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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의 茶人기행|의재 허백련

차를 많이 마시면 나라가 흥하리라

차를 많이 마시면 나라가 흥하리라

차를 많이 마시면 나라가 흥하리라

의재 허백련 묘소.

가을비가 멎기를 기다릴 겸 하룻밤을 광주에서 보내고 아침 일찍 무등산을 오른다.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을 만나러 가는 중이다. 등산객을 상대하는 가게를 지나 증심천의 첫 다리를 지나니 의재의 유적들이 나타난다. 다리 이름부터 의재교다. 증심천 왼쪽으로 의재가 만년을 보냈던 춘설헌과 그의 묘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의재미술관, 그리고 위쪽 무등산 산자락에 5만여 평의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일본인이 일궈놓은 차밭을 의재가 광복 후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삼애다원(三愛茶園)이라고 한 것이다.

호남 남종화단 이끈 거목 … 만년엔 차에 심취

이른 아침이라 푸나무들이 촉촉하다. 한적한 산길을 혼자 오르는 맛도 맑은 차 맛과 견줄 만하다. 춘설헌은 원래 띳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다. 노산 이은상과 의재는 다우였던 것 같다. 서로 만나 밤새 차를 마신 뒤 노산이 지은 다시(茶詩) ‘무등차의 고향’이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무등산 작설차를/ 돌솥에 달여내어/ 초의선사 다법(茶法)대로/ 한 잔 들어 맛을 보고/ 또 한 잔은 빛깔 보고/ 다시 한 잔 향내 맡고/ 다도(茶道)를 듣노라니/ 밤 깊은 줄 몰랐구나.

그림과 차밖에 몰랐던 의재는 고종 때 진도에서 태어나 8·15광복 전후의 격동기를 살다 간 호남화단의 거물이자 단군신앙의 신봉자였다.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가문의 영향이 컸다. 소치 허유[뒤에 연(鍊)으로 개명함]가 종고조뻘이다(실제로 의재는 11세에 소치의 아들인 미산 허형에게 묵화의 기초를 익혔다). 일본 메이지대학에 입학하여 법정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3년 수료 후 미술로 진로를 바꾼 것도 그런 사연 때문이었다. 의재는 도쿄에 머무는 6년 동안 일본의 남종화 대가인 고무로(小室翠雲)에게 인정받아 그의 화실에 기숙하며 영향을 받는다.



귀국한 그는 1922년 서울로 올라가 도쿄 유학시절 가깝게 지낸 동갑지기 인촌 김성수를 우연히 만나 그의 집에서 기숙하며 그림을 그리다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산수화를 출품, 1등 없는 2등에 입상하며 각광받는다. 1927년 이후에는 공모전에 출품하지 않고 광주 무등산에 정착,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견지하며 호남의 남종화단을 이끈다.

그는 남종화뿐만 아니라 초의선사의 다맥도 잇는다. 초의선사의 다맥 중 한 갈래가 호남의 남종화맥을 따라 소치-미산-의재의 춘설차로 이어져온 것이다. 육당 최남선도 광주에 들르면 꼭 의재의 춘설헌을 찾아 차를 마시고 갔다. 육당의 ‘무등차(춘설차)’라는 연시조 중에 두 번째 시조는 차를 마시면 나라가 흥한다는 음다흥국(飮茶興國)의 주제가 느껴진다.

차 먹고 아니 먹은 두 세계를 나눠보면/ 부성(富盛)한 나라로서 차 없는 데 못 볼러라/ 명엽(茗葉·찻잎)이 무관세도(無關世道)라 말하는 이 누구뇨.

두말할 것도 없이 차야말로 세상의 도(道)와 무관치 않다고 의재가 육당에게 말했을 터다. 평소에도 의재는 제자들에게 ‘고춧가루를 많이 먹으면 국민들의 성질이 급해져서 나라가 망하고, 차를 많이 마시면 정신이 차분해져서 나라가 흥한다’고 당부하곤 했던 것이다.

육당에게 영향을 받았음인지 만년에 의재는 그림과 차 말고도 단군신앙에 심취, 옛 기록을 좇아 무등산 한 봉우리에서 천제단(天帝壇) 터를 발견하고 사재를 털어 단군 신전을 지으려다 기독교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의재가 자신의 화업을 잇고 있는 손자 허달재에게 “내 그림이 최고로 보일 때는 손이 앞서 간 것이고, 작게 보일 때는 눈이 앞서 간 것이다”고 경책했다는데, 손과 눈을 떠나 마음으로 그리라는 말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는다. 비단 그림뿐만 아니라 차를 만드는 일도 그러한 마음이라야 다인의 혼이 담길 것이기 때문이다.

☞ 가는 길

광주 시내에서 증심사 가는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증심사 가는 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의재의 유적지에 다다른다.

의재 허백련 묘소.



주간동아 2005.10.25 507호 (p5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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