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5

2005.05.17

“소중한 가족이 ‘不詳者’라니”

가매장된 행려사망자 10명 중 9명 신원 미확인 … 범죄와 연관 없으면 신속한 화장 후 안치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5-05-11 17:5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소중한 가족이 ‘不詳者’라니”

    경기 고양시의 벽제리공원묘지에 있는 행려사망자들의 가매장 묘지. 봉분이 없는 게 일반 묘와 다른 점이며, 이름조차 확인되지 않은 묘가 90%에 달한다.

    ‘2004-6양천 불상’ ‘2004-7 중구 불상’ ‘2004-8 중구 불상’ ‘2005-2 종로 불상’ ‘2005-3 강서 불상’ ‘2005-5 중구 불상’….

    경기 고양시 벽제동 벽제리공원묘지에는 많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잠들어 있다. 이들의 이름은 ‘불상(不詳)’. 야산이나 길거리, 병원 응급실 등에서 죽은 채 발견됐으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이들에게 국가가 붙여준 것이다. ‘2005-5 중구 불상’이란 2005년 올해 다섯 번째로 이곳에 묻힌, 서울 중구청 관할 지역에서 발견된 사람이란 뜻이다. 돌에 새겨진 이 간단명료한 이름 판이 묘비(墓碑)인 셈이다.

    “행려사망자 혹은 무연고사망자라고 하지요. 공원묘지 제1구역 중 일부인 5000평이 이들을 위한 묘지입니다. 서울 지역에서 발견된 행려사망자들은 모두 이곳으로 오게 됩니다. 90% 이상이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장묘사업소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한 이용집 씨는 “가매장한 지 10년이 지나면 합동분묘를 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이곳에는 698기의 가매장 묘가 있고, 3000여 기가 합동분묘돼 있다. 가매장이라 하지만 사실 일반 매장과 다를 바 없다. 단지 뒤늦게라도 가족들이 찾아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에서 가매장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름조차 없는 묘지를 가족들이 알아서 찾아올 리 만무하다. 이 씨는 “1년에 한 가족 정도가 수소문 끝에 시신을 수습해 가는데, 이름만이라도 확인된 행려사망자에 한할 뿐”이라고 말했다.

    “1년에 한 가족 정도 시신 수습”



    그나마 가매장됐다면 다행한 경우다. 이다음에 가족이 나타나면 시신을 꺼내 유전자검사를 하거나 범죄로 인한 희생인지 여부를 따져봐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 행려사망자는 쓰레기통에서 시신이 발견된 경우 등 범죄와의 연관 여지가 남아 있을 경우를 제외하곤 화장된다.

    경기 파주 용미리 1묘지의 한 가건물에는 이렇게 화장된 행려사망자들이 보관돼 있다. 이 ‘무연고 추모의 집’은 2만7000여명의 행려사망자를 플라스틱 상자에 납골해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다. 이곳 역시 4명 중 1명꼴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불상자’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서울시에서 발생하는 행려사망자 처리를 전담하고 있는 성바오르장의사의 정재로 씨는 “95% 이상을 화장해 납골당에 안치한다”고 말했다.

    실종된 가족을 애타게 찾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많은 이들이 자기 이름조차 밝혀두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다. 이 둘 사이엔 교집합이 없을까. 교집합이 있다면, 그들을 연결해줄 수 있지 않을까.

    1998년 5월 서울의 한 시립병원에서 사망한 김모(당시 45세) 씨는 4년 반이 지난 2002년 11월에야 아내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대구 사람이던 김 씨는 서울에 사는 형제를 만나러 갔다가 뇌출혈로 길거리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몇 달 뒤 벽제리에 묻혔다. 그의 아내 조모 씨는 전국의 행려사망자 기록을 뒤지기 시작한 지 1년 만에야 남편의 쓸쓸한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소중한 가족이 ‘不詳者’라니”

    경기 파주 용미리 1묘지에 있는 ‘무연고 추모의 집’(위)과 내부 모습.

    “병원, 장의사 사무소, 구청, 경찰서…. 여기저기를 뒤지고 또 뒤졌어요. 천신만고 끝에 벽제리에 있는 남편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아주 복잡했어요. 남편이 길에 쓰러졌을 때 신분증도 없었고, 지문 채취로 신원 확인하는 데도 실패했다고 하더군요. 세상 떠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바로 장례를 치러 주지 못했다는 거…. 마음에 한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어요.”

    한 해 발생하는 행려사망자 수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보건복지부 노인지원과가 이 업무를 관할하고 있지만, 행정처리에 드는 비용(1구당 40만∼50만원의 장례비)을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가 부담하기 때문에 통계를 보고받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서울에서 발생한 행려사망자가 341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전국적으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행려사망자가 발생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행려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병원과 경찰은 행려사망자 신원을 알아낸 뒤 가족을 수소문한다. 그러나 가족이 나타나지 않거나 시신 인수를 포기할 때 해당 지자체에 관련 서류를 넘기고, 지자체가 ‘행정처리’를 도맡는다. 행정처리란 지자체와 계약을 맺은 장의사를 통해 시신을 화장하거나 매장하는 일. 시신이 부패했거나 유골 상태로 발견돼 신원 확인이 불가능할 경우 경찰은 수사에 나선다. 마땅한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지자체로 넘겨 행정처리를 하게 된다.

    지난해 서울에서 314명 행려사망자 발견

    아예 신원 확인이 어려운 변사체들에 대한 통계 또한 정확히 파악되고 있지 않으나 연간 200여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에 따르면 백골 상태로 신원 확인이 의뢰되는 경우가 연간 150건 남짓이다. 또한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변사지문계에 접수되는 신원 확인이 필요한 변사 사건은 연간 670건 정도다. 변사지문계 박희찬 경사는 “의뢰 건수의 10% 정도는 시신 부패 등 때문에 지문 감식으로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행려사망자는 특히 봄에 많이 발생한다는 게 경찰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겨울눈이 녹으면 야산 등지에서 등산객 차림의 행려사망자들이 발견된다는 것. 그러나 발견됐을 때는 시신이 이미 많이 부패된 상태이기 때문에 신원 확인이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경찰관과 지자체 공무원들은 “행려사망자의 가족을 찾는데 발 벗고 나서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는다. 서울 일선 경찰서의 한 강력계 형사는 “전산망에 등록된 주소지에 파출소 직원을 보내는 데, 해당 주소지에 가족이 살고 있지 않으면 무연고자로 간주할 뿐 더 이상의 노력은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라고 전했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사망자의 경우 인근 지역 실종자들에 대해 탐문수사를 벌인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도 가족이 나타나지 않으면 더 손쓸 방법이 없다는 것.

    서울 일선 구청의 한 관계자는 “행정처리를 하면서 두 개 일간지와 구청 홈페이지에 간단히 공고를 내지만, 이를 보고 찾아오는 가족은 거의 없다”며 형식적인 절차임을 시인했다. 공고는 행려사망자가 발견된 당시의 정황 정도만 담고 있다. 때문에 설사 실종자 가족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만 보고 자신의 가족이라고 판단하기 어렵다.

    “소중한 가족이 ‘不詳者’라니”

    2001년 3월 실종된 정은식 씨(오른쪽)와 그의 아내가 행복했던 시절의 모습.

    경찰서와 구청의 ‘신속한’ 업무 처리로 인해 행려사망자들이 너무 빨리 사라지는 것도 문제다. 딱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변사 사건을 오랫동안 갖고 있으면 ‘실적’에 좋지 않기 때문에 보통 6개월 안에 내사종결한다는 게 일선 형사들의 귀띔. 실제로 2002년 서울 강서경찰서는 아파트 단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70세 노인을 신원도 밝혀내지 못한 채 사건 발생 50일 만에 벽제리에 가매장시켰다.

    지난해 12월 강릉의 한 야산에서 발견된 행려사망자도 반년이 채 되지 않은 4월 ‘행정처리’됐다. 이 사망자는 등산가방, 등산지도 등과 함께 백골 상태로 발견됐다. 최소 6개월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될 뿐, 신원 확인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강릉경찰서는 전국 경찰서에 변사자 신원수배 전단지를 배포했지만 연락 오는 곳이 전무한 형편이다. 담당 형사는 “검찰에서 빨리 처리하라고 재촉해 국과수에 치아, 머리카락, 골반 뼈 일부를 보내고 나머지 시신은 구청에 넘겼다”며 “국과수 감정 결과가 나와야 좀더 수사를 할 수 있을 텐데 국과수에 일이 너무 많이 밀려 있어 언제쯤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월 대구의 한 음식물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유골도 범죄와 연루된 희생임이 확실해 보이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곧 행정처리될 운명이다. 대구 북부경찰서 담당형사는 “수사경찰 경력 10년차인데, 변사자가 살점 하나 없이 뼛골로만 발견된 경우는 처음이라 답답하다”고 털어놓았다. 경찰에 접수된 가출인 및 실종자를 대상으로 수사를 벌여도 가족을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 그는 “국과수에 유전자만 보관시키고 나머지 시신은 구청에 넘겨 행정처리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한쪽에서는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일사천리로 정리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실종자 가족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애타게 찾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정은식(58) 씨는 2001년 3월 차를 몰고 나간 뒤 행방이 묘연해진 아내를 찾기 위해 자비로 잠수부를 동원해 북한강을 네 번이나 훑었다. 아내가 실종된 지 1년이 지났을 때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실종자를 찾아주겠다는 브로커에게 100만원을 주고 경찰청 행려사망자 기록을 뒤지기도 했다.

    그러나 관련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정 씨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니다”며 “그런데 죽은 사람이라면, 어디 가서 찾아야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실종자 가족들은 ‘발 동동’

    2001년 고향 마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어머니 김환순(당시 65세) 씨를 찾고 있는 이경수(45) 씨는 “불길한 생각이긴 하지만, 범죄에 희생되어 어딘가에 암매장돼 있진 않을까란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실종자 가족들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마음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 강국이라는데, 행려사망자나 무연고시설 입소자 등의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려놓는 사이트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산 자에게 잊혀진, 그러나 나름으로 소중히 살다 먼저 간 이들. 이곳에 안식처를 마련했습니다. 편안히 잠드소서.’

    벽제리공원묘지 합동분묘에 세워진 묘비에 적힌 글귀다. 그러나 모두가 잊혀진 이들은 아닐 터이다. 이들을 기억하고 있을 산 자들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도록 할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Tips. 행려사망자

    행려(行旅)사망자란 길거리나 병원 등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으나 연고가 없는 사람을 일컫는 행정적 용어다. 경찰 등 수사기관은 행려사망자를 보통 변사자(變死者)로 부른다. 수사기관은 사인이 불명확하거나 자살, 범죄로 인한 사망 등으로 의심될 경우 변사자에 대해 검시 및 수사를 벌인다. 수사를 통해서도 유족을 찾아내지 못할 경우 변사자 시신도 마찬가지로 지방자치단체에 넘겨져 처리된다. 지자체는 행려사망자를 화장하거나 가매장한다. 일부 행려사망자 주검은 해부실습용으로 교부된다.






    댓글 0
    닫기