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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시네마천국

혼돈과 단절의 세상 소통에 대한 깊은 사색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바벨’

혼돈과 단절의 세상 소통에 대한 깊은 사색

혼돈과 단절의 세상 소통에 대한 깊은 사색
태초에는 인간의 언어가 하나였다. 인간이 하늘에 도전해 탑을 쌓아올리자 신이 분노하여 인간의 언어를 혼잡게 하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버리시고 그 사이에 혼돈과 단절을 만들었다. 그런 뒤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창세기 11장 1~9절)

5센트짜리 동전 5개의 무게, 벌새 한 마리의 무게, 초콜릿바 하나의 무게. 21g짜리 영혼을 찾아다녔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이번엔 4개 대륙을 돌며 인간의 소통과 외로움, 단절의 무게를 찾아나섰다. ‘바벨’. 때로 21g짜리 인간의 영혼이 21t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짊어지고 산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멕시코 일본 미국 호주 모로코 등 4개 대륙 5개 언어를 쓰는 배우들이 뭉쳤다. 다인종 다민족 다차원의 다양성. 연옥으로의 어두운 심연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4개 대륙 5개 언어 배우들 뭉쳐 열연

늘 그렇듯 이냐리투의 주인공들은 미필적 고의의 죽음으로 서로 얽혀 있다. ‘아모레스 페로스’에서 끔찍한 자동차 사고로 연결됐던 주인공들은 다시 ‘21그램’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죄다 잃는 운명의 그물에 걸렸다. 이번에는 셋째 아이를 잃고 실의에 빠져 모로코로 여행 왔던 미국인 부부 리처드(브래드 피트 분)와 수전(케이트 블란쳇 분)이 갑자기 여행 중 어디서 날라온지 모르는 총알에 맞아 관통상을 입는다. 물론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고 사는 인간들. 수전을 쏜 총알도, 총기의 주인도 모두 제각각의 이야기가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진짜 살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사람을 죽이려고 해서 죽인 것이 아니었고, 죽으려고 해서 죽은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한 자루의 총에서 시작됐을 뿐. 일본인 관광객이 모로코의 사냥 가이드에게 총을 주었으며, 가이드가 그것을 유세프와 아흐메드의 아버지에게 팔았다. 온 가족의 재산인 양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는 아들에게 총을 주었고, 이 카인과 아벨 형제는 총을 갖고 누가 더 멀리 쏘는지 내기를 한 것이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서로 알지 못하는 지역에 살면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베이징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다음 날 미국 뉴욕에 폭풍을 불러오는 것이다. 총 한 발이 도미노처럼 사람들의 삶을, 목숨을, 영혼을 짓이긴다.



혼돈과 단절의 세상 소통에 대한 깊은 사색

‘바벨’

미국인 입장에서 보면 모로코는 철저한 타자의 땅이다. 처음 모로코에서 물 한 잔조차 먹으려 하지 않으며 코카콜라를 마시던 수전은 자신의 목숨을 생면부지 모로코인에게 맡겨야 한다. 또한 미국인 입장에서는 국경이 맞닿아 있는 멕시코는 철저한 착취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수전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멕시코 가정부에게 맡겨졌는데,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그녀는 국경을 넘어서라도 아이들과 결혼식에 참석하려 한다. 그러나 검문소에서 사소한 오해로 실랑이가 벌어져 결국 그녀와 아이들은 멕시코와 미국 국경 사이의 사막에 남겨지게 된다.

도미노처럼 삶과 영혼을 짓이긴 총 한 방

세 나라 미국, 멕시코, 모로코 사이에는 공통의 상징인 ‘사막’이 존재한다. 그 사막의 땅, 불모의 땅에서 모로코와 멕시코는 자신만의 번제, 희생을 치른다. 명백히 카인과 아벨의 테마를 차용한 모로코의 두 형제, 유세프와 아흐메드는 ‘총’이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나머지 테러리스트로 몰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된다. 보모인 아멜리아는 결국 자신이 머물러왔던 아메리칸드림의 땅을 떠나 멕시코라는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당한다.

이냐리투 감독은 다중 플롯 방식을 써서 9·11 테러 이후 더 심화된 미국의 근심과 불안, 약소국에 대한 도를 넘어서는 착취와 편견의 굴레를 종교적인 우화로, 수많은 은유로 형상화한다. 서로의 마음을 전할 아무런 수단, 방법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이들은 그 옛날 신의 저주로 각기 다른 언어를 썼던 고대인들의 모습과 닮았다.

인간 자비와 인내 앞에 무너지는 바벨탑

인간들 사이의 단절, 나아가 각 나라 간 의사소통의 불가해함은 일본이란 극동의 땅에 이르러서는 귀머거리라는 불구 소녀의 귀를 통해 다시 절름발이질을 한다. 치에코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상. 디스코테크의 소음과 광란의 춤으로 가득 찬 세상은 치에코의 시점 샷으로 들어가면서 그 모든 소리가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작열하는 태양 대신 인공조명이 너울거리는 이 땅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혼돈만 가득 찬 것 같다. 치에코는 그 사이에 혼자 서 있다.

어머니가 자살한 치에코는 아버지와의 사이마저 소원하다. 치에코가 다리를 벌리며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고, 마약을 먹으면서까지 얻으려는 소통(그녀의 경우 언어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소통까지 포함한다)은 끝내 오지 않는다. 그녀가 나신으로 남자들을 유혹해도 그 유혹이 오히려 낯선 광기로 느껴진다.

자살, 병고, 유기, 저버림. 판도라 상자를 열고, 바벨의 탑을 쌓은 인간들은 어디서 구원을 얻을 것인가. 이냐리투가 전해주는 마지막 소통의 열쇠는 멀리 있지 않다. 추방된 어머니를 껴안는 아들, 아픈 아내가 바지에 오줌을 싸는데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편, 벌거벗은 딸을 안아주는 아버지. 최악의 경우에도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있는 자비와 인내의 문 앞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인간들은 소금기둥이 되는 형벌을 면하고, 거대한 바벨탑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바벨’은 한 감독의 예술적 성과에 대한 다국적 배우들의 경의와 협조의 증거품이나 다름없다. 전화통을 붙잡고 오열하는 브래드 피트의 주름진 얼굴, 바지에 오줌을 싸는 케이트 블란쳇, 악역을 맡은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그 모두가 한 감독의 예술적 영감을 실현하는 데 기존 이미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신에서 인간으로, 스타에서 배우로 지상에 내려왔다. 그래서 제79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노장 마틴 스코시즈 감독과 ‘디파티드’에 힘을 실어주었을지라도(스코시즈가 탄 상은 아카데미 감독상이 아니라 아카데미 공로상처럼 보인다) 사실 작품상의 진정한 임자는 ‘바벨’이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벨’의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미국 감독이라도 ‘디파티드’가 힘을 썼을까? 인간의 존재론적 고민에 대한 묵직한 사색. 단 21g으로 들어올린 바벨의 무게에 박수를 보낸다.



주간동아 576호 (p7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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