 상징하는 동시에 한국형 쇼퍼홀릭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공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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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문을 연 미쓰코시 백화점. 당대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이 유행을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이 진열장 앞에 오기만 하면 이 ‘유행균’의 무서운 유혹에 황홀하여 걸음 걷기를 잊고 정신이 몽롱해지며 다 각각 자기의 유행 세계를 설계하려 든다.(최영수, ‘만추가두풍경’, 1937년)

쇼윈도는 샤넬과 루이뷔통의 로고로 여전히 황홀하다. K 기자의 정신도 몽롱해진다. 1985년에 붙여진 타일을 대신하게 된 핑크빛 그레이 화강암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유는 30년대에 미쓰코시(이 건물의 최초 백화점명)가 그랬듯, 이곳이 21세기 서울의 이상적인 현대성을 구현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K 기자가 검은색 정장에 붉은색 꽃을 단 ‘꽃미남’들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선 입구에서 제일 반가웠던 것은 르네상스 스타일의 중앙 계단이다. 자리를 많이 차지해 혹시 헐리지는 않을까 걱정되던 중앙 계단이 라임스톤 대리석으로 부드러운 커브를 만들고 있다. 대신 폭이 좁은 에스컬레이터가 양쪽 끝에 새로 설치됐다. 낯설지만 열린 형태의 부티크들 사이를 오래된 동네 골목길처럼 걸어다니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리노베이션 전 넥타이나 청국장 등을 팔던 매대 자리의 계단면에는 김환기 문학진 서세옥 등 한국 근대 미술작가들의 회화가 자리잡고 있다. 쇼핑하던 한 부인은 김환기의 그림을 들여다보다 “여보, 이건 스카프가 아니라 그림이네. 색이 참 예쁜데”라고 말했다. 패션과 미술은 이렇게도 만나는 것이다.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관엔 미술품이 100점 넘게 전시돼 있으며, 개관 기념으로 ‘Woman in Photography’라는 사진전이 열려 신디 셔먼, 래리 설탄 등을 만날 수 있다. 6층엔 벽에 직접 드로잉하는 작업으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미국 작가 솔 르윗의 ‘드로잉#592’가, 5층과 6층 중앙 공간엔 외국에서 더 유명한 한국작가 서도호의 거대한 설치 작품 ‘원인과 결과’가 보석 커튼처럼 반짝이며 걸려 있다. 백화점이 자랑하는 6층 조각공원엔 칼더, 미로, 클래스 올덴버그, 루이스 부르주아 등 거장들의 대형 조각작품들이 모여 있다. K 기자의 눈에 부르주아의 ‘거미’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전시된 그의 작품 중 가장 강렬하며, 올덴버그의 ‘건축가의 손수건’도 청계천에 설치된 ‘스프링’보다 더 올덴버그적이다. 대량생산 자본주의에 대한 독설이 올덴버그식 유머로 잘 표현돼 있기 때문이다. 6층 조각공원이 30년대 이 백화점 옥상에 설치된 르코르뷔지에 스타일의 ‘유리’ 정원 개념을 되살렸다는 점도 의미 있다.

쇼퍼홀릭과 백화점의 관계에서 중요한 점은 사실 미술품이 아니라 매장 구성이다. 1층엔 강북에서 처음 에르메스가 문을 열었다. 이명희 회장이 관심을 보였다는 2억원짜리 가방이 벌써 유명세를 타 구경하러 오는 손님들이 꽤 있다고 한다. 샤넬은 ‘애비뉴엘’처럼 복층 구성을 했지만, 루이뷔통엔 옷이 없어 아쉽다. 3층은 아르마니, 버버리, 트리니티 등 클래식한 브랜드로 채워져 있고 4층은 클로에, 발렌시아가, 마르니 등 개성 뚜렷한 브랜드들이 차지하고 있다.

도시의 꿈과 욕망을 팔다

신세계백화점 본관에 복층으로 문을 연 샤넬 부티크(왼쪽)와 옥상의 트리니티 조각공원에 있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거미’.

그러나 아이템 구성은 다소 보수적인 인상을 준다. 강북 소비자들의 ‘현실적’ 취향을 많이 고려한 듯한 인상이다. 다행히 ‘아방가르드’한 편집매장인 ‘분더샵’과 ‘미네타니’처럼 진짜 앤틱을 판매하는 주얼리숍들이 이런 아쉬움을 채워준다. 서울 청담동의 작은 독립매장으로 시작한 ‘분더샵’은 한국에 최첨단 디자이너들을 소개하면서 편집숍 붐을 일으켰는데, 초기 기획에서 디자이너 선택까지 신세계 최고경영진의 감각이 많이 작용했다고 한다. ‘애비뉴엘’에서 옮겨온 마놀로 블라닉 등 13개 구두 브랜드도 모여 있으니, 슈어홀릭이라면 ‘즐겨찾기’ 표시를 해야 할 듯하다.

전통과 역사, 강력한 마케팅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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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르코르뷔지에 스타일의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 풍경.

끝으로 남성들에게 반가운 소식 한 가지. 보통 식품점이 들어서는 지하 1층 전체가 남성 명품 브랜드 매장으로 채워져 있다. 슈트는 물론 액세서리, 모자, 구두, 향수 매장까지 입점해 있어 복잡한 매장들을 통과해 물건을 사러 가기 겸연쩍어하는 남성들에게 접근성이 매우 뛰어나다. 이웃한 ‘애비뉴엘’도 개관 2주년을 맞아 명품브랜드들을 더욱 강화한다니, 신세계 본관과 애비뉴엘의 경쟁은 더 볼만해질 것이다.

롯데백화점 본관과 명품관 애비뉴엘이 유리복도로 연결돼 있는 데 비해, 신세계백화점 본관과 신관-과거와 미래-은 구름다리로 이어져 있다. K 기자, 남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맞는다. 이건 ‘신세계’란 이름을 가진 바람이다. 앙쪽 건물 입구에 서비스맨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산도 받쳐주고 물건도 들어준다. 의도적인 불편함과 이를 주인의 환대로 돌려주는-것처럼 연출한-마케팅, 이런 모든 것들이 환기시키는 ‘전통’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장 강력한 마케팅 도구가 된다. 쇼핑은 이제 상품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이미지에 지갑을 여는 일이니까 말이다.



주간동아 2007.03.20 577호 (p56~58)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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