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한국 공연 때 이철 씨는 처음으로 ‘해변으로 가요’를 불렀다. 부인 아베 이쿠코 씨가 당시 공연 포스터에 나와 있는 이철 씨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여름이면 전국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히트곡의 첫 소절이다.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이는 재일교포 2세 이철(李徹·65·일본명 아베 데쓰) 씨다. 도쿄 시내 미나토(港)구 모토아자부(元麻布)에 있는 자택과 그가 운영하는 롯폰기(六本木)의 음식점 만푸쿠에서 각각 두 차례 이 씨를 만나 인터뷰했다.
“저작권을 둘러싼 재판 1심에서 승소했는데 피고 쪽에서 재판을 계속 진행한다고 해 답답합니다.”
그는 한국어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어서 읽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7월 부산지법 민사부가 원고 이철 씨의 저작임을 확인하는 판결을 내렸을 때, 그는 이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10월부터 2심이 시작됐고 지금은 마음이 영 편치 않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오랫동안 타인의 작사, 작곡으로 알려진 것을 바로잡음으로써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동안 다른 쪽에 지불된 저작권료를 이제 와 새삼스레 되찾으려 한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 물론 소송 제기 이후 발생하는 저작권료는 당연한 권리인 만큼 포기할 생각은 없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 보니 달랐다. 기타를 치면서 ‘별이 쏟아~지~이는 해변으로 가요’ 하며 흥겹게 노래 부르는 그는 그룹 보컬리스트로 활약하던 40년 전 청년기 모습 그대로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 진학 대신 음악인의 길을 택했다.
“말이 필요 없는 음악의 길을 가고 싶었습니다.”
68년 같이 공연한 키보이스 요청으로 빌려준 셈 … 저작권 1심 재판은 승소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당시만 해도 컸을 재일교포 특유의 심적 고통과 갈등이 진로 선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당시 그가 살던 집은 도쿄 남서쪽 쇼난(湘南) 해안에 있었다. 유명한 유원지인 이곳은 요즘도 여름이 되면 매끈한 피부, 발랄한 얼굴,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인파로 가득 메워진다. 평소에도 인근에 경승지와 문화유적이 많아 늘 활기에 넘친다.
“침대에 걸터앉아 창문 밖 해변을 바라보며 기타를 치면서 곡을 다듬었지요.”
25세의 청년 음악가가 당시 붙인 제목은 ‘하마베에이코(浜へ行こう)’. ‘해변으로 가요’라는 뜻이다. 그는 1966년 8인으로 구성된 가요그룹 ‘더 아스트로 제트’의 멤버로 활동하며 이 노래를 발표했다. 일본에서만 불리고 말았다면 이 노래를 기억하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68년 7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이철 씨가 이 노래를 불렀다. 그는 당시 공연 안내 포스터를 집에 소장하고 있었다.
이철 씨가 소장하고 있는 ‘키보이스’의 앨범. 한국어 버전의 ‘해변으로 가요’가 실려 있다(왼쪽). 1968년 공연차 한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하네다 공항에서 찍은 기념사진. 맨 왼쪽이 이철 씨이고, 맨 오른쪽은 그의 형수로 당시 공연의 코디네이터를 맡았던 이토 하루코 씨.
포스터에는 ‘아시아 보컬그룹 대경연’이란 제목 아래 한국, 일본, 미국, 인도네시아 4개국 참가진이 소개돼 있다. 포스터 왼쪽 하단에 얼굴이 크게 실린 사람이 바로 이철 씨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일본말로 노래를 부를 수 없어 가사를 한국말로 바꿔 불렀는데 번역해주신 분이 제 형하고 친했던 소설가 이호철 씨입니다.”
그의 형 이건(李健·2003년 작고) 씨는 도쿄대학 출신의 수재로 국제관계 평론가, 저술가, 항공회사 JAS 서울지점장 등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정계·재계·문화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한일친선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건 씨의 부인 이토 하루코(伊藤治子) 여사 역시 한국관광공사 도쿄지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는 등 부부가 한일 양국민 사이의 다리를 놓기 위해 헌신했다.
이건 씨가 동생의 서울 공연을 앞두고 친구인 이호철 씨에게 부탁해 탄생한 것이 오늘날 불리는 ‘해변으로 가요’의 가사다.
“공연이 끝나고, 한국 대표로 참가했던 ‘키보이스’ 쪽으로부터 이 노래를 한국에서 부를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아 그러라고 했습니다. 당시야 저작권이니, 그런 개념조차 없을 때 아닙니까.”
이철 씨는 거실 한편에 모아둔 LP판 레코드 속에서 ‘키보이스 특선 2집’ 앨범을 꺼냈다. ‘해변으로 가요’라는 노래가 실려 있다. 왕년에 이름을 떨쳤던 가수 얼굴도 보인다. 이철 씨가 작사, 작곡한 노래는 이밖에도 10여 곡이 있으나 LP판으로 만들어진 것은 없고 그룹 ‘더 아스트로 제트’용이었다.
“재판 도중에 제가 작곡했다는 증거물로 이 노래를 만들었을 당시의 악보를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38년 전 악보가 어디에 있는지 도대체 찾을 수가 있나요. 존 레논 악보가 어디서 우연히 발견됐다는 소식이 요즘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 겁니다. 자신이 만든 것을 증명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허허.”
나중에 우연히 작사·작곡자가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됐고, 이를 바로잡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서 부득이 소송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70년대 초 그룹 활동 접고 가수들 키워 … 현재 무대연출과 음식점 경영
1970년대 초 그룹이 해체된 뒤 그는 음악을 가르치는 지도자로 변신했다. 특히 1970년대 중반부터 10년 가까이 롯폰기에서 라이브 하우스 ‘슈퍼스타즈’를 운영하며 수많은 기타리스트와 가수 등을 배출했다. 현재 그는 자신의 일본 이름에서 딴 ‘TA 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다. 각종 무대연출 일과 음식점 경영을 아우르는 회사다.
“며칠 전에도 롯폰기힐스 앞 특설무대를 연출하는 일을 맡았어요. 그때 아내도 직접 출연했죠.”
그는 15세인 고교 1학년 때 부인 아베 이쿠코(阿部伊公子·50) 씨를 만났다. 당시 발레리나로 데뷔했던 부인을 만난 것도 음악이 계기가 됐다. 부인이 소속된 유명 프로덕션의 부탁으로 음악 부문을 맡으며 인연을 맺게 된 것.
“그때는 사제 관계였지요. 호호.”
15세 소녀의 수줍은 미소를 내보이며 이쿠코 씨는 30세 음악전문가와의 만남을 회상했다.
롯폰기 번화가의 불고깃집 만푸쿠에서 가끔 이들 부부가 직접 손님을 맞을 때도 있다.
“1992년에 경기가 나빠지자 가게에 세 들어 있던 사람이 갑자기 나가게 되면서 식당 일을 시작했어요. 요즘은 한국 음식 붐으로 그런대로 장사는 잘되지만, 광우병 파동으로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 금지되는 바람에 고기 값이 비싸져서 돈벌이는 그저 그래요.”
하지만 그는 사람 만나는 일이 좋다 보니 음식점 일을 계속 한다고 한다.
기자는 언젠가 친구와 함께 술을 한잔하고 도쿄의 한 가라오케(노래방)에 들렀을 때 ‘해변으로 가요’의 일본어 가사가 궁금해서 확인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철 씨가 원래 만든 일본어 가사가 아니라 이호철 씨가 만든 한국어 가사를 일본어로 직역한 것이었다. 언젠가 이철 씨가 만든 처음의 가사로 바로잡아질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