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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조류독감 공포

‘21세기 흑사병’ 조류독감 남의 일 아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과 비슷 엄청난 피해 예상 … 예방백신·치료제 확보 등 한국 대책 너무 허술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21세기 흑사병’ 조류독감 남의 일 아니다

“조류독감이 한국에 상륙할 경우 전체 인구의 32%가 감염돼 최대 440만명이 사망할 수 있다.”

10월10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핵폭탄급 발언이 흘러나왔다. 한나라당 안명옥 의원의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에 국감장 분위기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여당 의원들을 향해 안 의원은 ‘이 자료가 국내 전염병 방지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질병관리본부에서 나온 것’임을 공표했다.

하지만 아직 진위가 밝혀지지 않은 탓인지 언론들은 그리 큰 비중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제목만은 하나같이 ‘조류독감 440만명 사망할 수도…’라며 선정적으로 달았다. 주식시장에선 조류독감 관련 바이오주들이 상종가를 기록했고, 닭 관련 주는 곤두박질쳤다.

한국에 상륙했을 때 440만명 사망 신빙성 논쟁

안 의원이 국감장에서 인용한 자료는 질병관리본부가 고려대 의대에 의뢰해 만든 ‘시뮬레이션을 통한 신종 전염병 대응전략 개발에 관한 연구’라는 보고서에서 발췌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는 어디에도 신종 전염병이 정확히 조류독감을 지칭한다는 문구가 없다. 때문에 이 자료가 과연 신빙성이 있는 것인가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이 자료를 보면, 연구진들은 ‘시뮬레이션은 인수(人獸)공통 전염병을 바탕으로 했으며, 2004년 현재 가장 위협이 되고 있는 신종 전염병은 조류 인플루엔자’라고 못박고 있다. 시뮬레이션 후반에 있는 도상 훈련용 시나리오도 비록 ‘괴질’이라고 돼 있지만 내용은 누가 보더라도 조류독감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례가 조류독감이 인간 전염병으로 번져 중증 호흡기 질환이 전국에 확산되었을 때를 가정하고 있는 것.



조류독감이 국내에 창궐할 경우 440만명이 사망할 것이라는 가설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보고서는 이에 대해서도 이미 답을 내고 있다. 연구진은 모델별로 최악의 시나리오와 최상의 시나리오를 작성했으나 각 언론들은 앞다투어 최악의 시나리오만 집중 보도했다. 보고서에는 방역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은 경우 1375만여명 감염에 441만여명 사망, 방역 조치가 최하일 때 924만여명 감염에 143만여명 사망, 중간 수준일 때 606만명 감염에 18만8000명 사망, 그리고 최상의 방역 조치가 취해질 경우에는 339만여명 감염에 9만2420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방역 조치를 취하느냐 취하지 않느냐, 또 어떤 수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사망자 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어떤 수치를 믿어야 하는가, 또 아무리 적게 잡더라도 사망자가 9만2420명인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답은 삐걱거리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최근 행보에서 찾을 수 있다.



‘21세기 흑사병’  조류독감 남의 일 아니다

조류독감 대응과 관련 늑장대응을 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질병관리본부.

WHO의 조류독감 방역담당관인 나바로 박사는 9월28일 “조류독감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을 경우 조류독감이 전 세계적인 대역병으로 번져 적게는 500만명, 많게는 1억5000만명이 사망할지도 모른다”고 말해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바 있다. 문제가 커지자 WHO는 곧바로 진화에 나섰다. 대변인인 딕 톰슨을 통해 공식 인명 피해 예상치를 ‘200만명에서 740만명 수준’으로 수정한 것.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통해 “WHO가 공식적인 예상 인명 피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은 각국이 백신과 치료제를 비축하고 비상방역 대책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이 경우도 세계 언론이 방역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을 때의 상황, 즉 최악의 시나리오만을 보도한 탓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WHO가 공식적인 수치를 최악 수준의 5%만 인정했으니 거기에 우리의 상황을 대입해보면 440만명의 5%인 22만명 정도가 사망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백 번 양보해 한국이 최상의 방역국가라고 가정해도 부산 인구(366만)와 맞먹는 사람이 조류독감에 감염되고, 1년 동안 암으로 죽는 사람(6만5000명)보다 훨씬 많은 수가 2개월 안에 몰살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스페인 독감 H1N1 바이러스 정체 밝혀낸 미국 학자들

하지만 이런 긍정적 전망은 10월7일 미국의 학자들에 의해 완전히 깨졌다. 1918년 전 세계적으로 2000만명에서 5000만명을 희생시킨 스페인 독감의 원인 바이러스 정체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87년간 냉동돼 있던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을 재구성해 생쥐에 넣어 증식한 결과, 맹위를 떨치고 있는 조류독감 바이러스 H5N1과 거의 유사한 특성이 드러난 것이다.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형태는 H1N1으로 조류독감과 차이가 있었지만, 돼지와 같은 중간 감염체(숙주) 없이 조류를 죽이는 점과 인간에게도 감염을 일으킬 수 있는 점에서 거의 흡사한 모습을 보였다.

이전까지는 돼지와 같은 중간 숙주 없이 인간에게 감염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H5N1이 유일했다. 급속한 감염의 전파속도도 닮은꼴이었다. 이로써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변이를 통해 사람끼리 감염되는 대륙 간 전염병(범유행, 팬데믹)을 일으킬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뒷 기사 참조). 그러자 WHO 이종욱 사무총장은 “조류독감의 인간 대 인간 감염(변이)과 전 세계적인 대유행은 시기와 정도가 문제지 반드시 올 것”라고 확언했다.

만약 조류독감이 스페인 독감의 전례를 따른다면 질병관리본부의 시뮬레이션은 완전히 틀린 것이 되고, 희생자는 엄청나게 늘게 된다. 스페인 독감은 감염자 중 사망률이 2.5%에 이르는 반면, 질병관리본부가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잡은 추정 사망률은 감염자 대비 도시민 1%, 지방민 2%였기 때문이다.

‘21세기 흑사병’  조류독감 남의 일 아니다

호흡기 전염병 발생 시 응급대처 훈련을 하고 있는 국립인천공항검역소 의료팀.

이런 사실이 밝혀지자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은 바빠졌다. 이미 조류독감 백신 생산 등을 위해 39억 달러의 예산을 마련해둔 미국은 조류독감 방지를 위한 예산을 100억 달러로 늘렸다. 또 조류독감 바이러스에 유일하게 효과가 있는 치료제(항바이러스제) ‘타미플루’(상자 참조) 비축 계획을 1억5000만 명분까지 늘렸다. 미국 인구(2억7000명)의 절반이 넘는 분량의 타미플루를 확보하겠다는 것. 이미 미국은 230만 명분의 타미플루를 비축해놓았다. 영국이 1460만 명분의 타미플루를 주문했고, 프랑스·캐나다 등은 전 국민의 15~20%에 해당하는 양을 확보할 예정이다.

한국, 독감 치료제 타미플루 70만 명분 확보에 그쳐

그렇다면 우리 질병관리본부의 조류독감 준비 상황은 어떨까. 이종욱 사무총장은 “한국은 대처 상태가 아주 좋은 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실망스럽다. 먼저 질병관리본부는 조류독감의 유일한 치료제인 타미플루의 확보에 실패했다. WHO가 권장하고 있는 한국의 타미플루 필수 비축량은 150만 명분, 자신들이 작성한 가상 시뮬레이션상에서 가장 방역이 좋은 상태에서 뽑은 비축량만 400만 명분인데도 질병관리본부가 올 10월까지 확보한 타미플루의 비축량은 전 인구의 1.7%에 불과한 70만 명분이다.

당초 질병관리본부는 지난해 조류독감이 동남아시아에서 확산되자 타미플루 100만 명분을 구입한다며 예비비 조로 기획예산처로부터 125억원을 확보했다. 하지만 질병관리본부는 한꺼번에 100만 명분에 대한 주문을 하지 않고 50만 명분에 대한 신청만 해 남은 예비비 65억원을 기획예산처에게 환수당했다. 예비비는 긴급한 상황에서 편성되는 것인데, 질병관리본부가 요구조차 하지 않으니 급하지 않은 예산으로 판단한 것. 그리고 올해 질병관리본부가 배정받은 예산은 20만 명분뿐이었다. 그런데 질병관리본부는 백신을 사야 할 예산 중에서 3100만원으로 방송사 프로그램 제작을 지원하거나 현판을 제작하는 등에 전용하기도 했다. 현재 질병관리본부는 추가로 30만 명분을 확보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아직 주문을 하지 않은 상태다. 스위스에 있는 다국적 제약사 로슈의 타미플루 한 해 생산량이 1000만 명분임을 고려하면, 미국 등 선진국의 주문이 밀려 있어 한국이 타미플루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특히 일본의 사례를 보면 질병관리본부의 아마추어리즘은 더욱 뼈아프다. 일본은 2003년 조류독감이 발생하자 지난해 아예 로슈의 ‘타미플루’와 약효가 같은 복제 약품을 개발한 다음 비축에 들어갔다. 타미플루는 국제 저작권 협약에 따라 20년간 특허가 보장된 제품으로, 이의 복제품을 만들어 팔면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법의 허점을 노렸다. 복제 약품을 만들기만 하고 판매를 하지 않으면 국제법을 어긴 게 아니라는 점을 이용한 것. 일본은 조류독감이 창궐할 경우 이를 국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할 계획인데, 이렇게 하면 판매행위가 되지 않아 국제법도 지키고 자국민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이외에 싱가포르는 전체 인구의 10%인 40만 명분의 타미플루를 확보했다.

‘21세기 흑사병’  조류독감 남의 일 아니다

공기가 절대 실외로 유출되지 않도록 음압 설비(감염 차단 장치)가 되어 있는 실험실.

조류독감의 예방백신 생산에서도 한국은 밀려나 있다. 독감 인플루엔자는 원래 치료제가 없고, 대신 예방백신을 맞음으로써 질병을 회피하는 게 최상의 치료법이다. WHO는 한국인이 사무총장으로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자체 개발한 조류독감 백신의 생산 권한을 한국에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국에 독감 예방백신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이 단 한 군데도 없기 때문이다. 녹십자사가 전남 화순에 독감백신 공장을 만들어 2009년부터 생산에 들어갈 계획만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의 한 관계자는 “WHO가 동남아시아의 조류독감 바이러스로 예방백신을 만들어 그 생산 판매를 10개의 다국적 제약사에 맡겼다”며 “미국은 이미 자체적으로 예방백신의 개발을 마치고 곧 양산 체제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WHO 산하 국제바이러스연구소가 한국에 있음에도 이 연구소는 10월 들어서야 조류독감 바이러스 생산을 위한 컨소시엄을 만들 계획을 짜고 있는 상태다. 조류독감의 공포가 코앞에 닥친 점을 생각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격리병상과 병원 확보도 제자리 사실상 무방비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인간 전염병이 돼 국내에 도착할 경우 조류에 대한 방역작업도 중요하지만 병원체의 감염 차단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대책 중 하나가 격리병상과 격리병원의 확보다. 격리병상이란 감염자가 내뱉는 공기가 절대 외부로 유출되지 않는, 즉 완벽한 감염 차단 장치가 된 음압시설을 말한다. 음압시설이란 실내의 압력을 낮춰 밖의 공기는 내부로 유입돼도 안의 공기는 절대로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장치. 2003년 8월 맹위를 떨치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종결되자 질병관리본부는 대통령에게 2005년까지 격리병상을 280개 수준에서 400개로 만들겠다고 보고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280개 격리병상 중 음압시설이 된 곳은 서울대병원 5개소와 신촌세브란스병원 6개소, 삼성서울병원 4개소 등뿐이다. 질병관리본부는 한술 더 떠 아예 음압시설이 된 곳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른다. 질병관리본부의 담당자는 음압시설이 설치된 곳이 전국에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질병관리본부 내 일부 실험실을 빼고는 음압시설이 된 병실은 전국에 단 한 곳도 없다”고 답했다.

질병관리본부는 뒤늦게 내년에 총 200병상의 음압시설을 만들겠다며 103억원의 예산을 신청했지만, 53억원이 삭감되고 50억원만 반영돼 결국 100병상만 확보하기로 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재희 의원은 “사스 당시 격리지정 병원들이 의심환자를 받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며 “주변 나라들은 음압시설이 된 격리병상을 수백 병상, 수천 병상 확보하는 것에서 벗어나 병원 전체를 음압시설로 만든 곳도 있다”고 질타했다. 일본은 음압시설이 된 격리병상을 1744개, 홍콩은 200개, 중국 500개, 대만 300개, 싱가포르도 94개 확보해놓고 있다. 이 병상들은 격리된 병동에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전문가들은 지금 상태로선 오직 하나만이 희망이라고 말한다. 조류독감이 인간 전염병으로 번지지 않고, 한국만을 비켜나가는 것.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를 두고 당장 아프면 예산을 배정하고, 잠잠하면 예산을 뺏는 정부 부처의 행태는 아직도 조류독감의 문제를 남의 나라 일로 생각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반영한다.





주간동아 2005.10.25 507호 (p18~21)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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