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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김과 백동일 ‘同病 10년’

조국 위한 한마음 → 감옥행과 추방 → 원망 그리고 용서 → 10년 만의 만남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로버트 김과 백동일 ‘同病 10년’

로버트 김과 백동일 ‘同病 10년’

백동일

미국에서 정보수집을 한 한국 무관 백동일(58), 조국의 첩보원에게 정보를 제공한 로버트 김(64). 둘은 후회했고 원망했으며 화해했고 용서했다. 백동일은 무엇을 위해 ‘독이 든 사과’를 먹었고, 로버트 김은 ‘왜’ 108개월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는가.

2005.11.6

9년1개월13일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너무나 큰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대가 없이 정보를 전해줬을 뿐인데….’

그러나 준비해온 말은 입가를 맴돌 뿐이었다. 그러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백동일은 옛 동지를 끌어안았다.



로버트 김과 백동일 ‘同病 10년’

로버트 김

백동일의 품을 빠져나온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은 준비해온 성명서를 차근차근 읽었다.

“나와 백동일 대령과의 사건은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한국적 민족주의와 미국적 세계주의의 충돌에서 일어났다는 측면도 있습니다.”

1995.11.28

한국 해군은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 해군 정보 교류를 가졌다. 미국 해군성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재직하던 로버트 김은 정보국의 지시를 받는다.

“한국과 정보장교 회의가 있는데 참석해주시오. 통역도 좀 해주고…. 한국은 우방국이니 적절히 대접하시오.”

이로써 그는 한국의 정보요원(무관)과 처음 만났다. 백동일은 “마치 부처님을 보는 듯했다”고 첫 만남을 기억한다.

백동일-화이트(White)로 불리는 공인된 스파이-은 파괴력 있는 첩보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요로에 북한 정보를 달라고 요청했으나,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백동일은 로버트 김과의 첫 만남에서도 도움을 구한다. 기대가 크지는 않았다.

“북한 관련 첩보가 부족합니다.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로버트 김은 “도울 수 있는 한 도와주겠다”고 의례적으로 답했다.

백동일은 국군의 날 리셉션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장을 로버트 김에게 보낸다.

로버트 김이 북한 주민과 북한군 동향, 구호단체가 보내준 식량의 배분 실태, 북한 해군의 동향 등을 벌써부터 우편으로 보내온 터다.

9월24일(음력 8월15일)은 모국의 추석. 로버트 김은 기뻤다. 그는 자신이 제공한 정보가 한국에 유리하게 이용된 결과를 접하는 게 흐뭇했다.

‘나는 한국인이다.’

모국이 주최한 파티에 한국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감격했다.

백동일과 로버트 김은 시선을 은밀하게 맞추었다. 10개월여 동안 네댓 차례 만났을 뿐이지만, 비밀을 공유한 동지의 눈빛은 달랐다.

파티가 무르익어갈 즈음, 불청객 셋이 들이닥친다. 미국 FBI는 벌써부터 백동일과 로버트 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로버트 김?”

“예, 그렇습니다만….”

백동일과 로버트 김은 9년1개월13일의 긴 이별을 시작한다. 그리고 둘은 한국과 미국에서 나락으로 추락했다.

1997.9.9

“입 벌려!” “혀 내밀어!”

그는 앨런우드 교도소로 이감됐다. 구멍이란 구멍은 다 훑었다. 그가 치욕을 당하고 있을 때 모국은 그를 외면했다. 그는 원망한다, 또 분노한다. 백동일에게, 그리고 대한민국에게.

그는 간첩 혐의를 벗기 위해 한국의 정보 장교를 법정에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한국의 입장이 곤란할 것이다. 한국 정부가 억울한 혐의를 벗겨주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의 탄원을 정부는 무시했다.

“당신의 행동은 무관(백동일)과의 개인적 관계에서 비롯한 것이지, 한국 정부가 관계된 행위는 아니었다.”(정부)

한국 정부의 답신은 조국에 대한 사랑을 뿌리째 뽑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파산했으며 정신적으로도 무너져내렸다.

백동일은 후회했다, 독이 든 사과에 취해 파국을 막지 못한 것을. 그는 미국의 감시가 시작됐음을 알면서도 로버트 김의 정보를 계속 받았었다.

“우편으로 소소한 정보를 보내오더니, 나중엔 비밀문서를 ‘비밀’이라는 표시를 지워 보내왔다. 막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벌써부터 독에 깊게 취해 있었다.”

백동일은 면책특권을 가진 외교관이어서 체포되지 않았으나 한국으로 추방돼 대령으로 계급 정년을 마쳤다. 꿈인 제독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미국은 미군과 작전을 공유하는 부대에선 백동일이 근무할 수 없다고 한국에 통보하기도 했다.

백동일은 옥중의 로버트 김에게 편지를 보냈다. 예의를 갖춘 답신이 돌아왔으나 행간은 차가웠다. 로버트 김이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백동일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싶었다.

2003.7.27

로버트 김 가석방을 1년 앞두고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결혼정보업체 선우 대표 이웅진 씨를 회장으로 하는 로버트 김 후원회가 발족했다. 정부는 로버트 김을 외면했으되, 사람들은 그를 기억한 것이다.

이 씨는 ‘월간조선’에 실린 로버트 김 관련 기사를 접하고 그를 돕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가 로버트 김에게 보낸 편지들은 조국에 대한 분노를 조금씩 녹여주었다.

“한국이 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로버트 김)

로버트 김 후원회엔 백동일도 참여했다. 그는 후원회가 꾸려진 데 감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후원회원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백 대령은 김 선생님을 이 모양으로 만든 가해자가 아닌가.’

후원회는 백동일한테서 곡절을 듣고 그를 끌어안는다. 또 www.robertkim.or.kr이란 사이트를 만들고 한 통화당 2000원이 적립되는 ARS 전화를 개설했다. 2주 동안 5만여명의 사람이 다녀갔다. 모금액은 1억5000만원.

파산한 로버트 김에겐 큰돈이었다. 그러나 그가 감격한 건 돈이 아니라 잊지 않고 기억해준 마음이었다. 조국에 대한 로버트 김의 분노는 다시 사랑으로 바뀌었고, 백동일에 대한 원망은 용서와 화해로 거듭났다.

2004.7.28

로버트 김은 반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으나 보호관찰이 남아 있었다.

“죄스럽습니다. 꿋꿋한 의지를 갖고 다시 뵙시다.”

백동일은 로버트 김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고 싶었으나, 그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다.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 일본 비자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수시로 미국에 e메일을 보냈다. 두 사내는 e메일 대화를 거치면서 미래를 위해 과거를 그만 접기로 한다.

“뒤를 돌아보지 맙시다.”(로버트 김)

그걸로 끝이었다. 화해니 용서니 하는 말은 필요 없었다. “도울 수 있는 한 도와주겠다”던 1995년 11월28일처럼.

2005.11월 그리고…

로버트 김은 10월 보호관찰 집행정지로 온전한 자유를 되찾았다. 백동일은 발 빠르게 로버트 김 한국방문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그의 귀국을 추진했다.

로버트 김은 11월24일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등을 만난다.

“내가 죄스러운 건 로버트 김이 순수했기 때문이다. 85년 돈을 받고 미 국방부의 자료를 빼낸 유대계 미국인 조너선 폴러드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는 폴러드를 끌어안았고, 한국 정부는 그를 방치했다. 정부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백동일)

백동일은 뒤늦게 그를 찾는 사람들이 못마땅하다. 정치권을 비롯해 로버트 김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

“그가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 또한 옳지 않다. 보통 사람들이 못하는 일을 한 애국자일 뿐이다.”

로버트 김은 미국으로 돌아간 뒤, ‘로버트 김의 편지’(www.robertkim.or.kr에 접속해 회원으로 등재하면 편지를 받아볼 수 있다)로 모국과의 끈을 이어갈 예정이다.

“저는 10년을 여러분의 도움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하며 살고 싶습니다.”(로버트 김)

10년 동안 겨우 네댓 번 만난 두 사내는 ‘왜?’에 대한 답을 갖고 있을까. 백동일은 독이 든 사과가 아니라, 로버트 김의 순수함에 취해 있는 듯했다.



주간동아 2005.11.15 510호 (p30~31)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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